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k모 치킨집에서 오리지널 치킨을 사기 위해 키오스크 앞에 서있었다. 포장하기 톡, 치킨 톡, 오리지널 치킨 톡, 간편결제 톡, 카카오페이 톡. 메뉴 선정에서 결제 경로까지 망설임 없이 물흐르듯 이어지고 있었다.
이즈음이었을까. 뒤에서 무겁고 불쾌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가만있어 보자.. 어디 카카오페이를 열어보자.. 아, 잔액을 이동해야겠네. 계좌이체하기.
디자인이 복잡한 카카오페이에 아직도 적응이 안 되었다. 사실 나는 키오스크도 간편결제도 다 싫고, 절대로 고장날 것 같지 않은 두꺼운 금색 메탈 자크가 달린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장지갑에 쫙 펴진 만원짜리 열서너 장과 동전지갑 같은 것을 갖고 다니며 현금 거래만 하던 세상을 그리워하는. 아조씨의 표상 같은 존재였다. 그런 내가 엠지 흉내를 내며 키오스크 앞에 서 있었다.
계좌이체.. 가만있어 보오자. 계좌이체.. 계좌이체라… 이쯤부터 강하게 눈치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어떤 보이지 않는 키오스크의 선을 넘고 있다고 느껴졌다. 현기증이 살짝 느껴졌다. 섹시하게 시작했던 키오스크 선상의 결제의 리듬도 다 허물어졌다.
이체하기-페이스 인증-이체중입니다. 하.. 오케이. 이체는 됐고. 이제 결제하기.. 페이머니로 해야 되는데. 슥슥. 페이머니 빨리 나와라.. (또 다시 쓰지 못하는 수많은 카드들을 넘기며) 오케이, 페이머니..
어? 아. 페이머니, 또 다른 계좌에 있겠다: 몇 주 전 쯤부터인가, 갑자기 페이머니에 계좌이체를 하면 곧바로 다른 증권계좌로 자동으로 이동되어 막상 결제를 하려하면, 머니가 사라져 있어 여러번 애를 먹었다. 그걸 고치는 길은 나에게 너무 멀어, 그대로 두고 매번 두 번씩 돈을 옮기며 사용하며, 간편하지 않은 간편결제를 쓰고 있었다.
증권, 어디 보오자.. 계좌관리, 다른 증권계좌로 이동..
이쯤에서 한 번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돌아보고 몇 명이 줄 서 있는지도 보고, 분위기가 험악하면 죄송합니다.-라고 익스큐즈를 구하기도 해야 했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압도되어 그러지 못했다.
생각보다 그때의 내 마음이 무겁고 경직되어 있었던 것 같다. 살다보면 사람이 왜 고개 한 번 돌려 주변을 돌아보는 일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안 될 때가 있지 않은가(아닌가?). 한편으로 그럴 시간에 빨리 결제를 끝내고 나오는 게 윈윈하는 길이란 생각이 들기도 해서, 그럴수록 더욱더 결제를 마치는 일에 집착했다. 키오스크의 버뮤다 삼각지대에 갇힌 것이다.
계좌이체하기, 페이스 인증… 페이머니를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즈음이었던가. 결제를 포기하고 그냥 다시 뒤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다. 우주의 압력이 너무 강력했다. 하지만 그건 너무 수치스럽고 이상하고 부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닌가. 외골수의 면모를 가진 나는 앞으로 가기 시작하면, 끝까지 앞으로만 가게 되는 그런, 악한 고집이 있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만 가야 해.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세상… 푸푸, 정신을 차리자. 빨리 완료해야 돼. 왠지 뒤에서 점점 더 강력한 시선의 압박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전류가 느껴졌다. 확실히 한 사람은 뒤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다시 안 쓰는 카드들의 행렬을 넘어 화면을 페이머니로 결제하기에 위치시켰다. 결제하기.. 페이스 인증..
드디어 빨간 레이저가 나의 페이머니를 읽기 시작했다. 조급해진 나는 영수증도 나오기 전에 오른쪽으로 반 걸음 정도 옮겨 몸을 비켜섰다. 이런 행동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하지만 왠지 진한 검붉은 색의 레이저가 느껴지는 익명의 뒷사람에게 나의 결제가 다 끝났음을 알리려 하는 것이기도 했다.
…
오케이캐쉬백을 적립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아니오를 눌러야 했다.
예. 캐쉬백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열 여섯 자리. … 어디 보오자.. 내가 오케이캐쉬백 앱이 있었던가….
뒤로 돌아나오는데, 서른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식탐과 욕망이 강해보이는, 짐승같이 생긴 남자의 고개가 바로 눈 앞에 있었다. 1/3 걸음만 다가오면 백허그를 할 수 있는 거리였다. 내 결제 화면을 다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언제부터 보기 시작했던 거야? 당황과 분노, 미움, 절망…
아니 아무리 내가 키오스크랑 야곱의 씨름을 하고 있었기로소니. 이렇게 가까이 서 있는 야만인은 또 무엇인가? 나의 예민한 강박과 너의 천박한 식욕이 부딪힐 때-라고 할까, 나의 높은 예절의 기준과 너의 야만이 포개어질 때-라고 할까 고민했지만, 그냥 키오스크에서 라고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