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겁 많은 아이
그날 나는 태어나 처음 극장 의자에 앉아 영화를 관람했다.
그리고 어린 머릿속으로 장면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외우며 봤다.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영화를 보면, 몇 번이고 돌려보는 습관이, 기억하고 외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정말 재미있었다. 거칠고 덜렁거리며 거침없는 여자. 멋있었다.
수줍고 세상에 겁먹은 표정인 어린 나에게 주인공은 우상이 되어 있었다.
나와 반대로 외사촌언니는 겁이 없었다. 사돈에 팔촌까지 모르는 친척이 없었다.
영화를 보고 돌아와 해가 져서야 버스를 타고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어린 내 주위를 감싸고 있던 외사촌 언니와 오빠들, 아버지 친구네 언니들 모두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울보, 겁쟁이, 얼뙨 아이, 겁보!
맞다. 나는 그때 세상이 너무 무서웠다.
학교라는 사회도 무서웠고 그 학교 속 거친 사내아이들도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어른들은 내게 커다란 바위 같은 존재들이었다.
어른만 등장하면 말문을 닫고 착한 아이가 되어버렸다.
세상은 그렇게 늘 내게 두려움과 스트레스와 공포로 가득 찬 곳이었다.
그날 밤, 어린 나는 누추하고 가난한 우리 집 누더기 같은 누비이불을 덮고 온몸에 긴장과 힘을 다 풀어버리고는 다음 날 늦은 오후까지 깊은 잠에 빠졌다.
중학교를 다닐 무렵, 홍콩 영화와 할리우드 액션 영화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집에서 세 정거장 다음인 곳에 내려 십여 분 산비탈로 걸어가야 하는 여자중학교에 다녔다.
50년대 전쟁 피난민들이 부산과 경남 일대로 대거 이동해 내려오면서, 마산은 부산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전쟁을 피해 과포화인 부산을 지나 바닷가 도시 마산과 진해와 통영 일대로 많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이 이동했다.
50-60년대 창동은 가히 문화예술의 성지이자 르네상스라 할 정도로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일어났고 곳곳에서 그림이 전시되었고 화랑이 번성했다.
그 화려한 시절 창동 가구거리 뒤편 사잇길로 난 삼각주 모양 한가운데에, 네 번째 삼촌이 운영하는 교복사가 위치해 있었다.
물론 60년대 그 길에 즐비한 교복사들과 양복점들 가운데 한 곳에서 재단사로 일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60년대 장군동 마산 시청 앞에 있는 세무서 직원으로 근무 중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시 할머니와 아내와 다섯 명이나 되는 동생들과 홀어머니까지 부양하며 살았다고 한다.
60년대 30살을 겨우 넘긴 아버지 퇴근길은, 세무서에서 나와 모직 바바리코트 깃을 세우며 경남 데파트를 지나 몽고정을 걸어 교복사들과 양복점과 신신예식장을 지나 수많은 헌책방과 서점가를 지나 좁은 비탈로 올라가 추산동 산비탈 문신 조각가 아버지가 살았다는 그 어디 즈음, 낮고 초라한 지붕 대문을 밀고 들어갔을 것이다.
마산에는 유독 여학교가 많지 않다. 물론 남학교도 마찬가지이긴 했다.
가장 명문은 아버지가 졸업하신 마산상업고등학교였고, 마산고등학교와 마산여자고등학교는 조금 늦은 70년대 이후 대학 열풍 속에서 크게 성장했다.
마산여자상업고등학교, 일명 마여상은 대학 진학을 포기한 여학생들이 가는 상업학교였는데, 당시만 해도 졸업과 동시에 대기업 취직까지 줄을 이었다.
나는 마산여자중학교라는 공립 중학교를 다녔다. 60년대부터 서울 예술가들과 유명인들이 마산을 대거 스쳐가서인지, 마산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일종의 로망을 간직하고 있다.
단, 세상에는 늘 예외가 존재한다. 무심한 내 아버지와 세상 물정 모르는 내 어머니는 예외다.
또 이야기가 딴 데로 빠져 도망을 치려 한다.
그래도 이 물살을 꺾으면 도저히 생각이 달아나버려 할 수 없다. 인구 과포화 70년대와 80년대 초반, 오전 오후반이라는 말도 안 되는 학교 시스템 속에서 초등학교를 다니고, 84년 마산여자중학교에 입학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3년을 오전 오후반으로 번갈아 학교를 갔다.
교실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서, 한 반에 족히 70명은 넘게 앉아 있었다.
말 그대로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었다.
일곱 살에 학교에 입학한 나는, 그래도 공부는 악착같이 따라가는 편이었다.
내 성이 ㅂ 초성으로 시작하니까 번호는 항상 20번대였다.
뒷집 살던 같은 학년 아이는 ㅎ 초성으로 시작되는 성이어서 항상 번호가 50번 후반으로 밀려났다.
출석부에 적힌 우리들 이름은 한자 사전처럼 빼곡하게 한자로 가득했다.
새 학기가 되면 담임선생님들은 정확하게 언제나 똑같은 것을 내게 질문했다. 가끔은 도수 높은 안경을 추켜올리며 또 가끔은 또각또각 걸어서 향수 냄새를 풀풀 풍기며 내 앞에 서서.
이름이, 바를 정이 아니라 뜰 정이구나!
그때는 그것이 내 세상에서 가장 큰 고민 중 하나였다.
아버지는 왜 하필 내 이름을 그렇게 지어서는 부끄럽게 자꾸만 선생님들이 내 존재를 알게 만드는지.
그것이 불만이었다. 그저 지극히 평범하고자 기를 썼던 것 같다.
누구나 어린 시절 꼭 한 번은 하는 말, 이름 바꿔 줘,를 떼쓰듯 반복하며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사진자료출처
https://www.milkt.co.kr/Eduinfo/pop_child_edu_info_list?idx=2&PageTyp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