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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들어 있던 책만 들고 가볍게 오세요

생애 첫 독서모임 진행기

by 뮤슈만

생애 첫 독서모임을 진행했다. 일하는 서점에서 이벤트처럼 진행하는 일회성 모임. 누가 올지, 어떤 취향의 사람이 모일지도 모르는 소규모 행사지만 찾아온 누구라도 함께한 시간이 아깝지는 않았으면 했다. 적어도 이것만큼은 얻어간 게 있다는 충만감이 있길 바라며 사부작사부작 일일 독서모임을 준비했다.


일회성 모임의 묘미는 누구나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해도 된다는 점. 올해의 절반이 지나가는 시점인만큼 느슨해진 마음을 가다듬고 남은 하반기를 잘 보내기 위해 숨 고르는 시간을 마련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임의 주제를 정한 뒤 남은 업무는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무료 탬플릿을 활용해 포스터를 만들고, 독서모임을 진행할 큐시트를 손으로 직접 쓰며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기꺼이 시간을 내어준 참여자들에게 주고 싶은 1L짜리 커피와 한입에 쏙 들어갈 마들렌 크기의 빵을 사고 책방에 출근했다. 모임을 준비하는 내내 여름 향기 가득한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하며 나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흥얼거렸다.


포스터.png 미리캔버스로 만든 독서모임 홍보 포스터. 내 마음대로 만들어도 되는 포스터라니. 형식도 규제도 없는 홍보물이라니 ~_~


모임은 총 4명이 참여했다. 모셔두기만 했던 책을 낯선 사람들에게 소개하려면, 책과 나 사이에 얽혀있는 이야기를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이 책에 꽂힌 순간, 이 책을 꼭 읽고 싶다는 마음이 싹트게 된 이유.


내가 가져온 책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었다. 이십 대부터 문학가로서 이름을 알렸던,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천재 그 자체였던 괴테도 인생의 노잼시기를 겪었다. 정치도 하고 과학도 기웃거리던 무료한 날들이 쌓여가던 때, 괴테는 서른일곱 살 자신의 생일파티에서 혼자 빠져나와 여행을 떠난다. 어릴 적부터 로마를 이상의 도시로 동경하던 괴테는 1년 9개월간 이탈리아 전역을 돌며 그곳에서 삶의 터전을 잡은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하고,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 숨 쉬는 미술과 유적을 탐구하며 문학인으로서, 예술가로서의 감각을 다시 깨운다.


'파우스트'와 같은 역작을 남기고, '인생은 속도보다 방향이 더 중요하다'는 명언도 남긴 괴테의 여행기라는 명성보다 이 책을 더 끌리게 한 것은 아주 사소한 감정선을 건드린 대가의 인간적인 면모였다.

날 때부터 천재인 다재다능한 사람도 인생의 노잼시기를 겪는다는 점, 다 가진 사람도 훌쩍 어딘가로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는 사실이 이 책을 완독 하고 싶다는 마음을 키웠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말 그대로 괴테의 여행일지와도 같은 기록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같은 것을 보고도 생각하고 묘사하고 표현하는 능력이 워낙 탁월해서, 글을 읽고 있음에도 괴테의 여행 브이로그를 보는듯한 생생함이 느껴졌다는 점. 말 그대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서 책을 읽었다.


독서모임 사람들 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담긴 책에 푹 빠져보는 시간을 가진 터라, 현장에서의 책 읽기가 종료됐을 때 모두들 아쉬워했다. 책을 더 읽고 싶다는 마음을 심어줬으니 이것만으로도 오늘 독서모임은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모임 컨셉에 맞게 새해 복 많이를 외쳐야 할 것 같은 엽서에 오늘 남기고 싶은 문구를 손으로 직접 적어보는 필사 시간을 마련했다. 책 읽기에 푹 빠졌던 시간, 책장을 더 넘기고 싶다는 마음, 얼마나 좋은 책인지 사람들에게 소개하고 인상적인 글귀를 공유하며 커진 책에 대한 애정을 집까지 잘 담아가길 바라는 마음에 가져온 엽서들인데, 챙기길 잘했다는 생각에 마음에 뿌듯함이 가득 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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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을 읽었는데 마치 네 권을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 오늘의 독서 모임. 단 하루 열린 모임이었지만 책이라는 매개체로 짧은 시간 안에 사람들과 부쩍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게 놀랍고 신기했다. 생애 첫 독서 모임 진행은 하길 잘했다.

KakaoTalk_20250623_192858568_14.jpg 생애 첫 독서모임 진행을 위해 수제 제작한 큐시트 ^3^


책과 엽서를 갖고 집에 가는 길.

아직 반이나 남은 푸른 뱀의 해를 잘 살아봐야겠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흥얼거리며 걸어가는 길이 행복했다.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올해 안에 꼭 완독 해야지!

언젠가 이탈리아 여행을 갈 때 떠올릴 수 있도록.


잊지 않는다면,

뒷면에 빼곡히 필사해 둔 엽서도 행운의 부적처럼 가져가야겠다.


언제 갈지 모를 이탈리아 여행을 꿈꾸며 현생도 열심히 잘 살아봐야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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