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빤 나 없으면 어쩔 뻔 봤냐?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다음 날 아침.
졸지에 평일 밤에 때아닌 외박을 하긴 했지만, 가영, 은수, 인경 세 사람 중 두 사람에게는 아침에 일찍 눈 뜨면 가야만 할 직장이 있었다. 그 덕분에 가영은 오랜만에 박병호의 노크 소리가 아닌 알람 소리를 들으며 일어났다. 허겁지겁 출근 준비를 하는 친구들을 따라 벌떡 일어난 가영은 부스스한 얼굴로 전날 입었던 옷을 다시 챙겨 입었다.
오전 7시 반, 가영은 오랜만에 출근하는 직장인의 리듬에 맞춰 바깥세상에 나왔다. 친구들과 함께 지하철 역에 입성한 그녀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지하철 역사 내 편의점에 들렀다. 편의점에서 다시 나온 그녀의 손에는 2+1 프로모션 중인 숙취해소 음료 세 개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은수와 인경에게 하나씩 건넸다.
“직장인들아, 화이팅이다.”
“그래, 너도 조심해서 들어가고.”
“이따 연락해!”
그렇게 사이좋게 숙취 음료를 한 병씩 나눠 가진 세 사람은 각자의 목적지로 흩어졌다. 가영은 숙취해소 음료를 까서 쭉 들이키고는 지하철을 탔다. 그녀는 이제 이 출근하는 직장인의 무리를 거슬러 올라가 경기도의 집으로 가야 했다.
어젯밤에 무작정 강남까지 와서 외박을 지른 건 좋았는데, 어느 세월에 다시 집에 갈지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그래도 어쩌겠나, 가야지.
지금 가영의 처지에 갈 데라고는 박병호 씨의 스위트 홈 밖에 없는데.
가영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간밤에 박병호로부터는 어떠한 부재중 통화도, 메시지도 없었다. 서른 중반이나 되긴 했지만 딸래미가 무려 말없이 외박을 감행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지금 시간은 평소 같으면 병호가 가영의 방문을 두드려 기상을 확인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다.
사실 어제 가영도 병호에게 연락할지 말지 막판까지 고민하긴 했다. 인경의 집 앞에서 은수를 기다리는 동안 수도 없이 폰을 만지작거렸으니까. 그렇지만 결국 그녀는 병호에게 전화하지 않았다.
무나틱 대폭락 사태 이후라서인지 괜히 병호에게 전화를 걸어서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조금 껄끄럽게 느껴졌다. 그렇지만 설마 병호 쪽에서도 이렇게 무심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이제는 살짝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병호는 어제 가영이 외박한 걸 알기는 하는 걸까?
이상하게도 가영은 그게 뭔가 조금 찜찜했다. 서운한 건지, 찜찜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뭔가 마음이 좋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내가 나이가 많고 다 큰 성인이어도 이건 좀 너무 무심한 거 아닌가?’
가영이 그런 찝찝한 기분을 안고 집에 도착했을 땐 어느덧 오전 9시가 조금 넘었을 때였다. 평소 같으면 병호가 사우나를 끝내고 돌아올 시간이었다.
그래서 가영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병호의 뒷모습을 딱 마주쳤어도 그렇게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병호는 거실에서 소파에 앉아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조심스레 신발을 벗고 거실로 올라설 때까지만 해도 가영은 그다지 이 상황을 특별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똑같은 아침 풍경이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녀가 이상함을 감지한 것은 그 다음이었다. 지금 병호는 방금 전 가영이 집에 들어오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 텐데도 뒷모습만 보인 채 아무런 미동도 않고 있었다.
그는 그저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채 허리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양 무릎 위에 팔꿈치를 지지했고 제 손으로는 얼굴을 살짝 가리고 있었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병호의 주변에 감도는 공기가 너무도 어둡고 무거웠다. 마치 지옥에서 온 보스 같았다.
‘뭐지, 어디 몸이 안 좋은가? 웬만하면 건드리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마음 먹은 가영이 슥 시침을 떼면서 살금살금 병호의 옆을 지나 제 방으로 향하려던 때였다.
“… 이젠 말도 없이 가출에 외박까지 하냐?”
꺼칠한 손에 가려진 병호의 얼굴에서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영은 움찔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병호는 고개도 들어올리지 않은 채 가만히 말했다.
“넌 밤새 네 아빠한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지?”
‘저건 대체 무슨 소리야?’
그제서야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가영은 슥 고개를 돌려 병호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물론 같이 사는 식구가 말도 없이 외박하면 화가 날 순 있다. 비록 병호와 가영이 다른 평범한 부녀 사이와 같은 다정한 역사를 자랑하는 사이는 아니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과, 병호의 모습을 보니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지금 이건 단순히 가영의 외박이 문제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영은 고개를 갸웃하고 기울이며 병호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병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였지만, 그 모습이 오늘따라 뭔가 좀 지나치게 익숙하게 느껴졌다. 평소보다 훨씬 더.
가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정수리가 드러난 병호의 머리를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위화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지금 이 집에서 입고 있는 옷이 전날과 똑같은 사람은 가영뿐만이 아니었다. 소파에 앉아 있는 박병호의 옷차림도 어제 등산과 사우나를 마친 병호가 갈아입고 나간 그 옷과 똑같았다. 그것 때문인지 병호의 주변을 감도는 분위기가 무겁고 칙칙했다.
가영은 외박을 했다 쳐도.
병호는 왜 여지껏 옷도 안 갈아입었단 말인가?
문득 가영의 머릿속으로 병호가 아직까지 옷을 안 갈아입고 있을 만한 한 가지 가설이 떠올랐다.
“… 뭐야, 설마. 밤샜어?”
“…”
“왜? 나 안 들어와서?”
가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작 딸한테는 전화도 메시지도 문자도 하나도 안 보내 놓고서. 집에 안 들어오는 딸을 기다린다고 앉은 자리에서 밤을 꼴딱 새우는 그런 게 가능한 건가?
그때였다.
“… 하아….”
병호가 잔뜩 지친 듯한 목소리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 소리에 가영은 뭔가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영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뭔가 있다.’
지금 저 한숨은 그저 가영이 간밤에 집에 안 들어와서 화내는 그런 단순한 감정으로 내뱉는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병호가 아까부터 계속해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게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가영은 제 방으로 향하던 걸음의 방향을 돌려 병호가 앉은 소파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가영이 바로 앞에 서서 드리우는 그림자가 병호를 가려 어두워졌지만, 그는 여전히 손에서 얼굴을 떼지 않고 있었다.
가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야, 뭔데 그래?”
“….”
가영의 물음에도 병호는 한참 동안 답이 없었다. 답답함을 참지 못한 가영이 병호의 앞에 확 쪼그려 앉아 병호의 숙인 얼굴을 가까이서 들여다 보았다. 그제야 가영의 눈에 병호의 손에 미처 가려지지 않은 뭔가가 보였다. 광대뼈 부근에 붉게 멍이 올라온 자국이었다.
“헉, 이거 뭐야?”
가영이 깜짝 놀라 물었다. 병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가영은 병호의 손목을 잡아서 옆으로 뺐다. 얼마간 힘을 주어 버티던 병호가 결국 포기하듯 팔에 힘을 뺐다. 그의얼굴을 가린 손이 옆으로 비껴 치워 지자, 병호의 왼쪽 광대뼈 위쪽에 선명하게 남은 멍 자국이 보였다. 가영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뭐야, 이거 뭔데?”
깜짝 놀란 가영이 소리치자, 병호가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가영은 물러서지 않고 병호를 닦달하기 시작했다.
“말하라고!!”
병호는 입술을 고집스레 꾹 다물고는 말없이 가영을 바라보았다. 차마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 듯 속으로 한참 할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런 병호의 모습에 가영은 점점 불안해졌다. 발 끝에서부터 서서히 피가 식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말없이 가영을 바라보던 병호가 결국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사기였어.”
“뭐?”
병호가 분명히 뭔가 입을 열어서 말은 했는데.
대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언뜻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영에게 병호가 힘겹게 말했다.
“정식이 그 새끼. 우리 돈으로 바카라 했다가 다 날렸대.”
“뭐???”
“밀키트 사업이고 뭐고, 처음부터 다 거짓말이었던 거야.”
그제야 가영의 눈에 병호의 턱에 꺼칠하게 돋아난 삐쭉한 수염이 보였다. 눈밑도 퀭한 게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것 같았다.
“은퇴한 다음에 사업 준비한다는 것도 다 뻥이었어. 사업은 무슨! 그 새끼가 뭘 했는 줄 알아?”
가영은 경악하여 입만 떡 벌린 채 말문을 잃어버렸다. 그래도 병호는 얘기를 계속했다. 당장 처음에 입을 열기는 어려웠을지만 막상 말을 꺼내기 시작하니 술술 이야기가 나오는 것 같았다.
“바카라 총판. 그거 하다가 욕심부려서 직접 베팅하다가 빚졌고.”
가영은 애초에 바카라가 뭔지도, 총판이 뭔지도 잘 몰랐다. 당연히 그게 다 무슨 말인지 이해도 안 됐다. 그렇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병호에게 굳이 그게 뭐냐고 물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지금 그게 뭔지 알아봤자 달라질 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다만 지금 병호가 말하는 맥락으로 봤을 때 그녀가 바카라인지 뭔지에 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였다.
바로 그게 도박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36세에 나이에 도박판에 뛰어들었다가 전재산을 날렸던 박병호가.
인생 후반전, 하필이면 제 딸이 36세가 되는 해에.
또다시 도박이란 놈한테 돈을 갈취당한 것이다.
이번엔 간접적인 방식이긴 했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돈 빌릴 생각으로 우리한테 작정하고 사기 친 거야…. 솔직히 말하면 안 빌려줄 게 뻔하니까.”
“아니…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고향 후배라며?”
충격받은 가영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중얼거리자, 병호가 냉소적으로 대꾸했다.
“그런 건 상관없어. 넌 물에 빠진 놈이 사람 가리는 거 봤어?”
“…”
“그 새끼 말로는 자기가 하도 급해서 어쩔 수 없었대. 당장 급한 것만 며칠 만에 빨리 수습하고 불려서 다시 돌려주면서 사정 얘기하면 우리가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대. 그런데 3일 만에 싹 다 날렸다더라. 한 푼도 남김없이.”
“그럼 사기당한 건 어떻게 알았어?”
가영이 물었다. 병호는 불과 3일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가영에게 돈도 송금하라고 한 걸거고. 병호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돈 입금한 그 다음 날 헤어지고 나서부터 계속 연락이 안 됐어. 그래서 조금 쎄했거든. 그래도 하루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틀째 연락 안 되니까 수상하고. 그래서 어제 근수가 걱정된다고 한번 같이 가보자 해서 둘이 같이 KTX 타고 고향에 내려갔는데….”
다행히 정식은 아들 집에 있었다. 근수와 병호가 고향 친구들 몇몇에게 전화를 돌려 그 집을 알아냈고, 벨을 누르고 찾아 들어간 그 집의 작은 방에 정식이 있었다고 한다.
병호는 살면서 그렇게 여러 대의 컴퓨터가 한 방안에 다닥다닥 설치되어 있는 것은 처음 봤다고 했다.
“컴퓨터가 한 5대? 6대는 설치되어 있는 것 같더라. 모니터엔 싹 다 무슨 카지노에서 카드 게임하는 화면 같은 게 계속 돌아가고 있는데…. 하늘이 노래지면서, '아이고야, 이거 진짜 큰일 났다.' 싶더라고.”
“그래서?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긴장한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 가영의 시선은 병호의 시뻘건 왼쪽 광대를 향해 있었다. 사실 저 광대뼈 멍의 출처가 무엇인지는 굳이 병호의 대답을 듣지 않고도 대충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
“냅다 멱살을 잡아버렸지!”
가영은 한숨을 쉬었다.
사나이 박병호라면 그럴 줄 알았다.
오히려 그렇지 않았다면 놀랐을 것이다.
“그래서, 한 대 쳤어?”
“아니, 못 쳤어. 근수하고 그 집 아들내미가 마구 달라붙어서 말려서.”
60이 넘은 나이에 어디서 한참 주먹다짐이라도 하고 들어온 것 같은 몰골을 하고서는, 한 대도 못 쳤다니?
가영이 내심 살짝 실망하려고 할 때였다. 잠시 당시 상황을 떠올린 듯 말이 없던 병호가 이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 밀쳐서 넘어뜨리긴 했지.”
가영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폭력은 나쁜 거긴 한데….
그래도 병호가 저렇게 말하는 걸 들으니까 쪼끔, 쪼끔 뭔가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럼 얼굴에 그 멍은 어떻게 된 거야?”
“그 새끼 넘어트리다가 나도 같이 넘어졌거든. 그러다 그 망할 책상에 얼굴이 부딪혔어.”
“헉, 괜찮아?”
“응. 사실 위에 어금니 하나 임플란트 한 거 흔들리긴 하는데, 나중에 치과 가봐야지.”
심지어 상대방을 멋지게 터치다운한 것도 아니고, 적의 몸을 넘기려고 자신의 몸을 내던진 논개 같은 상황이었던 것인가?
가영은 병호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어이가 없어졌다. 그건 병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조금 전 정식을 밀쳤다고 고백하면서 입꼬리가 씰룩 올라간 이후로 사라지지 않던 병호의 미소는 점점 커지며 얼굴에 완전히 자리 잡았다.
마치 금방이라도 웃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 표정은 어디 가면 이제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 60대 중반의 나이의 남자의 얼굴에 떠오르기에는 너무도 개구졌다. 아까부터 그걸 가만히 마주 보고 있지니, 가영도 어쩐지 조금 웃고 싶어졌다.
웃음은 전염된다고 하니까. 결국 가영의 입술도 좌우로 길게 찢어지고 말았다.
결국 가영의 만면에 숨길 수 없는 웃음기가 떠올랐다. 가영이 실실 웃으며 물었다.
“뭐야, 그 아저씬 안 다쳤어?”
“아주 그냥 난리를 치지.”
병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이고 죽겠다느니, 앰뷸런스 부르라느니, 당장 경찰서에 폭행으로 신고할 거라느니. 몇 년 전에 허리 디스크 수술한 거 터졌을지도 모른다고 아주 그냥 엄살을, 엄살을 얼마나 떠는지, 시끄러워서 뒤지는 줄 알았다.”
“헉, 경찰에 신고한대?”
“거의 신고할 뻔했는데, 신고는 안 했어. 근수가 중간에서 막느라 고생했지.”
가영은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마터면 이 나이에 지방 어디 경찰서에 잡혀 있는 아버지를 찾으러 택시 타고 내려갈 뻔했지 않은가?
“근데 웃긴 게 뭔 줄 아냐? 신고 안 하는 대신, 조건이 있대.”
“… 조건?”
가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체 하룻밤 사이에 이게 다 무슨 난리란 말인가?
“맨바닥에 제대로 엉덩방아 찧어서 허리가 아파 죽겠다고. 당장 병원 가야 하는데 치료비가 없으니까 한 300만 원만 달라더라.”
“헐, 진짜? 그래서 그걸 줬어?”
“아직. 이제 줘야지.”
“그걸 왜 줘? 그 사람 순 날강도 아냐?”
“원래는 500 달랬는데 그나마 깎은 거야.”
“뭐??”
“지금 300만 원 안 주면 앞으로 갚아야 할 3천만 원을 반만 갚겠다잖아.”
“그 아저씨 하는 거 보면 300 보내도 또 바카라 할 거 같은데?”
“몰라. 오늘까지 안 보내면 경찰에 신고하겠대. 오늘 진단서 떼러 간다더라.”
듣다 보니 점점 점입가경이다.
가영은 실소했다.
경찰 신고를 두고 협상이라니. 네고-씨-에이션이라니!
어디 3류 누아르 영화에서 마피아들이나 할 법한 짓 아닌가.
돈 문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믿기지 않는 것은 서로 주먹다짐을 한 다음에 아웅다웅 싸우고 있는 이 아저씨들의 나이가 죄다 60줄이라는 사실이었다.
“와…. 근데 어떡하지? 우리 가게 통장에 돈 별로 없는데. 주더라도 한 다음 달에 보내준다고 하면 안 돼?”
“왜? 카드 결제 수입 들어오는 거랑 현금 수입 좀 있잖아.”
“그치. 근데 이제 곧 월말이라 직원들이랑 프리들 월급 줘야 하고, 전기세, 수도세, 가스비 나가고, 식자재 대금도 줘야 하는데.”
“식자재 업체 사장한테는 다음 달 중순쯤으로 대금 결제일 미뤄달라고 부탁할 거라 괜찮아. 공과금도 어떻게든… 월급 줄 돈은 이제 구해봐야지.”
“어떻게 구할 건데?”
“어떻게든 구해야지. 많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 누나한테 전화를 해보든….”
아무리 그래도 볼수록 너무 대책이 없는 거 아닌가 싶었다.
지금 당장 대출을 받겠다고 해도 개인사업자 대출은 직장인에 비해 오히려 그 절차가 까다로웠다. 차라리 가영이 개인 명의로 대출을 받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직장 그만두기 전에 마이너스 통장 뚫어둘 걸….’
가영은 살짝 후회했지만 뭐 지금 이 상황에서는 어쩔 방도가 없었다.
‘어쩔 수 없군.’
가영은 이 쯤에서 비장의 카드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아빠, 가오 떨어지게 누구한테 손 벌리고 신세 지는 건 좀 그렇잖아. 고모가 아시면 엄청 걱정할 텐데.”
가영의 말에 병호가 정곡을 찔린 듯 움찔했다.
그렇다. 사나이 박병호는 살면서 가오 떨어지는 행위를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지금 이 상황이 어쩔 수 없어서 그렇지, 아는 사람이나 가족에게 손 벌리는 건 정말 죽기보다 하기 싫을 거다.
그렇지만 지금 병호가 보기에는 박가영도 대책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 네가 가게 현금으로 그 무난지 뭐시긴지 하는 코인만 안 샀어도 당장 급한 거 막을 1,000만 원은 있었겠지.”
이번에는 가영이 움찔했다. 가영은 지금 이 상황에서 병호에게 ‘사실 그 돈은 지금 단돈 1,000원이 되었고, 아직 스테이킹 해지를 대기 중’이라는 말을 해봤자 겨우 가라앉은 병호의 화를 더욱 돋울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대신 가영은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침착하게 대꾸했다.
“걱정하지 마.”
“….”
“내가 줄게, 한 1,500만 원 정도?”
자신 있게 튀어나온 가영의 말에 병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 네가 무슨 재주로?”
병호의 눈빛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별다른 말은 덧붙이지 않았지만, 어쩐지 그 눈빛만으로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냐?’ 하고 외치는 듯했다.
딸이 목돈을 마련해 오겠다는데도 아버지가 믿음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조금 안타까웠지만, 어쩌겠는가?
이 또한 다 박가영의 업보인 것을.
가영은 자신을 향한 불신을 가득 담은 병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그리고는 자신 있게 말했다.
“있어 봐. 오늘 당장 가게 통장으로 입금해줄 테니까.”
그날 오후, 가영은 보험사에 전화했다.
강준성의 어머니가 우수 FC로 활약 중인 그곳이었다.
***
일주일 뒤.
3월의 가장 마지막 날인 오늘은 <박가네 불고기>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는 날이기도 했다. 가영은 어렵게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그 일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인터넷 뱅킹으로 일반 직원과 프리를 합쳐서 10명 전후의 직원들에게 월급을 쏘고 나자 가게 통장에는 100만 원 전후의 금액이 간당간당하게 남았다.
「잔액 1,214,340원.」
‘그래도 간신히 돈이 남긴 남았네.’
가게 통장의 잔액을 확인한 가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달 <박가네 불고기>의 돈 문제는 무사히 해결되었다.
가영이 강준성의 어머니에게 들었던 연금 보험을 해지하여 만든 1,500만 원과 CMA 통장에 있던 300만 원을 박박 긁어 넣고, 일주일간 통장으로 꽂힌 카드사 결제 수익과 합치니 모든 월말 지출이 겨우 간당간당하게 커버된 것이다.
덕분에 아버지를 경찰에 폭행죄로 신고하겠다는 (구) 고향 후배이자 (현) 협박범에게도 그날 바로 300만 원을 송금할 수도 있었다.
이젠 뭐 별로 남은 게 없다.
내야 할 것도, 통장에 남은 돈도 말이다.
이런 상황이 되니 어쩐지 뭔가 리셋되는 기분이었다.
할 일을 마친 가영은 대충 옷을 챙겨 입은 채로 일어났다.
지금 시간 오후 2시 반.
지금부터 나가서 슬슬 걸어가면 곧 <박가네 불고기>의 브레이크 타임에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기후 변화 때문인지 3월 말의 날씨는 완전히 봄 날씨라기엔 아직 좀 쌀쌀했다.
그래도 바깥 날씨도, 햇볕도 썩 좋았다.
맨발에 대충 쪼리를 신고 길을 나선 가영은 가게를 향해 걷는 동안 천천히 주변을 둘러봤다. 푸릇푸릇한 나무들 사이 앙상한 가지를 보이며 늘어선 벚나무 위에 필 듯 말듯한 봉오리들이 간간히 맺혀 있었다. 저것들도 이제 앞으로 한 일주일 정도면 활짝 피었다가 질 것이다.
브레이크 타임에 딱 맞춰 식당 안으로 들어선 가영이 병호를 찾았다.
“아빠.”
병호는 마침 직원들이 식사하고 있는 테이블에 앉으려는 중이었다. 가영은 그런 병호를 불러냈다.
“아빠, 밥은 나중에 먹어.”
“왜?”
“나랑 갈 데가 좀 있어서.”
병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표정이 ‘얘가 대체 왜 이러나?’ 싶어서 어리둥절해하는 것 같았다.
“어딜 가는데?”
“따라와 보면 알아.”
병호는 뭐라 더 물어보려다가 입을 그냥 다물어 버렸다. 박가영이 저러고 나오면 어차피 어떻게 물어봐도 얘길 안 해줄 게 뻔했기 때문이다. 그냥 따라가고 말지.
병호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부녀는 직원들이 밥을 먹으며 식기를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등지고 차례로 가게를 나섰다.
병호는 가영을 따라 걸었다. 앞서서 가는 가영의 대충 묶은 뽀골뽀골 한 머리카락을 보며 병호는 생각했다.
어릴 때는 둘이 이렇게 자주 걸어 다녔다.
언제나 앞서 걷는 것은 병호 쪽이었고, 가영은 종종걸음으로 병호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젊고 기운이 넘치는 병호는 그 걸음조차 부지런했다. 반면 보폭이 좁은 가영의 걸음은 병호를 따라잡기가 가끔씩은 버거운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보폭이 좁은 가영의 걸음이 훨씬 더 빠르다.
자신도 나이가 든 것이다.
그렇게 병호가 잠시 현실을 자각하며 든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그때, 가영이 가게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한 상가 건물로 쓱 들어갔다. 그렇게 몸을 숨겼던 그녀는 그제서야 병호가 바로 뒤에 따라오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는지 다시 고개만 쓱 내밀어 뒤를 돌아봤다. 저만치 뒤에서 그 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병호를 찾아낸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뭐해? 얼른 와!”
병호는 한숨을 쉬었다. 병호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 가영은 이미 안에서 엘리베이터를 잡아두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녀를 실은 엘리베이터는 4층에 멈췄다. 띵-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보인 것은…
「연세 최고 치과의원 - 교정, 임플란트 전문」
라는 스티커가 양쪽으로 나뉘어 발라진 유리문이었다.
가영은 얼른 내리라는 듯 뒤에서 병호의 등을 손으로 쓱 밀었다. 그리고는 말했다.
“이제 급한 건 다 해결했으니까 아빠도 하나 해결해야지.”
그러면서 가영은 병호의 등을 쿡쿡 찔렀다. 박병호는 일단 내렸지만 뭔가 내키지 않는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너 임플란트 하나에 얼만 줄 아냐?”
“한 100만 원? 괜찮아. 다 계산해 보고 온 거니까.”
“…”
“아빠 그 윗니 계속 흔들려서 밥 먹을 때 불편해하잖아. 그냥 오늘 얼른 해치우자. 예약도 다 해놨어.”
예약까지 해놨다니. 별 수 없었다.
결국 병호는 한숨을 쉬며 치과 안으로 들어갔다.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는 병호의 뒷모습을 보며 가영이 큰 소리로 말했다.
“얼른 하고 나와! 내가 이따가 아이스크림 사줄게.”
***
시술을 마친 병호는 한 손으로 제 뺨을 만지며 천천히 걸어나왔다. 마취 때문에 온 뺨이 다 얼얼한 듯했다. 가영은 병호에게 바로 가게로 돌아가지 말고 근처 공원이나 한 바퀴 돌자고 제안했다. 병호는 뺨을 어루만지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취도 안 풀렸는데 바로 가서 일하기도 좀 그러니까.
부녀는 그들의 가게와 집 사이에 있는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가운데에 커다란 호수가 있는 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말없이 천천히 한 두 바퀴쯤 돌았을 무렵, 병호의 마취가 풀렸다. 가영은 마침 딱 알맞은 타이밍에 산책로에 등장한 공원 매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하나 샀다.
쌍쌍바였다.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조금 걸어가다 비어 있는 벤치에 앉았다. 벤치는 호수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영은 말없이 비닐을 뜯어 제 바지 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었다. 그리고는 신중하게 쌍쌍바를 반으로 갈랐다.
그렇지만, 쌍쌍바가 5:5 비율로 깔끔하게 찢어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영은 ㄱ자와 ㅁ자 형태로 각각 갈라진 쌍쌍바를 보며 잠시 당황했다.
둘 중 뭘 아빠를 줘야 하나?
잠시 고민하던 가영은 아버지에게 전체 면적의 65% 정도를 차지하는 ㄱ자 쌍쌍바를 건넸다.
어린 시절, 병호가 사업에 실패하고 떠돌며 살던 시절. 가끔가다 한 번씩 병호를 만나던 날, 이렇게 그와 밖에 앉아서 쌍쌍바를 먹은 적이 있었다. 병호는 대체로 쌍쌍바를 반으로 잘 갈랐지만, 가끔은 그도 이렇게 실수를 할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병호는 망설임 없이 ㄱ자 쌍쌍바를 가영에게 건네곤 했다. 그렇게 가영에게 큰 조각을 주고 나면, 자신의 막대에 남은 것은 한 입 거리밖에 없었음에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영은 이번에는 그녀가 아버지에게 ㄱ자를 줄 차례라고 느꼈다.
병호는 군말 없이 가영이 건네는 65%쌍바를 받아, 임플란트를 한 반대쪽으로 일부를 씹어 입에 머금었다.
“막 씹지 말고, 천천히 녹여 먹어.”
“응.”
병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각자 우물우물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서로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그저 눈앞에 펼쳐진 공원의 호수만 하염없이 쳐다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해가 한창 쨍쨍한 시간은 아니었지만, 오후의 햇살이 느긋하게 내리쪼이는 호수의 수면 위로 반짝반짝 빛이 비쳤다. 건너편으로는 푸릇푸릇한 나무들이 보였다.
등 뒤에서는 떡고물을 찾아 헤매는 비둘기가 구구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입 한 입 베어 물다 보니 어느덧 쌍쌍바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두 사람의 손에는 쌍쌍바의 본체를 지탱하고 있던 막대기만 남았다.
한 손에 막대기만 쥔 채 멍하니 호수를 쳐다보던 두 사람 중.
길게 이어진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가영이었다.
“아빠.”
가영의 물음에 병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가영은 물었다.
“그때 왜 나한테 뭐라고 안 했어?”
“…”
“나 코인 폭락해서 돈 다 날렸을 때 말이야. 왜 잔소리 안 했어?”
여전히 병호는 답이 없었지만, 가영은 닦달하지 않았다. 그저 멍 때리는 듯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얼마나 그렇게 더 있었을까? 조용히 있던 병호가 아주 낮은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너 죽을까 봐.”
병호가 말을 시작하자, 이번에는 가영이 말이 없었다. 가영은 입술을 꾹 다문 채로 고집스레 앞을 보고 있었다. 병호의 시선도 호수를 향해 있었다.
“TV 보니까 다들 그거 땜에 막 자살한다고 하잖아.”
“…”
“나도 네 나이 때 도박으로 전재산 다 날렸을 때 진짜 콱 죽어버리고 싶었어. 억울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 보기 너무 쪽팔리고 자존심 상해서. 그래서 한강도 가보고, 번개탄도 사 보고.”
“…”
“근데 매번 결정적일 때마다 네 생각이 나더라.”
병호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목소리가 뭔가 울컥한 듯 조금 떨리고 있었다.
“나야 하나밖에 없는 자식새끼 생각하면서 버텼다지만, 넌 자식도 없지, 남편도 없잖아. 나 닮아서 자존심은 무지 세 가지고, 홧김에 잘못된 선택 하면 어쩌나 싶어서….”
병호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가게 돈을 그렇게 날린 건 정말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거기서 그친 게 어디냐, 싶고.”
병호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이 어쩐지 조금 후련해 보였다.
“막말로 내가 고작 1천만 원 때문에 난리 치다가 딸래미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내가 이러고 사는 게 다
무슨 소용이야?”
하, 하고 짧게 숨을 내쉰 병호가 씩 웃었다. 바로 옆에 앉은 가영의 어깨에 손을 올려 다독이며, 그가 말했다.
“사람이 살면서 한 번쯤은 실수할 수도 있잖아. 넌 아직 내가 있으니까 괜찮아.”
“…”
“정말로. 돈은 또 벌면 돼. 일단 살아 있으면 사람 인생은 어떻게든 되는 거야.”
병호가 격려하듯 가영의 어깨를 다독였지만, 가영은 여전히 호수만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한참을 입술을 꾹 다문 상태로 가만히 호수만 바라보던 끝에, 가영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 내가 돈을 벌 수 있을까?”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지금 백수잖아.”
그 말에 병호가 눈썹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 뭐냐, 너 하는 거 있다며?”
“…”
“소설이니 뭐니 쓴다는 거. 그걸로 돈 벌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병호의 말에 가영이 피식 웃었다.
“아빠, 내가 진짜 인터넷에 소설을 쓰긴 쓰거든?”
“…”
“근데 아무도 안 봐. 진짜 한 50명 보나?”
‘50명이면 많이 보는 거 아닌가?’
… 하고 병호는 생각했지만 굳이 그것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아마도 병호는 이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가영이 바카라의 구조를 이해할 수 없듯이 말이다.
“진짜, 때로는 잘 모르겠어. 내가 이 돈이 안 되는 일에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매달리고 있는 건지. 나에게는 글로 성공할 만한 재능이 아예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그렇게 자신의 처참한 현실을 스스로 대놓고 한번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가영은 어쩐지 기분이 좀 가벼워졌다.
생각해 보니 병호가 가영이 쓰는 소설에 관심을 가지고 물어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닌가?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잠깐 시선을 내렸던 가영이 다시 고개를 쳐들며 씩 웃었다.
“그래도! 계속 한번 써보려고.”
“그 소설 본다는 사람들이 너한테 돈을 주는 거야?”
“아직은. 출간을 해야지.”
“할 수 있겠어?”
“응. 일단 완결 내고 도전해 볼래.”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뭐 어떻게든 되겠지 뭐.
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깨에 납덩이처럼 얹혀 있던 뭔가가 스르르 녹아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빠 말대로야. 일단 살아있는 게 제일 중요하니까. 지금 밥 잘 먹고 똥 잘 싸고 잘 살아있으면 됐지. 그렇게 살아있는 동안 계속해서 꾸준히 쓰면 돼.”
잠깐 가라앉아 있던 가영의 눈빛에 반짝이는 빛이 돌아왔다. 가영은 씩 웃으며 병호 쪽을 돌아봤다.
“근데 내가 이렇게 된 건 어쩌면 다 아빠 때문일지도 몰라.”
“갑자기 왜 얘기가 그렇게 돼?”
“나 어릴 때 아빠가 만날 때마다 서점에 데려가서 책 한 권씩 사줬던 거 기억나?”
“그랬지.”
당시 병호가 책을 사줬던 건 가영이 자기와는 달리 책 많이 읽고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지만…. 기왕이면 가영은 병호와 다르게 펜대 굴리는 직업 갖고 살았으면 좋겠는 마음도 컸고.
“옛날 게임 중에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이 있는데. 가상 딸래미를 키우는 게임이야. 근데 그거 하다 보면 알바든 교육이든 뭐든 뭐 하나만 겁나 시키면 그 루트를 잘못 타서 그릇된 결과가 나오거든?”
“…”
“아빠는 나한테 매주 책 한 권씩 사주면서 나를 육성한 셈인데. 그래서 내가 소설가를 꿈꾸게 된 거니까. 결과적으로 내가 이러고 사는 건 다 아빠가 스스로 초래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거지.”
애초에 박병호는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게임이 뭔지 몰랐다. 그래도 박가영이 혼자 중얼거리며 유추해낸 이 결론은 경악스럽기 그지 없었다.
이거, 너무 뻔뻔하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 아닌가?
“그래도 걱정 마. 이번 생의 딸의 삶이 아빠에게는 배드 엔딩이겠지만, 해피 엔딩으로 만들 가능성은 아직 남아 있으니까.”
“…”
“솔직히 지금은 인기 별로 없지만 계속 이렇게 쓰다 보면 하나는 안 터지겠어?”
병호는 가영의 호언장담이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풀 죽어 있는 모습보다는 지금 저러는 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녀가 아무리 지랄 맞아도 결국은 제 피가 섞인 제 딸이기 때문인 걸까.
병호가 슬쩍 한숨을 쉬는데, 가영이 잽싸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아빠. 이만하면 슬슬 눈치챘겠지만… 나 아무래도 이번 생에 시집은 못 갈 거 같아.”
“갑자기 그건 또 무슨….”
“그래도.”
병호가 뭐라 대꾸하려고 하자 가영이 잽싸게 나서서 병호의 말을 차단했다. 그리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계속 이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내 이름으로 된 책 한 권은 나올지도 몰라.”
“…”
“혹시라도 손주 보고 싶은 마음 있으면 그걸로 퉁치라고.”
네고-씨-에이션.
가영은 병호가 정식과 했던 협상을 두고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지금 박병호는 가영이 제시하는 이 또한 그에 못지않게 아주 해괴한 협상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다산은 못해도, 다작은 한번 해볼라니까.”
이쯤 되자 병호는 도저히 제 딸의 머릿속을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머리를 짜파게티처럼 빠글빠글하게 볶을 때 뇌도 살짝 같이 볶은 게 아닌가 싶었다.
‘애초에 저 둘이 서로 등가 교환도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래도 병호는 차마 뭐라고 트집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영이 왜 이런 얘기를 하는지 어느 정도는 알 것 같기 때문이었다. 병호 스스로는 다른 집에 비해서 딸한테 결혼 닦달 별로 안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가영은 지 나름대로 속에 좀 쌓인 게 있었나 보다.
결혼 안 한 박가영이라니. 앞으로도 계속 그런 상태일 수도 있다니.
사실 병호도 이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 안 해본 건 아니다.
정확히는, 근수가 소개해 준 소개팅남이 가영에게 보낸 개 흉내 문자를 보고 충격을 받은 탓에 '별 해괴한 놈 만날 바엔 그냥 혼자 편하게 사는 게 낫겠다' 싶은 마음이 아주 약간 들었을 뿐이지만.
나니까 저 지랄 받아주지.
박가영 쟤가 내 딸이 아니라 며느리였어봐.
그럼 진짜 꼴 보기 싫을 것 같은데.
이 딜레마에 가까운 감정은 박병호에게도 미스테리였다.
가영이 지랄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런 가영이 언젠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살 거라는 기대를 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말이다. 심지어 박병호 그 스스로도 그런 행복한 결혼생활을 경험하지 못했으면서 말이다.
병호는 어쩐지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그도 다른 서툰 부모들처럼, 자신이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식이 대신 이뤄주길 바라왔던 것은 아닐까?
그 자신조차 완벽하게 갖춰진 삶을 살지 못했으면서, 자식에게는 모든 것을 완전하게 다 갖춰야 한다고 닦달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문득 든 생각이었지만 어쩐지 그 생각을 스스로 바로 부정할 수가 없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로 심각하게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병호가 뭔가 떠오른 듯 가영을 불렀다.
“박가영.”
“응?”
“너 말이야. 무지개가 몇 가지 색인 줄 아냐?”
“왜?”
이 놈의 딸년은 어째 뭘 물어보면 한 번에 대답을 하는 법이 없냐.
병호가 울컥해서 뭐라 잔소리를 장전하려고 하는데, 가영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7개 아냐?”
“그렇지.”
다행히 가영이 적당히 운을 띄울 만한 대답을 해 주었다. 가영의 대답으로 얼추 원하는 대화의 레퍼토리를 완성해 낸 병호는 짐짓 목소리를 내리깔고는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웬만한 사람들이 다 너처럼 무지개가 7가지 색이라고 생각해. 빨주노초파남보라고.”
“그렇겠지.”
“그런데 가끔 가다가 막상 무지개를 직접 보면 말이야. 그 일곱 가지 색이 다 뚜렷하게 보이는 경우는 많이 없어. 그냥 사람들은 다 어릴 때 ‘무지개는 빨주노초파남보’라고 배워서 그런 줄 아는 거야.”
병호의 말에 가영이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는 듯 병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병호는 눈앞에 보이는 허공에 손가락으로 크게 반원을 그려 보였다. 마치 그들 눈앞에 펼쳐진 하늘에 무지개가 걸려 있는 것처럼.
“보통 실제로 우리가 보는 무지개는 누가 보느냐에 따라 다 달라. 멀리서 보면 그냥 3가지, 4가지 색으로만 보이기도 해.”
“…”
“그런데 뭐 색깔 하나 빠졌다고 사람들이 그걸 무지개라고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잖아? 멀리서 보면 5가지 색이든 7가지 색이든 그냥 다 같은 무지개고, 다 예쁜 무지개야.”
병호는 가영의 반응을 살폈다. 가영은 어쩐 일로 태클을 걸지 않고 묵묵히 병호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병호가 가영에게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러니까, 네 무지개도 7가지 색을 꼭 다 갖출 필요는 없어.”
“…”
“빨주노파 무지개든, 빨노초파 무지개든. 몇 개의 색이 빠졌더라도, 그래도 네 무지개가 예쁘지 않은 건 아니니까.”
“…”
“네가 인생에서 뭘 가지고 뭘 못 가졌든지 간에, 꼭 다 갖춰서 완벽하지 않아도 돼. 살다 보면 무지개의 색이 바뀌기도 하고 추가되기도 하는 거니까.”
“…”
“그냥, 살아 있으면 돼. 살아서 앞으로 네가 뭘 하든 그저 행복하기만 하면 되는 거야.”
병호가 나름대로 진심을 담아서 이야기했는데도 가영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맞은편에 보이는 호수에 비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숨을 들이쉰 가영의 입에서 마치 한숨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흐음….”
가영은 고개를 두어 번 천천히 끄덕였다.
병호가 나름대로 많은 생각 끝에 건넨 무지개 얘기에 대한 그녀의 반응은 그게 끝이었다.
박가영이라는 사람의 스탠더드한 반응 그 자체여서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 대체 내가 얘한테 뭘 기대하겠나.
자식이라는 게 참, 부모 뜻대로 안 되는 거다.
세상 부모가 다 그렇겠지만, 병호는 다 늙어서 30 중반에 자아 찾기를 하겠다는 백수 딸래미의 멘탈을 케어하는 자신의 육아 난이도야말로 최상급이 아닐까 생각했다.
오죽하면 자식 키우는 일을 전생의 업을 갚는 일이요, 하늘에서 내려준 손님 모시기라고 하겠나.
병호는 가슴이 갑갑한 듯 푹 한숨을 내쉬었다.
“… 이제 슬슬 가자.”
“응.”
그때였다.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자세를 바꾸던 병호가 갑자기 신음을 흘렸다.
“아야….”
제 뺨에 손을 올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병호의 광대엔 아직도 3,300만 원짜리 드잡이의 흔적(a.k.a 영광의 상처)이 남아 있었다. 붉게 올라오던 멍자국은 완전히 푸르딩딩해졌다가 지금은 거뭇거뭇한 자국으로 변하고 있는 중이었다. 가끔 한번씩 찬 바람이 불면 이렇게 그 자리가 욱신거리는 듯했다.
갑자기 가영이 병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빠. 근데 이런 말 하긴 좀 그럴 수도 있는데.”
병호는 욱신거리는 뺨을 손으로 살살 쓸며 가영 쪽을 흘겨보았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운을 띄울 것 같으면 그게 뭐든 아예 말을 안 하는 게 낫지 않겠나 싶었다.
그러나 박가영은 병호가 그런 눈치를 줘도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빠, 완전 청춘이다.”
“뭐?”
가영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정말 예상 밖의 말이긴 했다. 병호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서 입을 크게 벌렸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그렇잖아. 나는 진짜 60대 아빠가 누구랑 싸움질하다 이가 나갈 줄은 몰랐지.”
그 말에 병호가 굳은 듯이 말을 멈췄다. 딱딱하게 굳은 병호의 입매와는 달리, 가영의 입가는 슬슬 풀어지며 비식비식 웃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개구진 표정은 어쩐지 병호의 얼굴을 쏙 닮아 있었다.
“아니 진짜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냐고. 내가 이 나이에 60대 아빠의 깽값을 물어줄 줄이야….”
“박가영… 너…”
병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도 박가영은 굴하지 않았다. 이제는 푸흐흐 터진 웃음을 참지도 않고 대놓고 깐족거리기 시작했다.
“와, 박병호 씨, 아직 살아있네!! 안 죽었어!!”
명백히 놀리는 말투였다. 병호는 가영을 보고 눈을 매섭게 뜨고 흘겼다. 그런데도 가영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제 스스로 한 말에 고개를 젖혀가며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어제끼고 있었다. 많이 풀려서 그런지 그냥 좀 많이 불어서 늘어진 짜파게티 같이 보이는 그 정신 사나운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앞뒤로 흔들렸다.
딸래미의 그 철없이 깔깔거리는 얼굴을 보니까 도저히 30 중반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그 모습에서 어릴 때 가끔 웃겨주면 저렇게 자지러지듯이 웃으며 뒤로 넘어가던 7살짜리 딸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그 옛날 아직 병호와 가영이 같이 살았을 시절, 가영을 두고 일하러 나갈 때마다 몇 번이고 눈에 밟히고 눈앞에 계속 떠올랐던. 어서 집에 들어가서 다시 마주하고 싶었던 바로 그 웃음이었다.
이내 병호의 입꼬리도 씰룩거리며 위로 휘어 올라갔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피식하고 웃기 시작한 병호는 가영의 미친 웃음에 전염이라도 된 듯 같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진짜 어이가 없지 않은가.
나이 60줄에 주먹다짐을 하고, 이가 깨지고.
어쩌면 박병호에게도 아직 다 소진하지 못한 인생의 지랄기가 남아 있었나 보다.
벤치에 앉은 두 사람은 둘 다 똑같이 소리 없이 꺽꺽 낄낄대며 웃었다. 한 명은 고개를 뒤로 젖혔다가, 앞으로 숙였다가 하면서. 다른 한 명은 배가 아픈지 허리를 숙이고 배를 붙잡은 채로. 그렇게 한참을 미친 듯이 웃는 두 사람의 표정은 멀리서 봐도 놀라울 정도로 서로 닮아 있었다.
가영은 어느덧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어찌나 웃었는지 콧물도 좀 난 것 같았다. 가영은 눈물에 이어 삐져나온 콧물까지 슥 훔치며 말했다.
“봐, 아빠. 나는 그래도 물리적 사고는 안 친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살짝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대화에는 직전까지 한참 동안 이어졌던 웃음기의 여운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럴 거야? 이번에 내가 급전 공수해 왔잖아. 아빠는 나 없으면 진짜 어쩔 뻔 봤냐?”
“네가 할 소리냐? 너야말로 나 없으면 어쩔 뻔했어?”
그 말에 가영이 입을 삐쭉였다.
“영화 패러딘데… 센스 없기는.”
“무슨 영화?”
“<박화영>이라고, 걔도 박 씨야. 근데 걘 나보다 좀 더 막 나가고.”
“….”
왜 하필 걔 이름도 박 씨고, 영자로 끝나는 걸까.
설마 이 이름 조합이 자식들 다 지랄 맞아지는 조합인 걸까?
아무래도 박가영을 개명을 시켜야 하나?
병호가 잠시 그런 쓸데없는 고민에 빠져들 때였다.
그 사이 웃음기를 어느 정도 갈무리한 가영이 툭 말을 던졌다.
“그래도 말이지. 아빠 말이 맞아.”
“뭐가?”
“살아있으니까 사기도 당하고 그러는 거야. 우리 가족이 원래 좀 변화구에 약하잖아.”
“…”
“그래도 살아 있잖아. 그만하길 다행이지. 그럼 됐어.”
이상하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본인이 박가영에게 했던 말인데, 가영이 금방 저렇게 습득해서 되받아 쳐오니까 어쩐지 뭔가 거슬린다.
뭐, 가영이 딱히 비꼬는 말투는 아니다.
오히려 갑자기 저러고 진지해지니까 좀 진심으로 어색해지려고 할 뿐이다.
그때였다.
한참 웃느라 살짝 분위기가 풀어진 틈을 타 가영이 훅 치고 들어왔다.
“아빠, 우리 퉁치는 거 어때?”
“뭐?”
“나 코인해서 날린 거랑 이번에 아빠 깽값 낸 거.”
갑자기 뭔 말인가 싶던 병호가 순간 정색했다.
“그게 어떻게 같아? 절대 안 돼.”
그러자 가영이 빠르게 되받아쳤다.
“그럼 나 주식하는 거.”
“뭐? 너 주식도 해??”
병호가 경악하여 눈을 휘둥그레 하게 뜨자, 가영이 기회는 이때다 싶었는지 속사포같이 말하기 시작했다.
“그럼. 사실 주식한 지는 더 오래됐어. 죄다 물려 있어서 그렇지.”
병호는 다시 한 번 할 말을 잃어버렸다.
애초에 박가영이 코인에 투자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진작에 의심했어야 하는데.
그것까지 추궁하기에는 당시 병호가 너무 화나 있었다.
지금도 사실 좀 당황스럽고 화나긴 하는데, 뭐 워낙 별일을 다 겪어서인지 좀 그게 덜한 것 같다.
이런 걸 보면 인간은 역시 경험으로 인해 강해지는 존재가 아닌가 한다.
이런 마음을 두고 바로 해탈한다고 하는 걸까?
이 웬수 같은 딸년은 대체….
제 아버지가 자신 때문에 도를 닦다 못해 급기야 열반의 경지에 도달하기 직전인 걸 아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모르는 것 같았다.
병호의 경악한 반응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래도 그나마 희망적인 건 거기에 내 돈이 물려 있다는 거야.”
“그게 왜 희망적인 건데?”
“내가 이제 개털이긴 한데, 완전 100% 개털은 아니라는 거지.”
“하아…….”
병호는 머리가 아픈 듯 손으로 이마를 감싸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기당해서 3천만 원을 날린 아빠에게 저렇게 또 사기를 치려는 딸년을 보니 완전 날강도가 다로 없다.
저 백수 캥거루 같은, 징글징글한 딸년.
그래도 이 나이 먹고 다 큰 딸년과 한번 같이 살아 보지 않았더라면, 병호는 아마 자기 딸에게 이런 지랄 맞은 구석이 있는 줄도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다.
그래서일까?
병호는 지금의 이 상황이 다행인 건지, 불행인 건지도 도저히 판단할 수가 없었다.
먼 훗날에는 그에게도, 가영에게도 이런 날들이 어떻게 기억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일단 지금 당장은 판단 못한다.
그냥 지금은… 어쩐지 새로 한 임플란트 자리가 시리다.
100세 시대.
64세 박병호, 36세 박가영.
가족 구성원 둘의 나이를 합치면 딱 100세가 되는 한 부녀의 평범한 하루가 그렇게 저물어 가고 있었다.
- <낭만적 퇴사와 그 후의 일상> 2부. 그 후의 일상 마침.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