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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리나 Sep 18. 2022

19. 인생도 수면 매매가 되나요?

힘들어? 앞으로 더 힘들 거야.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19. 인생도 수면 매매가 되나요?



 무나틱 코인의 대폭락 관련 뉴스는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그 날 저녁 내내 3사 뉴스와 케이블 종편까지 무나틱에 대해 떠들지 않는 채널이 없을 정도였다. 한 차례 충격이 가시자, 각 전문가들이 등판하여 무나틱 코인의 폭락 사태에 대해 분석하기 시작했다. 


 무나틱 코인의 드라마틱한 대폭락의 원인은 사실 무나틱 코인의 근본적인 구조 그 자체였다. 무나틱 코인은 가상화폐이면서도 다른 가상화폐들과는 달리 ‘안정성’을 담보하여 홀더들을 유치하고자 했다. 코인의 가치를 달러를 추종하는 스테이블 코인과 맞춰 인위적으로 고정하며 스스로를 ‘안정성 있는 코인’으로 포지셔닝해온 것이다.


 그렇지만 무나틱 체인 운영자들은 안정성만 내세워서는 홀더들을 끌어 모으기 어렵다는 점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디파이 플랫폼을 이용한 스테이킹 시스템을 도입하여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마치 시중 은행에서 자금을 운용하고 예금주에게 이자를 주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홀더들에게 추가적인 혜택을 제공한 것이다. 무나틱 코인은 홀더들에게 이런 약속을 한 셈이다.


 ‘우리는 비록 드라마틱한 가격 상승은 없을 수도 있으나 안정적으로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스테이킹하는 홀더들을 위해 정기적인 이자를 제공하겠다.’


 혜진이 처음 가영에게 무나틱 코인에 대해 설명해 주었을 때, 가영이 결정적으로 혹했던 이유도 바로 이 안정성과 스테이킹 시스템이었다. 


 한 탕 해 먹고 튀려는 도박판의 종목들 같은 코인들에 지친 투자자들에게 무나틱 코인의 포지셔닝은 꽤나 효과적으로 먹혀 들어갔다.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덕분에 무나틱 코인은 시총 7위의 자리까지 올라가게 된 것이다. 


 문제는 무나틱 코인이 스테이블 코인과 가치를 고정하는 방식이었다. 여태까지는 겉으로 봐서는 문제 없이 돌아가는 듯 보여서 아무도 자세히 따지고 들지 않았지만, 사실은 뒷단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 무나틱 코인의 구조에 의구심을 가진 누군가가 그 허점을 제대로 파고 들어 까발리기 시작하면서 이번 비극이 시작되었다. 그는 이번 대폭락이 발생하기 며칠 전 MOONATIC Base에 마련된 투자자 포럼에 글을 하나 올렸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동안 무나틱 코인을 운영하는 재단의 리더들이 스테이블 코인의 가치를 고정하기 위해 특별히 개발한 알고리즘 수단이 있는 것처럼 포장해 왔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 기술적인 근거가  빈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이런 기술적인 허점을 보완하기 위해 재단에서 마련해 둔 재정적인 담보도 빈약하다는 점도 함께 지적했다.


  즉, 무나틱 코인의 안정성에는 실체가 없으며, 무나틱 체인 자체가 결국은 후속 투자자들의 자금이 계속해서 유입되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무나틱 코인의 구조는 사실상의 거대한 폰지사기 구조나 다름없었다.


 그 글은 포럼에 등록되자마자 엄청난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무나틱 재단의 리더들은 패착에 가까운 대응을 했다.


 무나틱 코인의 스테이블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재정적 담보 수단으로 비트코인을 내세운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 타이밍에 비트코인이 제대로 하락세를 탔다. 이는 그들이 내세운 재정적 담보의 안정성 또한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에 가치 안정성을 우려한 수많은 투자자들은 앞다투어 무나틱 코인에 넣어뒀던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특히 ‘고래’라고 불리는 큰 손들이 가장 먼저 빠져나갔다. 그렇게 썰물처럼 이어진 엑소더스 행렬에 무나틱 코인은 속절없이 폭락했다. 거기다 공매도 세력까지 개입하여, 코인 역사상 거의 유래가 없는 대폭락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업계에서도, 투자자들도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시총 7위의 자리까지 올랐던 무나틱 코인의 실체가 이렇게 한순간에 허무하게 까발려질줄이야.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내 이런저런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도 순식간에 무나틱 코인 이슈가 바이럴 되기 시작했다. 그중엔 안타까운 사연도 꽤 많았다. 





- 무나틱 실시간 10억이 100만 원 되는 현장 중계한 위튜버 (캡처 有). Jpg 


-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모아 왔던 5천만 원 무나틱에 몰빵 했는데 한 달만에 휴지조각됐네요. 다들 살아계신가요?


- 신혼집 구할 돈 조금만 불리려고 넣었었는데… 얼마 전에 좀 떨어지길래 마이너스 통장 땡겨서 좀 더 넣었거든요. 여친은 아직 모르고요. 들켜서 파혼당하면 어떡하죠?




 그러나, 이런 안타까운 사연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 중에서는 무나틱 코인 투자자들을 조롱하는 발언들도 많았다. 



- 코인충들 그럴 줄 알았다. 지들이 뭐라도 된 양 노동하는 직장인들 병신 취급하더니 ㅉㅉ 자업자득임


- 백배 천배 떡상 바라면서 가즈아! 외칠 땐 언제고 ㅉㅉ 가상자산이 왜 가상자산인 줄 아니? 0으로 수렴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


- 병신들이 지들이 코인 사놓고 구제해 달라 하네? 지들이 도박한 걸 왜 가지고 왜 세금 쳐들여서 구제해 줘야 하냐?


- 꼴에 자살은 마려운가 보지? 괜히 한강 가서 수질 흐리지 말고 다른 방법을 추천한다.




 가영은 지금 한창 인터넷에 올라오는 그러한 조롱들을 읽으면서 속으로 욕을 뇌까리는 중이었다. 


‘에라이 씨발….’


다들 돈 잃고 속 쓰린 사람들한테 못하는 소리가 없네.


 비록 익명성에 기댄 인터넷 공간이긴 하지만, 남의 고통을 즈려밟다 못해 상처에 소금까지 뿌려대는 걸 보니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한국 사람들 요새 다 먹고살기 힘들어서 그런가, 하나같이 못돼 처먹어가지고. 

뭐 하나 트집만 잡히면 이렇게 가서 죽일 듯이 물어뜯는다니까.


 어느새 눈도, 속도 피곤해진 가영은 스마트폰 화면의 전원을 끄고 잠깐 옆에 내려놨다. 그리고는 앉아 있는 벤치에 스르륵 미끄러지듯 엉덩이를 내려 등을 기대고 목을 꺾어 머리를 등받이에 올려놓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자위가 벌갰다. 


“날씨 존나 좋네… 씨발….”


 괜히 소리 내서 욕 한번 해본 가영은 어휴, 하면서 눈을 감아버렸다. 


 지금 시각 평일 오후 4시. 

  무나틱 대폭락 사태 바로 다음 날.


 가영이 쌩얼에 추리닝을 입고 앉아 있는 이곳은 동네 공원의 한 벤치였다. 가영의 집과 병호의 가게 사이에 있는 이 공원은 가영이 가끔씩 웹소설을 쓰다 잘 안 풀릴 때나 밥을 너무 많이 먹은 것 같을 때 산책하려고 털레털레 걸어 나오는 곳이었다. 


 사실은 오늘도 웹소설 새 에피 써서 올려야 하는데, 오늘따라 도저히 키보드가 손에 잡히지 않아 그냥 무작정 나와 앉아있는 것이었다. 아마 무나틱 코인 대폭락 사태 때문에 속이 너무 쓰려서 글막힘 사태가 발생한 것 같았다. 


 ‘이럴 때 직장이 있으면 일이라도 하면서 잊을 텐데.’


 가영은 하필 직장도 없어서 원화 채굴도 못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공원에서 그냥 하늘을 향해 욕이나 존나게 갈기고 있을 뿐이었다.


 ‘혜진이는 어쩌고 있을까?’


 가영에게 무나틱 코인을 소개해 줬던 혜진은 가영이 유일하게 실제로 알고 있는 무나틱 투자자였다. 그렇지만 왠지 무서워서 아직 연락을 못해봤다. 그래도 혜진이야 뭐 소액으로 투자한댔으니까 큰 피해는 없을 것 같았지만, 가영이 이렇게 큰돈을 넣었던 것을 알면 그녀도 영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그때였다. 


- 구구…구… 


 갑자기 들려온 소리에 가영이 고개만 까딱 들어 올렸다. 옆을 보니 어느새 동네 공원의 비둘기들이 하이에나떼처럼 그녀의 곁에 몰려 있었다. 구구 거리면서 맴도는 그 모양새가 가영이 여기 오는 길에 잠깐 편의점에 들러 산 과자 봉지를 노리는 것 같았다.


숫자를 세어 보니 하나, 둘, 서이, 너이… 

여섯 마리였다. 


가영은 피식 웃었다.


 “어째 너네도 딱 6마리냐.” 


무슨 아이돌 그룹도 아니고. 


 가영은 과자봉지를 뜯어 한주먹 손에 쥐고는 대충 부숴서 바닥에 뿌렸다. 비둘기들이 고개를 주억거리면서 다가왔다. 그러더니 경쟁적으로 바닥의 부스러기를 맹렬하게 쪼아댔다. 


가영은 비둘기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얘네가 낮엔 이러고 살다가 밤엔 사람으로 변신하면 어떨까.’


『백조의 호수』 이런 것도 사실 변신 판타지물 아닌가? 

『낮에는 비둘기인데 사실은 아이돌입니다.』 이런 거 재밌지 않을까. 


 흠…. 다음 웹소설 소재로 한번 써먹어 볼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는데, 특히 센터에서 가장 독보적으로 많이 처먹는 놈이 눈에 들어왔다. 


만약에 내가 진짜 얘네로 소설 쓰게 되면 센터는 저 새끼다. 

살 디룩디룩 찐 거 봐. 누가 봐도 서열 1위임. 


이름은… 서울이. 서울이로 하자. 

나머지 애들 이름은 대충… 시에나, 보스톤, 베를린…이런 걸로 하고. 

유학파에 둘기즈라니, 딱이잖아?


 가영은 그런 되도 않는 생각을 하며 실실 웃었다. 그녀가 그렇게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을 때였다. 문득 가영이 앉아 있는 벤치 의자가 드득-하고 울렸다. 옆에 놓여 있던 가영의 휴대폰에 새로운 톡 메시지가 도착한 것이었다. 


「박가영, 너 무나틱 샀다고 하지 않았어? 살아 있냐?」


 인경이었다. 3인 톡방이었다. 가영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일단은.」


 그러고 보니 간밤에는 정신이 없어서 그녀들에게 연락할 정신도 없었다. 이내 은수도 톡방에 접속했는지 메시지에 남아 있던 1이 사라졌다. 가영은 두 사람에게 메신저로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설명을 마쳤을 땐, 톡방에는 잠시 정적이 돌았다. 얼마나 그렇게 가만히 있었을까? 은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운을 뗐다.


「2만 7천 원? 2700만 원이 2만 7천 원이 됐다고?」

「그래. 더 놀라운 게 뭔지 알아?」

「뭔데?」

「그 사이 더 떨어졌어. 이제 2천 7백 원이야.」

「와 씨…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러니까. 아버지는 뭐래?」


그 말에 가영은 전날에 봤던 병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병호가 집에 들이닥쳤던 것은 오후 4시가 좀 넘은 시간이었다.


퇴근 시간도 아닌데 새하얗게 질려서 현관문을 열고 들이닥쳤던 병호는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가영은 어제 봤던 병호의 모습을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절망한 표정을. 떨리던 손을.


 병호는 그 상태로 가만히 가영을 쳐다보고만 서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며칠 전 가영이 코인을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버럭버럭 소리도 지르고 화도 냈었던 병호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 판이었다.


 병호는 그저 말없이 가영의 얼굴만 한없이 들여다 볼 뿐이었다. 그 모습이 마치 가영을 책망한다기보다는, 그냥 뭔가를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가영을 보던 병호는 이내 다시 등을 돌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이 말만 남기고 말이다. 


‘됐다. 일단 아무 생각 말고 있어. 나중에 얘기하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가영은 등을 돌려 제 방에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이후 가영은 그렇게 제 방안에만 틀어박혀 잠들 때까지 한 번도 거실에 나가지 않았다. 병호가 일을 마치고 다시 집에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오늘 아침 병호는 평소처럼 가영을 깨웠다. 가영도 평소처럼 방문을 열었다. 다만 병호와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병호는 이상할 정도로 무나틱 코인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전날처럼 그냥 가영의 얼굴만 한번 쓱 보고 다시 일하러 나갔을 뿐이다. 


 가영은 착잡한 표정으로 메시지를 입력했다. 


「어….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나을 것 같아.」

「뭐?」

「… 알 만 하다.」

「그러게, 가게 돈은 왜 거기다 넣었어?」


 충격 받은 은수와 인경이 톡방에 다다다다 메시지를 쏟아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사태의 장본인인 가영은 이 상황이 그렇게까지 충격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어제 병호의 태도 때문이 아닐까?

이번에는 정말 머리채라도 틀어 잡힐 줄 알았는데.

병호의 그 놀라울 정도로 침착한 태도는 대체 뭐란 말인가.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했다. 


「모르겠다. 난 뭐 이렇게 될 줄 알았나?」


 가영의 답에 은수도, 인경도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한동안 톡방에 정적이 흘렀다. 가영은 한숨을 쉬고는 새 메시지를 입력했다. 


「너네 예전에 내가 왜 주식하고 코인하는지 얘기했던 거 기억 나?」

「어, 뭐였더라….」

「인생의 반전.」


가영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입력했다. 


「내 인생에서 이제 반전을 노릴 수 있는 기회는 이거밖에 없다고 했었잖아.」

「진짜, 반전은 반전이네….」


인경의 답에 순간 톡방에 숙연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하긴, 결말이 어떻게 될지 알면 반전은 아니지.」

「나도 이럴 줄 알았으면 안 했겠지만, 뭐 어쩌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 거.」

「그럼 이제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래. 당장 가게 직원들 월급하고 거래처 결제대금 다 줘야 된다며. 돈 나올 데는 있어?」

「너 퇴사하기 전에 마이너스 통장은 안 만들었어?」

「응….」

「적금 같은 건? 뭐 들고 있는 거 없어?」

「없어….」

「아니 넌 사회생활을 10년 넘게 한 애가 왜 적금이 없어?」

「헐…. 그럼 뭐 카드론 밖에 없는 건가?」

「그냥 주식 물려 있는 거 다 팔아서 예수금으로 빼. 그 정도는 되잖아.」

「-40%라서 빼기가 좀 그래. 지금 빼면 다 날리는 거잖아.」

「그럼 어쩌려고 그래?」


가영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민하다 메시지를 입력했다. 


「사실은, 목돈 나올 구석이 한 군데 있긴 한데….」

「그게 뭔데?」

「강준성 엄마표 연금보험.」


 마침 엊그제 가영의 계좌에서 빠져나간 바로 그 연금보험. 

 매달 21일에 가영의 계좌에서 빠져나가는 그 보험. 


 그것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가영이 구 남친 강준성 어머니의 월말 보험 실적을 채워주기 위해 들었던 월 30만 원짜리 연금보험이었다. 


「어제 마침 생각나서 조회해 봤는데 이거 깨면 그래도 해지 환급금 빼고라도 한 1,500만 원은 나오더라고. 여기에 내 CMA 계좌에 있는 돈 합치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

「보험 있으면 그냥 대출받아도 되지 않아?」

「됐어. 애초에 별로 유지할 만한 보험도 아니었어. 사실 강준성 엄마가 계속 내 담당 FC로 이름 올라 있는 것도 좀 찝찝하고. 헤어진 지가 언젠데….」

「그러게.」

「나 이번 설에 고객 대상 단체 문자도 받았다니까? 얼마나 소름 끼치는데.」

「헉, 설마 너 그 집 식구들 아직 차단 안 했어?」


 은수의 말에 가영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헤어지자마자 강준성은 바로 차단했는데, 강준성의 식구들인 어머니와 누나들까지 하나하나 찾아내서 차단한 기억은 없었다.


「어… 안 한 듯?」

「지금이라도 해. 어차피 보험도 깰 거면서. 걍 이번 기회에 다 정리해버려.」


 가영은 은수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바로 톡 어플의 친구 목록 화면으로 넘어갔다. 톡 먼저 차단하고 전화 수신차단을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강준성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저장된 준성 어머니의 이름은 가나다 순으로 정리된 친구 목록의 꽤 위쪽에 떠 있었다. 단지 가영이 톡 어플을 쓸 때 친구 리스트는 거의 안 보고 메시지 메뉴만 사용하기 때문에 거의 볼 일이 없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강준성 어머니의 프사가 뭔가, 이상했다. 


 일단 얼핏 작은 크기로 보기만 해도 동그라미 안이 정확히 검은색과, 하얀색으로 반반 나뉜 그 사진 자체도 좀 쎄했지만. 정말로 쎄했던 것은 그 옆에 기재되어 있던 상태 메시지였다. 


「D-28♥」


 그것을 보는 순간 온몸의 피가 싸악 식는 느낌이었다. 왠지 모를 불길한 기운이 발끝부터 스멀스멀 기어올라와 가영의 몸을 휘감았다. 


 사실, 지금 이 상태에서도 웬만한 건 알 수 있었다. 동그란 프사 안에 있는 것이 두 사람이라는 것도. 그리고 각각 검은 옷과 흰 옷을 입고 있다는 것도. 그들의 성별이 남자와 여자라는 것도. 


 그렇지만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이므로…. 자신에게 다가올 역경을 알면서도 꼭 그것을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먹어 봐야만 아는 존재인 것이다. 


 가영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천천히 강준성 어머니의 프로필을 눌렀다. 


 프로필 화면 가운데 자리한 동그란 프사를 눌러볼 필요도 없었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그녀의 프로필 페이지 배경에 있는 사진은 프로필 사진인 동그란 원 안에 있는 사진과 거의 똑같은 사진이었으니까. 


거기에 강준성이 서 있었다.


 활짝 웃는 표정으로 검은 턱시도를 입은 그의 곁에는 하얀색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은 채로 나란히 서 있었다. 


 사진 속의 강준성과 눈이 마주친 순간, 가영은 못 볼 꼴을 본 듯이 다급하게 ‘뒤로 가기’ 버튼을 눌러 화면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질려 있었다. 가슴이 콩닥거리며 미친 듯이 뛰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느덧 과자 부스러기를 다 해치운 둘기즈가 구구 거리면서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빙글빙글 도는 가운데 가영은 차분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며 숨을 가라앉힌 가영은 완전히 진정한 뒤 다시 스마트폰을 켰다. 그녀는 은수와 인경이 있는 톡방에 다시 접속했다. 그리고는 거침없이 한 마디를 입력했다. 


「얘들아, 오늘 저녁은 종로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벙개 선포에 은수와 인경이 당황했다. 


「뭐? 갑자기?」

「나 오늘은 안돼. 동기 청첩장 모임 있단 말이야.」


가영은 입술을 꽉 깨물고는 한 마디를 입력했다. 


「코드 레드.」


 잠시 톡방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않았다. 은수와 인경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ㅇㅋ」

「알았어. 나 끝나면 7시쯤 되니까 그때 갈게.」










***






 ‘코드 레드’는 가영, 은수, 인경 사이에 내려오는 절대적인 규칙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태풍에 번개가 쏟아지는 날에도. 셋 중 한 명이 ‘코드 레드’를 외치면 그녀들은 무조건 모여야 했다. 이른바 ‘절친 무조건 소환권’이었다. 다만 그 사용 빈도는 인당 1년에 1회로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 소환권은 지난 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유지되어 왔다. 그렇지만 의외로 이걸 쓸만한 상황이 별로 많지는 않았다. 때문에 세 사람에게 별일이 없이 그럭저럭 순탄하게 지나가는 해에는 그냥 대충 써먹기도 했다. 술 먹고 싶을 때나, 여행을 가고 싶을 때 모아서 쓰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점을 고려해 봤을 때, 오늘 가영이 발동한 ‘코드 레드’는 아주 오랜만에 취지에 맞게 쓰인 케이스였다. 


“강준성 그 새끼, 나랑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그렇게 홀라당 결혼해 버릴 수가 있는 거야?”


 가영은 오늘 소맥을 거부하고 오직 소주로만 달리고 있었다. 가성비 좋게 얼른 취해버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평일 저녁에 난데없이 종로의 술집에 소환되어 ‘코드 레드’ 발동에 얽힌 사연을 듣게 된 은수와 인경도 옆에서 함께 분노 중이었다.


“아니, 원래 장기 연애하다가 헤어지면 좀 빨리 가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는데…. 이건 좀 텀이 너무 짧다? 당황스럽네.”

“그러게. 둘이 언제 사귀고 결혼은 언제 다 준비했대? 이건 솔직히 환승 아니면 불가한 거 아니야?”

“너랑 사귈 때는 7년이나 끌더니 그 여자랑은 뭐가 그렇게 급했던 거야?”

“설마 속도위반 아니야?”

“아 씨발 몰라! 하여튼 그 둘째 누나가 틀림없어!”


가영은 준성의 둘째 누나를 떠올리며 이를 으득 갈았다. 초등학교 교사인 그녀는 평소에도 은근히 가영을 못마땅해 하는 티를 내곤 했었다. 게다가 가영과 준성이 사귀는 동안에도 준성에게 교사 후배를 소개해 주려고 뒤에서 몇 번 수작을 부렸다 걸린 적이 있었다.


“나랑 만나는 동안에도 강준성한테 몰래 소개팅 따로 해주려다 몇 번 걸렸거든. 그때마다 헤어진다 만다 존나 싸웠는데.”

“정말?”

“그럼 그때 그냥 헤어졌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 둘째 누나가 말이야, 가게 음식도 맨날 싸가긴 존나게 싸갔어. 뻔질나게 와서 말이야. 아주 누가 보면 정기권 끊은 줄 알 것 같다니까? 매식하는 줄 알았어 아주 그냥!”


 가영은 거의 이성을 놓은 듯이 씩씩거리고 있었다. 


 어쩜 인생이 이럴까? 코인 다 날려서 개털 된 다음 날, 구남친의 환승 연애가 결혼이라는 결실을 맺게 된 소식을 알게 되다니. 이 무슨 개 같은 날의 오후냐고.


 가영은 한참 분노하다 못해 기운이 빠졌는지 잠시 고개를 숙이고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의 텀이 약간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은수가 한숨을 쉬며 가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그때였다. 


 가영이 갑자기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가영은 눈매를 희번득하게 뜨고는 은수와 인경에게 물었다. 


“얘들아, 말해 봐. 내가 지금 너무 찌질하게 구는 거니? 막 구질구질하고 그래?”


 술 마시고 한참을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인지 가영은 얼굴아 다 벌게진 상태였다. 인경이 피식 웃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야, 누가 이걸 보고 찌질하다고 해?”

“그래. 7년 사귄 구남친이 헤어진 지 6개월 만에 결혼한다는데 그럼 이런 반응 나와야지. 아니면 그게 인간이냐?”

“맞아, 이건 찌질한 게 아니라 인간적인 거지.”


 은수와 인경이 냉철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녀들은 지금 가영의 뜨거워진 뇌를 꺼내서 식히는 중이었다. 마치 외장하드처럼 말이다. 현재 감정의 고양으로 인해 제대로 된 상황 판단이 불가한 가영을 대신하여 상황을 대충 이렇게 저렇게 정리하고, 차갑게 식힌 다음 다시 끼워주는 것이었다. 


“하여튼 강준성이고 무나 뭐시기고 하필 눈치도 없이 시차도 안 두고 지랄들이야.”

“그러게. 살다 보면 좆같은 일이 한꺼번에 닥칠 때도 있더라.”

“후…. 사는 거…. 진짜 존나 힘든 거 같아.”


 가영은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은수와 인경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지금 가영 상황으로는 그런 말을 할 만했다. 그러니 이미 아까부터 계속 한탄 중인 가영이 몇 번 더 구간 반복을 한다 해도 얌전히 들어줄 수 있었다. 


 어쨌거나 오늘의 ‘코드 레드’를 쓴 사람은 박가영이었으니까.


그때였다. 가영이 갑자기 표정을 바꿔 씩 웃으며 말했다.


“근데 어떡하냐? 앞으로 계속 힘들 텐데.”


그 말이 꽤나 의외였다. 말투는 마치 듣는 사람을 얄밉게 약 올리는 듯했다. 문제는 그 약 올리는 대상이 박가영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었지만.  


 가영은 지금 마치 미친 사람처럼 실실 웃고 있었다. 

 은수와 인경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박가영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 같지?’ 


두 사람이 대충 서로 눈으로 그런 텔레파시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가영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야야, 그런 표정 할 거 없어.”


 가영은 손을 휘적휘적 내저었다. 


“내가 오늘 코드 레드 쓴 거는 너네한테 위로받으려고 그런 게 아니니까.”

“그럼?”

“그냥, 이렇게 같이 술이나 마시고 싶어서.”


 어느새 잔이 비워진 것을 확인한 가영은 옆에 있는 소주병을 들어 한 잔을 마저 채웠다. 그런데 하필 그것이 마지막 잔이라 잔이 조금 덜 채워졌다. 가영이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시며 말했다.


“사실 그냥 건네는 '힘내'라는 말만큼 힘 빠지는 말도 없지 않나? 힘내면 뭐 어쩔 건데? 내가 언제는 힘 안내서 이렇게 됐나?”

“…”

“적어도 우리끼리 그런 쓸모없는 말 하지 말자. 촌스럽게.”


 그러면서 가영은 방금 따른 잔을 입에 한 번에 홀랑 털어 넣어 버렸다.  그러고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크으-’소리를 냈다. 가영은 술이 묻어 번들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대강 훔쳐낸 뒤 자신의 개똥철학 같은 고난론에 이렇게 쐐기를 박았다.


“그냥 뭐, ‘인생 아무리 좆같아도 어쩌겠냐. 안 죽었는데. 그럼 그냥 살아야지 어째.’ 그러면서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치우는 거야.”


 은수와 인경은 잠깐 침묵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가영의 말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는 궤변이었다. 그렇지만 뭐, 마냥 일리가 없는 부분은 아니었다. 아니, 생각해 보면 오히려 맞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뭔가 인정하기 싫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은수가 마침내 한 마디 했다. 


“… 하여튼 박가영 진짜 존나 비관적이야.”

“그래서 너네가 날 좋아하잖아.”

“지랄….”


 그렇게 서로 디스를 주고받으면서도 세 사람의 입술은 비슷하게 씰룩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마치 가영의 미친 웃음이 전염된 것처럼.


 늦은 밤, 그렇게 여자 셋이 모여 앉은 종로의 한 술집 테이블로부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점점 크게 번져가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연신 낄낄거리며 웃던 가영이 마침 지나가던 사장님을 향해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사장님, 여기 소주 하나 맥주 하나 더요!” 









***





 

 가영, 은수, 인경이 각자 헤어진 것은 밤 11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서울 서쪽 지역에 사는 은수와 회사 근처인 강남 쪽 오피스텔에서 자취하는 인경은 더 마셔도 됐지만, 경기도에 사는 가영은 가급적 막차가 끊기기 전에 집에 가는 게 안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세 사람이 종로의 아지트에서 각자의 집 방향을 향해 뿔뿔이 흩어진 지 약 1시간이 아직 되지 않았을 때였다. 거의 밤 11시 40분 정도 되었을까? 갑자기 세 사람의 톡방에 메시지가 하나 떴다. 발신자는 인경이었다. 


 메시지를 먼저 확인한 것은 가영이었다. 그녀는 전철 안에서 어느 정도 취한 채로 눈을 감았다, 떴다 하면서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영은 비몽사몽한 상태로 인경이 보내온 메시지를 봤다. 

 그것은 한 장의 사진이었다. 문제는 사진 속에 보이는 것이 뭔가 묘하게 익숙해서 비현실적이었다는 것이다. 


 문이 열려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마치 바리케이드처럼 엉성하게 둘러져 있는 것은 노란색 박스 테이프였다. 그 위에 검고 굵은 폰트로 글씨가 새겨진. 근데 이제 그 글씨가…


「출입금지 POLICE LINE」


 이게 무한 나열되어 있는 형태의 테이프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폴리스 라인?’


  뜬금없이? 


예상 밖의 아이템에 직전까지 비몽사몽했던 가영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초점을 맞추고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이건 마치 어디 무슨 범죄 드라마나 TV 시사 프로그램에서나 볼 듯한 아이템 아닌가. 


 처음에 가영은 인경이 뭐 드라마 같은 거라도 보다가 캡처해서 보낸 줄 알았다. 그때 마침 은수도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도 가영과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이게 뭐야?」


 그러자 인경이 말없이 다음 메시지를 보내왔다. 링크로 전달된 뉴스 기사의 표제와 썸네일이 보였다. 


『강남구 오피스텔에서 결별 요구 여친 살해한 30대 남성 검거』


 ‘이게 뭐지?’


 가영이 생각할 틈도 없이 곧바로 인경의 메시지가 날아왔다.  


「야, 씨발 이게 진짜 무슨 일이냐? 우리 집 건물에서 살인사건 났다.」


 뭐??


 가영은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스마트폰을 놓칠 뻔했다. 그 사이에도 인경은 단톡방에 차분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리 오피스텔 18층 사는 놈이 헤어지자는 여자 친구 칼로 찔렀대. 도망칠 때 엘베 탔다는데, 이게 그 새끼가 탄 건가 봐.」


 가영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건 자체가 끔찍해서 놀랍기도 했지만, 그것이 하필 인경이 사는 오피스텔이라는 것 때문에 더 무섭게 느껴졌다. 가영은 다급하게 메시지를 적어 넣었다. 


「너는? 집에 들어갔어? 괜찮아?」

「응. 엘베야 뭐 여러 대니까. 그리고 범인도 다행히 바로 잡았나 봐. 난 괜찮아.」


 인경은 의연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왠지 괜찮지가 않을 것 같았다. 가영은 인경이 보내온 뉴스 기사를 클릭하여 내용을 읽어봤다. 피해자가 살해당한 시각은 오늘 저녁 7시 20분경. 가영이 막 종로의 단골 술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은수와 인경을 맞이했던 그 시간이었다.


 그들이 신나게 먹고 떠들고 한탄하는 와중에, 누군가는 칼에 찔려 죽어간 것이다. 한때 남자친구였던 사람이 휘두른 칼에 찔려서. 그것도 가장 안전해야 할 자신의 집에서.


 가영은 지금 혼자 있을 인경이 무척 걱정됐다. 

 상황을 바꿔서 지금 가영이 인경의 상황이라면 절대 괜찮을 리가 없을 것 같았다. 무서워서 잠도 못 잘 것 같았다.  


 그때였다. 가영이 손에 쥐고 있던 스마트폰이 드드득-진동 소리를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화면 전체가 까매지며 전화 수신 화면으로 바뀌었다. 가영은 발신자를 확인했다.  


「유은수」


가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가영아.]


전화를 받자마자 가영을 부르는 은수의 목소리가 어쩐지 비장했다. 어쩐지 덩달아 긴장이 된 가영이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응.”

[코드 레드다.]












***






 가영, 은수, 인경이 함께 해왔던 그 긴 역사 중에서, 하룻밤에 두 번의 ‘코드 레드’가 발동된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까 이건 정말로, 그만큼 엄청난 일이었던 것이다. 


 은수의 ‘코드 레드’가 발동된 직후, 가영은 집으로 가던 지하철에서 내려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바로 강남으로 향했다. 그것은 은수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인경의 오피스텔 앞에서 접선한 것은 12시 반이 약간 넘은 시각이었다. 두 사람은 서둘러 인경이 사는 20층으로 올라가 그녀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문은 머지않아 열렸다. 역시 예상대로 인경은 자고 있지 않았다. 어찌어찌 씻고 옷 갈아입고 잘 준비는 마친 상태 같았지만. 


 당연하게도, 인경은 문 앞에 서 있는 가영과 은수를 보고 무척 놀랐다.


“뭐야, 여긴 왜 왔어?”


 가영과 은수는 대답 대신 인경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가영과 은수는 한 덩어리처럼 얽혀 인경을 끌어안았다. 10년 넘게 알고 지내긴 했지만, 평소에 이런 스킨십은 별로 하지 않고 지냈던 사이여서였을까? 인경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야 씨, 니네 왜 이래?”

“너 혼자 있으면 무서울까 봐 왔지.”

“괜찮거든?”

“괜찮은데 아직 안 자고 있어?”

“너네가 벨 누르기 직전에 거의 수면상태였거든?”


 그 말에 가영이 고개를 빼꼼히 들어서 인경의 오피스텔 안쪽을 훑어봤다. 부엌 장 근처의 수납형 테이블은 밖으로 끄집어내져 있었고, 그 위에 방금 막 딴 듯한 맥주 한 캔이 놓여 있었다. 


“퍽도.”


 가영은 피식 웃으며 인경의 어깨를 툭 쳤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은수도 뒤늦게 테이블 위의 맥주를 발견하고는 씩 웃었다.


“뭐야, 집에 맥주 좀 있냐?”


 인경은 아직 어안이 벙벙한 듯 했다.

  헤어진 지 몇 시간 안 된 친구들이 이 늦은 시각에 갑자기 찾아와서는 맥주 타령을 하면서 집에 쳐들어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인경이 멍하니 서있는 사이 가영과 은수는 완전히 인경의 집안에 들어가 테이블 근처에 각자 의자를 끌고 와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보니 인경으로서도 이 갑작스런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인경은 현관문 손잡이를 끌어당겨 탁 닫았다. 그리고는 뒤를 돌며 씩 웃었다. 


“존나 많지.”

“야, 좋다.”

“일단 다 꺼내와 봐.”

그렇게 인경의 집에서 난데없는 2차가 시작되었다.











***









“그래도 범인을 바로 잡아서 다행이지, 못 잡았으면 어쩔 뻔했어?”

“그러게. 나는 잠 못 잤다. 짐 싸서 호텔 갔을 거 같아.”

“뭐…. 범인이 다시 범행 장소로 돌아오진 않을 테니까.”


 세 사람은 지금 오늘 이 오피스텔에서 있었던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영도, 은수도 두렵다고 난리였지만 정작 이 집에 살고 있는 인경만이 누구보다도 냉정하고 차분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가영은 그런 인경이 신기했다. 


“너 진짜 대단하다.”

“어쩌겠어? 살인사건 났다고 당장 짐 빼서 나가겠냐. 서울 살다 보면 별 일도 다 일어나고 그러는 거지 뭐.”


 가영은 슬쩍 시선을 내려 인경이 쥐고 있는 맥주캔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우리가 와줘서 좀 고마워하는 것 같긴 한데.’


 평소 시크한 캐릭터인 인경의 특성상 속마음을 추측하기가 조금 힘들긴 했다. 

화제는 어느덧 다시 오피스텔 사건의 살인범에게로 돌아갔다. 


“그래도 그 새끼 진짜 쓰레기다. 헤어지자면 곱게 헤어질 것이지, 칼로 찌르긴 왜 찔러? 미친놈이.”

“그러니까. 여자애 나이도 어린데…. 너무 안타까워.”


 잠시 방안에 우울한 침묵이 휩쓸고 지나갔다.


 이상했다. 이 오피스텔은 세대수도 엄청 많았고, 대부분이 1인 가구였다. 그러니까 인경이 이 오피스텔에 살면서 피해자인 그 여자를 봤을 확률도 제로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안타까운 죽음이 어쩐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바로 몇 시간 전 초저녁까지만 해도 멀쩡히 숨을 쉬며 살아 있었던 피해자는 지금 허무하게 죽어 있다. 그와 함께 그녀의 앞에 창창하게 펼쳐져 있던 삶의 가능성도 끝나 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한때 좋아해서 사귀었을 남자한테 말이다.

 그 현실이 너무나 답답하고, 또 안타까웠다.   


“이런 걸 보면… 정말 요새 남자를 어떻게 만나나 싶기도 해.”

“그러니까.”

“헤어지자고 하면 한순간에 돌변해서 칼로 찌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사실 지금 이 방에 있는 세 명은 다 남자친구가 없긴 했지만, 비혼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기회가 되면 다들 남자친구도 만나고 결혼도 하고 그러면 좋을 것 같다고 느슨하게 생각하는 정도였달까. 

 그렇지만 이런 상황을 보고 나니 또 섣불리 누구를 만나기가 무서워지는 것이다.


 특히 가영은 오늘 준성의 결혼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은 상태라 그런지 더 그런 막막한 기분이 되었다. 가영은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키며 말했다. 


“진짜 오래 사귀어도 사람은 결국 모르는구나 싶어. 뭐, 남자만 그런 건 아니지만….”

“맞아. 그건 그래.”

“그래도 세상엔 좋은 사람도 많으니까. 안 좋은 사람은 최대한 피해야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까?”

“나는 이제 영 자신이 없다. 솔직히 썸 타는 법도 다 까먹은 마당에, 어느 세월에 남자를 만나고 어느 세월에 좋은 사람인지 안 좋은 사람인지 따져보고 판단해?”

“막막하긴 하지….”

“갈수록 더 어려워지는 것 같아. 거기에 이제 ‘안전 이별’이라는 기준까지 추가됐잖아.”


그때, 가영이 불쑥 말했다. 


“너네, 수면 매매라고 아냐?”

“수면 매매가 뭐야?”

“너넨 주식 안 하냐?”

“하겠냐?”

“네가 그렇게 된 걸 봤는데, 절대 안 하지.”

“…똑똑한 것들….”


은수와 인경의 영민함에 씁쓸함을 느낀 가영은 혀를 끌끌 찼다. 


“수면 매매가 뭐냐면. 주식을 산 다음에 그냥 기절을 하는 거야. 내가 그걸 샀다는 걸 까먹는 거지.”

“사놓고 잔다고?”

“뭐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치고 죽은 듯이 잔다 이런 거에 더 가까워.”

“… 그건 거의 코마 상태 아냐?”

“굳이 왜 그래야 되는데?”

“왜냐면…. 주식을 사놓은 다음에 한 10년쯤 자고 일어나 보면 웬만하면 다 올라있다, 뭐 그런 얘기가 있단 말이야. 사놓고 뭐 이상한 뻘짓 하지 말고 그냥 잠을 처자는 게 포인트야.”


은수와 인경은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애초에 주식 투자를 안 하는 친구들에게 이런 걸 이해시키려고 했던 자신이 어리석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가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아, 하여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수면 매매 있잖아. 인생도 딱 그렇게 됐음 좋겠어.”

“뭐가?”

“지금부터 한 몇 년 정도 수면상태에 있다가 일어나면 인생의 모든 골치 아픈 문제가 다 사라져 있었으면 좋겠어. 어느 날 갑자기 눈을 딱 떴는데, 내 옆에는 남편이랑 다 큰 자식이 누워있는 거야. 꼭 ‘다 큰’ 자식이어야 돼.”


 그 말에 은수와 인경은 ‘이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나 가영은 술기운에 알딸딸한 기분으로 계속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기왕이면 웹소설도 대박작으로 한 5질쯤 완결 난 상태였으면….”


이건 그냥 희망사항 릴레이 아닌가? 

의문점을 느낀 은수가 물었다. 


“뭘 그렇게 말을 어렵게 해?”

“그래, 그냥 날로 먹겠다는 거네.”

“그런가?”


가영은 피식 웃었다. 


“아, 모르겠다. 골치 아픈 문제가 다 해결된 미래의 나에게로 전생하고 싶어.”

“님 아무래도 웹소설에 너무 과몰입한 것이 아닌지….”

“그럴지도 모르지.”


 가영은 그제서야 오늘 술을 처마시느라 웹소설 올리는 걸 깜빡했다는 걸 깨달았다. 가영은 이를 으득 갈았다. 


‘이게 다 강준성 그 새끼 때문이다.’


  그러나 뭐 이미 어쩔 수 없었다. 술기운에 저절로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진 가영은 ‘가끔 펑크도 내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하고 편안히 생각하기로 했다. 


 가영은 '수면 매매'라는 단어를 통해 자신이 진짜로 하고 싶었던 말을 꺼냈다. 


“뭐, 언젠가는 우리가 좋은 남자를 만날 수도 있을 거고, 결혼을 할 수도 있고…. 그런 것도 중요하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안전하고 건강하게 잘 살아 있는 거.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


가영은 은수와 인경을 한 번씩 쳐다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우리 오래오래 살아 있자.”

“얼마나 오래?”

“난 70 전에는 죽을 건데….”


은수와 인경이 심각하게 되물었다. 나름대로 말이 주절주절 길어지는 가영의 술주정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합동 작전을 벌이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만취 모드 ON인 가영은 그런 친구들의 방해공작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끼리 이렇게 서로 지켜주면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자고. 서로 인생 좆될 거 같을 때 막아주기도 하고 그러면서.”


그러면서 가영은 곧바로 ‘인생 좆될 것 같은 경우’의 예시를 하나 들었다.


“예를 들어서 말이지. 내가 만약에 외로움이 눈이 돌아서 진짜 결혼하면 안 될 놈 붙잡고 결혼한다고 생떼 쓰면…. 그냥 늬들 둘이 나 어딘가에 한 2달간 가둬 놔도 되니까.”

“오키, 접수.”

“너 그 말, 무르기 없기다?”


내내 조용하던 은수와 인경이 바로 대답했다. 마치 건수 하나 잡았다는 듯이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덥석 미끼를 물어오는 그 표정이 둘 다 초롱초롱했다. 


‘이런 하이에나 같은 것들. 저것들 눈 반짝거리는 거 봐라.’


가영은 아차 싶었지만 이내 말 꺼낸 게 자긴데 뭐 어쩌겠나 싶어 그냥 씩 웃어 버렸다.


“그럼. 인생 좆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좀 외로운 게 낫잖아?”

 이미 우리 나이 서른여섯. 

 누군가 곁에 없다는 사실이 가끔 외롭긴 하지만, 그래도 어떤 경우에도 우선시해야 하는 것은 결국 안전과 생존이라는 생각이 든다.


슬프지만, 살아 있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 가영도, 가영의 친구들도, 그리고 가영과 매일같이 스치며 지나갈 수많은 여자들도.

그  모두가 오래오래 안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가영은 맥주캔을 치켜올렸다. 그리고는 마치 건배사를 외치는 부장님처럼 강건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꼭! 이 험난한 세상에서! 안전하게 살아남은 할머니들이 되자.”

“그래.”

“종이 남친이든 브라운관 남친이든 뭐든 각자 덕질하면서 즐겁게 늙는 거야.” 

“맞아. 덕질하면 안 늙더라.”


 새벽 1시를 훌쩍 넘긴 강남구의 한 오피스텔.


 그렇게 시답잖은 이야기와 간헐적인 킬킬거림이 새벽 늦게까지 이어졌다.

 지나가다 똥밟은 듯 보게 된 가영의 구남친의 웨딩 화보도, 1층 엘리베이터에 처진 무시무시한 폴리스라인도 전부 상관없었다.  


친구들과 지금 당장 짠 부딪치고 한 모금 들이킬 수 있는 이 맥주 한 캔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오늘 이 순간이 그러하다면, 결국 내일도 그렇고, 모레도 그럴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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