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작가에게
그 해, 명동의 어느 중국집에 스무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였다. 이십대부터 사십 중후반까지의 여자와 남자들. 중구난방의 사람들을 엮는 단 하나의 공통점은, 그들은 전부- '시나리오 작가'였다.
전부가 시나리오 작가인 그들은 마찬가지로 작가인 사회자의 진행(?)에 맞춰 한 사람씩 일어나 꾸벅- 수줍은 인사를 했다. 햇수가 다섯 손가락 넘도록 시나리오 작가였던 나는, 그 날, 존재하는 다른 시나리오 작가들을 처음 보게 됐다.
나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일을 하다 보니 업계의 굴러가는 모양이라던지, 일을 얻는 것, 특히 계약에 관해 조언을 얻을 곳이 없어 한참 곤란을 겪었다. 기준을 모르니 그냥 '주는대로' 받으면서 '이래서야.....'라는 생각을 종종했다.
답답하게 오래 지나다가, 트위터를 하게 되면서 세상에 이렇게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밤만 되면 떠들어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느 날- '작가들의 오프모임'에 용기를 내서 DM을 보냈다.
'작가님, 저도 갈게요.'
서로가 좀 신기해 했다. 그렇게 많은 시나리오 작가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 봤다. 그 중에는 '내가 좋아하는 그 영화'의 작가님들도 여럿 있었다. 좋아하지 않는 영화의 작가들도 있었지만 동료라고 생각하니 사람으로서 금새 좋아졌다. 글빨만큼 말빨도 쎈 작가들이 하도 많아서 한마디도 못 꼈는데, 그래도 얘기는 다 알아들었다. 우리끼리만 아는 농담 같은 걸 척척- 알아들었다.
어느 작가의 집으로 2차가 이어졌고, 근사한 난로 주위에 아무렇게나 의자를 끌어다 앉은 옆자리에, 되게 큰 작가님이 있었다. 덩치가 큰 게 아니라 연차가 오래 된 현역작가였다. 대학 다닐 때 극장에서 그가 쓴 영화를 봤다. 새벽까지 이어지느라 말랑해진 수다 틈에, 나는 아까부터 망설이던 질문을 그냥 해버리기로 했다. 훨씬 오래 전부터 누가 좀 알려줬으면 했던 그런 궁금함이었다.
"작가님, 저기요......"
작가님은 족발을 먹고 있었다. 족발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다.
"무섭지 않으세요?"
몇 편의 작업들을 이어가게 되면서, 새로운 작업을 시작 할때마다 나는, 되게 무서워졌다. 연차, 횟수, 그런 게 늘어봐야 어쨌든 늘- '처음 보는 얘기'일 뿐이었다. 바톤은 이어지지 않는 릴레이 경기였다. 이걸 어떻게 120분으로 늘리지, 그것도 사람들이 절대로 일어날 생각이 안 들게. 웃다가 울다가 하게.
"새로 작업 들어갈 때요, 무섭지 않나요?"
작가님은 대수롭지 않게 족발 옆에 둔 남은 맥주를 들며 그랬다.
"응? 아아-"
대수롭지 않은 걸 넘어, 고민의 여지도 없이 말했다.
"무섭지."
그리고 금새 수다에 섞여 낄낄 웃었다. 나도 더 궁금한 것도 없었다. 모든 게 다행이었다. 그 한마디로 다 안심이 됐다.
그 날 작가님은 이태원에서 분당까지 택시를 타고 갔다. 부인이 전화로 귀가를 재촉했기 때문에 할증이고 뭐고 제일 처음 잡힌 택시를 새치기 선수처럼 타고 사라졌다. 그는 부인의 전화를 더 무서워했다.
나도 방향이 같은 다른 작가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날 밤엔 잘 잤다. 잠이 안 올 이유가 없었다. 다 똑같으니까. 나만 무서운 게 아니었니까.
이후로 새로운 작업을 안심하고 들어갔냐면 그건 아니다. 늘 무섭긴 무섭다. 무서운데, 괜찮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니까. 뭐- 괜찮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