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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연재 May 13. 2024

이거 그린라이트 맞나요?

<소설> 비혼이지만 하고 싶습니다 11화 

몸과 마음이 이미 파김치가 된 상황. 하루종일 많은 사람들 속에서 일하다 보니 소연은 더 이상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저녁을 먹고 가네 마네 하면서 열띤 논의를 하고 있었지만 소연의 머릿속에는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게다가 공연장은 양평 쪽이고 집은 성북동이니 뚜벅이인 소연으로서는 집에 가는 길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피디에게 먼저 들어가겠다고 하니 다행히 피디는 수고했다면서 쿨하게 보내주었다. 겨우 공연장을 나와서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면서 소연은 이럴 때 누군가 태워주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거뜬히 혼자 당연히 해 온 일인데 유난히 힘들다고 느껴지는 건 나이 탓인가, 아니면 그동안 남자를 만나겠다고 이리저리 나대고 다니는데 너무 힘을 많이 쏟은 탓인가 싶기도 했다. 시외버스 정류장까지 2KM 남짓. 바람을 좀 쐬고 싶어서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는데, 소연 앞에 갑자기 차 한 대가 섰다. 차의 문이 열리면서 환하게 웃고 있는 종수의 얼굴이 보였다.

“퇴근하는 길이세요?”

종수의 말에 소연은 다시 업무용 표정을 장착하고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덕분에 위기 탈출했어요. 수고 많으셨어요”하며 인사를 건넸는데 종수가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다. 소연은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라고 괜찮다고 하며 터미널까지 걸어가면 된다고 했는데, 순간 종수가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지 태워준다고 말하지는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소연의 마음을 읽었는지 종수가 “태워준다고 하지 않았는데.”하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종수의 장난스러운 말에 소연은 긴장이 풀어져서 “한 번은 예의상 거절하려고 했죠. 이제 두 번만 권해 주시면 못 이기는 척 타겠습니다.”하면서 농담을 했다. 

비상등을 켜고 종수가 내렸고, 운전석 옆자리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터미널까지만이라도 태워드릴 테니 타세요. 여기 사람 잘 안 다니는 곳이라 위험합니다.” 문까지 열어주는데 거절하기가 곤란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지금의 선택이 중요한 선택이 될 것만 같다는 본능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소연은 종수의 차에 올랐다.

“오늘 같은 날은 몸이 천근만근이잖아요. 걸어가고 대중교통 이용하는 게 힘든 날이죠. 근데 집은 어디세요?”

종수의 말에 소연은 성북동에 산다고 답하고 말았는데 그 말에 종수는 “집까지 모셔다 드릴게요. 저도 그 근처로 지나가요”하는 것이었다.

순간, 소연은 낯선 이와 말을 안 해도 되는 혼자 대중교통 타는 쪽과 낯선 이와 2시간가량 차 안에서 말하면서 가야 하지만 몸은 편하게 이동하는 쪽. 두 가지 사이에서 엄청난 내적 갈등을  겪었다. 마음 불편한 사람하고 맛있는 걸 먹느니 그냥 마음 편하게 혼자 라면을 먹겠다는 주의인 파워 I였지만 오늘의 승자는 몸. 몸이 너무 힘들어서 입이 힘든 게 조금은 더 나을 것 같았다. 다행히 종수는 모든 게 적당했다. 어색함을 극복하기 위해 무리하게 억텐을 하지도 않았고, 어색하게 입을 꾹 다물고 가지도 않았다.

 

“음악 프로그램에서 일하면 음악 듣는 거 지겹지 않으세요?”

“음악은 희한하게 지겹진 않아요. 막 바쁘지 않은 날은 아주 잠깐이지만 노래 나갈 때 창밖을 보기도 하는데요, 그런 순간순간이 너무 행복해요. 뮤직비디오 여주인공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기억나는 노래 있으세요?”

종수의 질문에 소연은 문득 오늘 일이 떠올랐다. 

“오늘 지인짜 힘들었거든요. 요즘 좀 마음이 볶인 일도 있었고요. 그런 데다가 오늘 좀 바빴어요? 그 와중에 <이젠 나만 믿어요>를 듣는데 갑자기 울컥하는 거예요. 잠깐 서서 들었다니까요. 그렇게 뭔가 갑자기 팍 꽂힐 때가 있어요.”

소연의 말이 끝나자 종수는 갑자기 오디오 쪽을 만지더니 “아깐 바빠서 제대로 못 들으셨을 테니까 편하게 들어보세요. 제가 말 안 시킬 테니까”하면서 노래를 틀어주었다.

<이젠 나만 믿어요>였다.

소연이 놀라자 종수가 말했다

“사실 저도 이 노래 좋아하거든요.”하며 웃었다.

‘이 사람은 참 다정하고 섬세한 사람이구나.’ 

소연은 다시 한번 종수를 봤다. 

‘역시 관상은 과학이군.’ 

그의 서글서글함이 호감으로 다가왔다.

“지금은 살만 한가 봐요. 아까처럼 울컥하진 않네요. 김 실장님이 차 태워주신 덕분이에요.”

소연이 명랑하게 말했다. 그때 소연의 배에게 꼬르륵 소리가 났다. 종수가 그 소리를 들었을까 못 들었을까 싶었지만 못 들었다기엔 소리가 너무 컸다. 소연이 선수를 쳤다.

“제 배에서 꼬르륵 소리 나는 거 들으셨어요? 정말 배고프네요. 김 실장님은 식사하셨죠?”

종수는 “어? 제 배에서 난 거 아니었어요? 하하. 저도 오늘 종일 못 먹었거든요. 오늘 같은 날은 밥이 안 넘어가죠.”하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상대를 무안하지 않게 해 주려는 배려가 느껴져서 호감이 또 상승했다. 소연은 ‘이 남자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종수는 지금 뭐가 가장 먹고 싶은지 물었다. 소연이 고민 없이 라면이라고 답하자 종수는 자신은 짜파구리가 가장 당긴다고 말했다. 

“짜파게티하고 너구리하고 섞은 거 말하는 거죠?”

“그게 지금은 컵라면으로 나오는데 컵라면은 좀 맛이 떨어져요. 전 반반씩 섞는 거 좋아하는데 혼자 있으니 2인분 해서 먹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정말 배고플 때만 먹어요. 오늘은 가서 그거 먹어야겠어요.”

종수의 말을 듣고 소연의 귀에 한 가지가 꽂혔다.

‘혼자 있으니’

그 말을 들으니 갑자기 허기가 온 데 간 데 사라져 버렸다. 이 나이에 이 정도로 나이스한 사람이 흔치 않은데 게다가 솔로라니? 그렇게 기다리던 인연인가 싶다가도 그건 오버라고 스스로 마음을 부여잡았다. 혼자 있다는 게 기러기 아빠처럼 뭔가 사정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사심이라는 게 작동되니, 평소 같으면 “가족들은 안 계세요?”라고 물을 수도 있을 법한데, 제 발이 저려서 묻는 게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아서.


일말의 가능성 같은 여지가 있다 여겨지니 한 차 안이라는 그 공간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처음 탔을 때의 불편함은 사라지고, 아늑하고 설렘이 있는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언제 집까지 오나 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벌써 소연의 집 근처에 이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자기도 뭔가 종수에게 사인을 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솔로라는 사인. 

그가 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사인이 뭘까 하고 열심히 궁리했다. 집 근처에 이르러서 내릴 무렵, 동네가 좋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평소 산책 코스를 종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엄마하고 오래 여기서 둘이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고향 같고 참 좋아요.”

소연은 이렇게 말하고 나서 ‘아주 자연스러웠어’하며 만족해했다. 이 정도 말했으면 소연이 솔로라는 사실을 눈치채고도 남을 거였다. 


어느덧, 집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눴다.      

“덕분에 편하게 잘 왔습니다. 요금 얼마예요?” 하고 소연이 농담을 던졌다. 

“내리신 다음에 기사 평가 잘 좀 부탁합니다. 다음에도 ‘이 기사님 다시 만나기’ 꼭 눌러주시고요.”

종수가 받아쳐서 소연은 또 한 번 풋 하고 웃었다.

“요금은 됐고요.. 나중에 차 한잔 사세요.”

종수의 말이 소연은 반가웠다.

“기꺼이 사죠. 회사 근처 오실 일 있으시면 연락 주세요.”

종수는 알겠다고 하고는 인사하고 떠났다. 뒤에서 종수 차를 바라보고 있자니, 소연은 살짝 마음이 들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러다 조금 뒤, 종수에게서 카톡이 왔다. 아까 공연 중간에 무대 쪽으로 갔을 때 찍었다면서 소연의 사진 두 장을 보내왔다. 소연이 누군가와 통화하는 모습과 원고를 고치는 모습이었다. 

‘이거 그린라이트 아냐?’  

소연의 집을 올라가는 길에 있는 계단 앞에 섰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길을 따뜻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참 은은하고 예뻤다. 계단 하나하나를 피아노 건반 두드리는 느낌으로 올라갔다. 누군가 소연의 등뒤에 풍선을 달아놓은 것처럼 몸이 몽실몽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두려움인지 불안이지 모를 감정이 소연을 뒤덮었다.

‘김칫국 마시다가 망신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잖아. 호의와 호감을 혼동하면 안 된다고. 소연아, 너 굶었니? 굶은 사람처럼 왜 이래? 너 이렇게 쉬우면 안 되는 거야.’

그렇게는 말했지만, 소연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안함 사이로 기대가 뚫고 나오고 있었다. 미세한 떨림. 너무 오랜만인 만큼 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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