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NOT TODAY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6개월이 지났다.
가영은 그 사이 그녀의 첫 웹소설 <역대급 병크를 터뜨린 남돌에 빙의했다>를 완결했다. 마지막화의 조회수는 간신히 112를 찍었다.
지표가 망해서인지 그 소설은 무료 연재 기간 내내 어떤 출판사로부터 컨택이 없었다. 그래서 가영은 완결을 치자마자 바로 투고를 돌렸다. 있는 출판사, 없는 출판사 다 찾아서 투고를 돌렸지만 그녀가 3주 만에 받은 결과는… 올 반려였다.
그래도 그녀는 굴하지 않고 차기작 연재를 시작했다. 인기 아이돌인 주인공이 잠에 들 때마다 비둘기로 변신한다는 설정의 코믹 판타지물이다. 이번에는 대놓고 클리셰 범벅으로 요즘 유행하는 브로맨스 요소도 살짝 넣어볼 예정이다.
조회수가 나오나, 안 나오나.
팔리나, 안 팔리나.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영이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 5천자든, 1만자든. 꾸준히 말이다.
여전히 반응은 저조하지만, 그래도 첫 작품보다는 독자가 조금 늘었다. 그래서인지 가끔가다 악플도 하나씩 달린다. 주로 설정 오류나 필력을 지적하며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가영은 개의치 않는다.
그런 악플이 눈에 걸릴 때면 그냥 이렇게 생각하고 말 뿐이다.
‘내가 이걸로 무슨 노벨문학상을 탈 것도 아니고.’
망한 웹소설 한 질을 완결내 본 가영은 이제 안다.
통속적이고 뻔한 상투적인 소설을 쓰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아직 그녀가 전업 소설가가 된 것도 아니고 상업 데뷔에 성공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가영은 계속 쓸 것이다.
계속 쓰는 한, 나중에는 뭐라도 되겠지.
다행히 아직은 계속 쓰고 싶은 소재가 나타나 주고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너무 가시적인 성과가 없다보니, 이것만 붙들고 있으면 앞으로의 인생이 영 가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솔직히 좀 들긴 한다. 그래서 그녀는 최근 들어 웹소설 외의 다른 것들에도 조금씩 도전해 보고 있다.
가게 일 외에 다른 단기 아르바이트도 뛰고, 소소하지만 재능기부 마켓에 카피라이팅을 해주는 일을 하면서 용돈 벌이도 하고 있다. 위기가 곧 기회라고, 6개월 전 무나틱 코인 사태 이후로 잔고에 진짜 돈이 없어져서 조금은 더 열심히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가영은 자신의 브런치에 <낭만적 퇴사와 그 후의 일상>이라는 타이틀로 글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가영이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인터넷을 하다 우연히 보게 된 ‘퇴사 짤’ 이었다. 짤 속 캐릭터의 이름을 따 ‘가영이짤’이라고도 불리는 그 퇴사짤에는 한 소녀가 빗자루를 타고 허공으로 날아가며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전 이 세상의 모든 굴레와 속박을 벗어던지고 제 행복을 찾아 떠납니다!”
행복을 찾아 떠났다는 가영이짤을 보면서, 박가영은 문득 궁금해졌다.
‘쟤는 정말 행복해졌을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이 세상에는 ‘퇴사’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많았다. 그렇지만 퇴사를 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이후의 스토리는 별로 본 기억이 없었다.
퇴사가 ‘해피 엔딩’이라면, 그 엔딩 이후로도 지속되는 삶은 대체 무엇일까?
가영은 문득 퇴사한 사람들에게도 에필로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가영은 브런치에 매주 한 편씩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글로 써서 연재하기 시작했다.
바로 박가영 본인과, 아버지 박병호의 이야기로 말이다.
병호는 가영이 뭔가 소설을 쓴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여전히 가영이 무슨 내용으로 대체 뭘 쓰는지 모른다. 사실은 관심도 없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다. 병호는 가영이 이 글을 죄다 출력해서 ‘우리 얘기로 소설 썼다’고 읽으라고 당장 눈 앞에 갖다줘도 안 읽을 것이다.
그래도 괜찮았다. 사실 가영은 늘 언젠가는 꼭 그들 부녀의 이야기를 한번 기록으로 남겨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병호의 드라마틱한 삶을 세상에 어떤 형태로든 기록해 보고 싶다고.
그리고 가영은 이렇게 브런치를 통해 그 꿈을 이뤄가고 있다.
비록 애초에 그녀가 생각했던 그런 형태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서른 여섯, 반올림하면 30보다 40에 가까운 나이.
가영이 꿈꾸는 창작자의 삶을 새로 시작하기에는 다소 늦은 감이 있는 나이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그런 주변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묵묵히 컴퓨터 앞에 앉아서 쓰고, 또 쓴다.
인생은 안되는 게 디폴트지만, 언젠가는 뭔가 하나 터질지도 모르니까.
‘글은 써놓으면 어떻게든 되지만, 글이 없으면 길도 없다.’
어느새 자신의 좌우명이 된 저 말을 되뇌이며, 그녀는 오늘도 또 쓰고, 또 쓸 뿐이다.
최근 그녀는 그림에도 흥미가 생겼다. <낭만적 퇴사와 그 후의 일상>을 쓰다 보니, 이것을 인스타툰으로 그려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최근 동네에 있는 웹툰 학원에 등록했다. 이제는 그림 기초를 배우면서, 가능하다면 <낭만적 퇴사와 그 후의 일상>도 백수툰의 형태로 그려 보려고 한다. 인스타그램에 야심차게 계정도 만들었다.
백수인가영 @gayoung_in_real_life
이렇게 오랜만에 가영이 뭔가 의욕을 갖고 배워보겠다고 나섰지만….
박병호는 그게 또 뭔가 마음에 안 드는지 가영에게 후려치기를 시전했다.
“넌 마흔이 무슨 학원이야?”
그래도 박가영은 굴하지 않았다.
“그거와 관련해서는 내가 아빠에게 전해줄 만한 기쁜 소식이 하나 있는데.”
“…그게 뭔데?”
“당신의 딸은 아직…마흔이 아닙니다!”
병호의 표정이 굳었다. 가영은 그런 병호가 웃긴 듯 키득거리며 웃었다.
박병호와 같이 산 지 이제 겨우 1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 가영은 좀 알 것 같다.
사나이 박병호는 딸에게 잔소리는 좀 할지 몰라도, 정말 하지 말라고는 안 한다는 것을.
“일단 배워 볼래. 지금 쓰는 소설에도 분명히 도움될 것 같단 말이야.”
“그 놈의 소설인지 뭔지….”
한숨을 쉬는 병호에게 가영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딱 기다려봐. 내가 이번에 상금 타올테니까.”
“상금? 뭔 상금?”
병호는 가영의 갑작스런 호언장담이 미심쩍은 듯 미간을 좁혔다. 그 눈빛이 어쩐지 불신이 가득해 보였지만 가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나 이번에 브런치북 공모전 낼 거야. 아빠랑 내 얘기로 소설 써서.”
“상금이 얼만데?”
“오….”
상금 액수를 말하려던 가영이 순간 말을 뚝 멈췄다.
음….
대상은 딱 10명을 뽑는데.
그건 아무리 봐도 가능성이 좀 희박해 보인다.
그래도 특별상 안에는 어떻게든 들 수 있지 않을까?
그건 40명이니까.
병호는 말을 하다 멈춘 가영을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슬쩍 눈치를 본 가영이 다시 말했다.
“아니, 백만 원.”
병호는 말없이 가영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너무 감동적인가보다.
그래도 이젠 등짝 안 갈기고 저렇게 눈만 흘기는 게 어딘가 싶다.
가영은 병호가 저러면서도 막상 그녀가 상금을 타오면 눈물 흘리며 기뻐할 것을 안다.
그게 박가영의 아버지, 사나이 박병호의 사랑이니까.
***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가영에게 이렇게 묻고 싶을지도 모른다.
“넌 어쩌려고 그러고 살아?”
그리고 그 질문은 대개 다음의 후속 질문들을 동반한다.
커리어는?
결혼은?
언제까지 아버지랑 같이 살래?
아버지가 아프시면 어떡할거야?
네가 아프면?
가영이라고 왜 그런 질문들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보지 않았겠는가?
백수 생활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사실 경제력을 잃은 시기가 길어지면 그에 비례해서 자괴감도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우리의 박가영은 아마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그래..그런 날도 있겠지. 그래도 그게 ‘오늘’은 아니잖아.”
그러면서, 그녀는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다.
“언젠가 아버지가 아프실 수도 있고, 내가 아플 수도 있어.
계속해서 내가 작가 데뷔를 못할 수도 있고, 돈을 벌지 못해서 다시 회사에 취업해야 할수도 있어. 미래를 생각하면, 그게 무엇이 됐든 불안한 것은 항상 떠올라. 그렇지만, 적어도, 그게 ‘오늘’은 아니니까.”
서른 여섯, 박가영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래도 가영은 한번 이 불투명한 미래를 그 자체로 즐겨보기로 했다.
꽤 괜찮지 않은가?
내 인생에 내일이 ‘오늘’이 되어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있을 것.
살아 있는 한, 인생은 어떻게든 되는 법이다.
계속 발버둥치고 구르고 삽질하다 보면 언젠가는 손에 잡히는 뭔가를 반드시 손에 넣을 것이다.
모쪼록 건강하기를. 그리하여 모두 살아있기를.
언젠가 절망적인 순간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이 오늘은 아니니까.
그러니 오늘도 내일도, 그저 살아갈 뿐이다.
이후의 이야기는 또 언젠가 기록할 날이 오겠지, 생각하며.
결국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자신의 삶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가영은 안다.
- <낭만적 퇴사와 그 후의 일상> 마침.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