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일을 해요, 라고 말하면-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자리가 생긴다. 그림을 그리거나 기타를 치거나, 회식을 좋아하는 관장님이 있는 체육관에 다닐 때가 그렇다.
일을 할 때는 아니다. 어차피 누가 누군 줄 아는 사람들끼리 만나는데다, 일을 하며 만나는 사람이래 봐야 제작자나 감독, 아니면 PD, 셋 중 하나거나 그렇게 셋이거나라서, 우리의 첫만남이 특별히 어색하다거나, 시작 전에 간단히 자기소개라도, 하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가끔 영화제나 행사, 지나다가 끼게 된 술자리 등에서 '그리고 그밖의 관련자들'을 만날 수 도 있지만, 그런 때의 자기 소개란, 나의 주요 필모그래피가 대신하게 된다. (그래서 주요 필모가 좀 뜸한 요즘에는, 지나가다 끼지 않는다.)
작가가 자기 작품의 스태프들을 만날 일도 거의 없다. 짧게는 몇 개월에서 길게는 일년이 넘게 작업을 이어가며 시나리오를 쓰고, 고치고, 고치고, 고쳤더니...시나리오는 남고 작가는 떠나야 한다. 당연하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들어오고 나가는 순서가 다를 뿐이다.
작가가 완성한 시나리오를 두고 캐스팅을 하고, 스태프가 모이고, 어떤 경우는 감독도 그때 붙는다. 제작자나 감독, 아니면 PD중의 한둘, 다해봐야 서넛이던 사무실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다. 새로온 스태프 중에 작가의 실제를 봤다거나 아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어쩌다 사무실에 들르게 되면, '당기시오'가 붙은 유리문 앞에서 자.기.소.개.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아...저는....작간데요....."
(영화 '어댑테이션'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등장하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촬영현장에 놀러갔다가 현장 스태프에게 제지당하며 실제로 저런 대사를 한다. "I'm...uh...writer....." 영화를 쓴 작가의 경험담이고, 그 작가는 '이터널 선샤인'의 '찰리 카우프만'이다.)
제아무리 기백이 넘치는 작가라 하더라도 그런 현장에 오래 있기란 힘들 것이다. 제작자는 바쁘고, 감독은 더 바쁘고, PD가 제일 바쁜 상황이라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그 셋 뿐었던 작가는 '구경하는 사람' 밖에 역할이 없다. 그래서 그런가 작가라고 하면 외골수 라던지, 고독이 벗이라며 괜히 깃 세우고 머리 날리고 하는 클리쉐적 이미지가 있는데, 그런 사람이라서 작가가 된 건 줄 알았겠지만, 작가를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작가라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사람 많은 자리가 어렵긴 어렵다.
작가라 글을 쓰지만, 자기소개서는 써 본 적이 없다.
"그러면 무슨 작가에여?"
"영화를 씁니다."라고 한다. 그때부터 예정에 없던 Q&A타임으로 넘어가는데, 뭘 했는지, 누굴 본 적 있는지, 어떻게 시작하게 됐는지, 지금은 뭘 하는지....그 와중에 누구는 막 핸드폰으로 검색창에 쳐 보고.....
최근작이 뜸하거나 히트작이 소박한 나 같은 경우, 본격적으로 난감해지기 시작한다. 둘러댈 말이 없어서 뭐를 했다고 말해줬더니, '그런 장르는 별로...' 라거나(어쩌라고!), '아 보긴 봤는데...'(재미없더라, 라고 얼굴로 말하는 중)하며 말줄임을 할 때 그렇고, 간혹 '아-너무 좋아해요!'라고 하면 쑥스럽기 때문에 또 난감하다. 이럴 경우 얘기는 조금 더 길게 이어지는데, 오늘밤 집에 안 가도 된다 한들 내가 해줄 얘기가 많지 않은 게, 자꾸 말하지만 내가 작업하면서 만나는 사람이라야......
이럴땐 차라리 인기가요나 무도 작가였으면 오백배는 더 신나는 기분으로 집에 가게 해줄텐데, 미안할 일도 아닌 일에 미안해질 따름이다.
드러낼 수 있는 호기심에 비해 어쩌면 훨씬 심심한 일이고,
다만 조금 더 '털기 좋은' 직업일 뿐인,
"글쎄 뭐 별거 없는데".....하게 될텐데 하더라도.....
직업인으로서의 글을 쓰고 있는,
아직은, 시나리오 작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