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털이 된 개딸
※ 본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 및 단체는 실제와 무관한 것으로 허구임을 밝힙니다.
그날 저녁. 가영은 털레털레 동네 ATM기로 가서 봉투 속에 있는 현금을 모두 자신의 계좌로 입금했다. 그러고 나서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무나틱 코인을 사서 MOONATIC Base로 송금하고 스테이킹까지 마쳤다. 6주 동안 쌓인 가게 현금은 거의 1,000만 원에 가까운 금액이었다.
씨드를 충전한 가영은 그 전액으로 바로 무나틱 코인을 추매했다. 가영이 추매할 시점에는 무나틱 코인의 가격이 개당 7,500원까지 내려가 있었다. 그런데, 가영이 추매를 완료한지 몇 시간 만에 개당 9,500원까지 시세가 올랐다. 그 날 밤, 가영은 무나틱 코인 차트의 240분봉을 들여다 보며 자화자찬했다.
‘크…! 매수 타점 보소. 지렸죠?’
가영은 그런 스스로가 무척 뿌듯했다.
비록 아버지 박병호에게 항상 방구석 백수라고 구박받는 인생이지만….
중요한 건 결국 직업이 아니라 돈이 아니겠나?
병호가 가영을 구박하는 논리가 ‘직장에 안 다녀서’가 아니라 ‘돈을 못 벌어서’라면, 이렇게 돈을 벌어주면 된다 이거다.
가영은 어쩌면 이것이 병호를 위한 일일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박병호의 표현대로라면 지금 병호는 매일같이 ‘뼈 빠지게’ 돈을 벌어오고 있다. 그런데 그 돈을 그냥 통장에 파킹하고 있지 않나. 그럴 바에는 가영이 이렇게 돈을 좀 굴려서 돈이 돈을 벌 수 있게 하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가겟돈을 굴려서 겸사겸사 가영이 글쓰기에만 집중할 수 있는 자금도 딱 마련하고, 아버지에게 뻥뻥 큰 소리도 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일석이조 아니겠나.
가영이 그렇게 희망회로를 돌리고 있는 사이, 현관문에서 삑삑 소리가 났다. 이내 현관문이 열리고 병호가 들어왔다. 병호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은 듯 표정이 밝았다. 알싸하게 풍겨오는 술 냄새가 어째 살짝 한잔 걸친 것 같았다. 가영이 물었다.
“뭐야, 술 마셨어?”
“응. 고향에서 오랜만에 후배가 와가지고. 근수랑 다 같이 한잔 했다!”
가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가영은 이 집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나름의 사회생활이 있다는 것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
가영은 병호가 그저 맨날 식당에만 짱박혀 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렇지만 알고 보면 병호도 나름대로 이렇게 놀 줄 알았다. 가끔 친구들이나 후배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종종 맛있는 것도 먹고, 골프도 치면서. 가영은 그런 병호의 모습을 보면 어쩐지 좀 마음이 놓였다. 병호가 정말로 일만 하고 살지 않는다는 게 말이다.
뭐 어쨌거나 지금 병호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상황은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오늘 밤은 잔소리는 안 하겠구먼.’
대충 상황을 파악한 가영이 안심하고 다시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병호가 갑자기 다가와 가영이 드러누워 있는 소파의 한 구석에 앉았다.
“가영아. 우리 가게 현금 얼마나 모였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훅 들어온 질문이었다.
‘뭐야, 여태까지 안 묻던 걸 왜 갑자기?’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가영은 어쩐지 뜨끔했다. 그렇지만 애써 태연을 가장하며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 그거? 한 천만 원?”
“그래? 현금으로 가지고 있어?”
“아니. 이자 나오는 통장에 넣어뒀어.”
“이자? 통장은 다 이자 나오는 거 아니야?”
“아니, CMA 통장이라고. 매일 잔액에 이자 붙여주는 통장 있어.”
병호는 이해가 안 된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박병호는 평생 재테크를 했던 적이 없었다.
병호는 가만히 앉아서 돈놀이를 하는 것은 찌질한 행위라고 했다. 말이 좋아 ‘투자’지, 돈 놓고 돈 먹겠다는 것은 도박 노름판에서 날로 먹으려는 심보나 다름 없다는 것이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시원하게 도박을 하는 게 낫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이 소설의 프롤로그를 다시 읽어보면 알 것이다.)
어쨌든 병호는 투자 그런 것에 머리 쓰고 신경 쓸 시간에 차라리 식당 매출을 올릴 방법을 궁리하는 게 더 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가영은 자신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그냥 현금으로 쥐고 있거나 일반 통장에 넣어두면 뭐해? 하루를 넣어 놔도 이자가 더 붙으면 그게 더 좋은 거 아냐?”
“그래…? 그런 게 있단 말이야…?”
병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얼굴 전체에 벌겋게 오른 술기운 때문인지 그 모습이 조금 어벙해 보였다. 가영은 병호가 이쯤에서 대충 관심 끄고 은근슬쩍 지나갔으면 좋겠는 마음으로 얼버무렸다.
“응. 내가 알아서 잘 관리하고 있으니까 그건 걱정 마. 아빠 딸 못 믿어?”
한술 더 떠 선수를 친 가영이 눈매를 가늘게 뜨고 책망하듯 병호를 바라보았다. 순간 병호는 민망했는지 급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아니… 뭐, 난 걱정한다기보다는… 조만간에 좀 목돈이 필요할 것 같아서.”
“목돈? 왜?”
되묻는 가영의 목소리는 조금 긴장한 기색을 띠고 있었다. 가게에 목돈이 필요하다면 오늘 스테이킹한 무나틱 코인을 다시 빼야 했다. 문제는 지금 당장 해지한다 해도 그 1천만 원을 오늘 바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무나틱 코인 스테이킹 해지에는 2주의 유예기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아빠가 오늘 고향 후배를 만났다고 했잖아.”
“응.”
“그 후배가 작년에 퇴직하고… 아들내미가 하는 사업을 같이 하려나 본데.”
“무슨 사업?”
“밀키트 상품 개발 대행업이래.”
“밀키트…?”
이번에 고개를 갸웃하는 것은 가영 쪽이었다. 이미 술 때문에 기분이 좀 들떠 있는 상태였던 병호는 가영이 관심을 보이자 한결 더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가게처럼 지역에서 잘 알려진 맛집 식당인데, 직접 프랜차이즈나 밀키트 상품 개발하기엔 여건이 안 되는 그런 식당들 있잖아? 그런 데 메뉴 중에 괜찮은 걸 발굴해서 밀키트 제품을 개발하고 제조, 유통까지 대행해주는 그런 사업이래.”
“그래…?”
“응. 너, 아빠가 그동안 프랜차이즈 문의가 수없이 와도 도저히 품이 없어서 사업 확장 못 했던 거 알지?”
“그건 알지.”
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예전에 병호가 가영에게 식당을 물려 받을 생각 없냐고 한번 물어봤던 적이 있었다. 그 때 병호는 지금과는 좀 다른 비전을 품고 있었는데, 바로 <박가네 불고기>를 프랜차이즈로 확장하는 것이었다. 다만 그 혼자서 본점을 운영하면서 직접 프랜차이즈까지 하는 것은 힘들어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병호는 가영에게 이런 제안을 했었다.
‘나는 식당 본점 운영하면서 레시피 전수하고, 네가 프랜차이즈 및 유통 사업자를 따로 내서 가맹 업무를 봐 주면 좋을 것 같아. 만약 너한테 그럴 뜻이 있다면 말이야.’
물론, 당시 가영은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병호도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가영에게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고. 가영은 무심코 그 때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 때 포기한 줄 알았더니….’
아무래도 병호는 당시에 그 꿈을 완전히 포기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병호는 그 후배의 제안이 아주 마음에 쏙 든다고 했다. 이윽고 열정적으로 가영에게 그 후배가 아들과 함께 시작한다는 사업의 구조를 피칭하기 시작했다.
“그 친구가 한다는 사업에 초기 투자해서 지분을 받고, 추후 발생되는 수익을 나눠서 받는 거지. 게다가 우리 석쇠 불고기를 밀키트로 가장 먼저 개발해서 유통까지 하면 수익 구조가 다양해지는 거니까.”
피칭을 하는 병호의 모습은 정말로 신나 보였다. 마치 지금 자신이 설명하는 사업 구조가 병호 본인의 사업이고, 듣고 있는 가영은 투자자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그 후배의 아이디어에 보통 매료된 게 아닌 것 같았다.
그 열정적인 피칭의 끝. 병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화룡정점을 찍었다.
“나도 이제 늙어서 체력은 갈수록 떨어지는데, 언제까지 계속 이렇게 식당을 직접 운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진실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훌륭한 발표였다. PPT 화면 하나 띄워두지 않았으나, 그 호소력만큼은 정말 스티브 잡스도 울고 갈 만했다.
가영은 지금 박병호가 현실 왜곡장 안에 들어가 있으며,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어떤 반론은 어떤 것이든 족족 튕겨낼 궁극의 답정너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술기운 때문에 이성적인 판단 능력이 마비되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하여튼 지금의 박병호에게 저 아이디어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해서 괜히 역공을 당할 이유는 없었다.
뭐, 가영이 보기에도 그 생각이 썩 나쁘지 않기도 했다. 요즘은 밀키트 전성 시대니까. 바로 얼마 전에 만나고 온 그녀의 대학 동기 혜진만 봐도 밀키트 무인 매장만 2개를 운영하며 쏠쏠한 수익을 올리고 있지 않던가?
어차피 병호가 계속해서 식당을 운영할 수 없을 거라면, 그리고 가영도 굳이 그 식당을 물려받을 생각이 없다면.
어쩌면 이 타이밍에 이렇게 사업 분야를 확장하고,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것은 필연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가영은 심플하게 대답했다.
“그래, 아이디어 괜찮네. 한번 해보든가.”
병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잖아도 내일 브레이크 타임에 식당에 와서 같이 투자 조건에 대해 의논하기로 했어. 근수도 같이 투자할 거고.”
“그래, 열심히 해봐.”
가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속으로는 은밀하게 생각하며.
‘목돈이 얼마나 필요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오늘 MOONATIC Base에 넣어놨던 1천만 원은 얼른 스테이킹을 해지해야겠군.’
그래도 뭐, 매수 타점을 잘 잡아서인지 지금 당장 스테이킹 해지하고 뺀다 해도 손해는 아니었다. 문제는 그 1천만 원을 빼서 현금화하는 데까지 2주는 걸린다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당분간 시세가 지금 수준으로 유지된다면 수수료를 제하고서라도 익절할 수는 있었으니까.
시세만 유지된다면 말이다.
‘그래도 스테이블 코인이니까 큰 등락은 없겠지. 최근 3~4개월 간 시세 흐름도 꽤 안정적이었고.’
가영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시총 7위 규모인 코인이 어느 날 갑자기 망할리도 없으니까.
***
다음 날. 가영은 한참 텍스피아에 연재 중인 웹소설의 당일 연재분을 쓰느라 거실에서 분주하게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었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둔 가영의 스마트폰이 진동음을 내며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를 확인해 보니 병호였다. 가영이 전화를 받자마자 병호가 물었다.
[어딘데?]
병호는 전화 통화를 항상 저렇게 시작했다.
“집이지. 뭘 맨날 물어봐?”
백수가 갈 곳이 어디 따로 있겠나? 그런데도 박병호는 가영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딸래미가 집구석이 아닌 어디에라도 나가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럼 너 지금 내가 톡 메시지로 보내주는 계좌로 3천만 원 송금해.]
“3천이나? 갑자기 왜?”
[어제 얘기했던 그 밀키트 개발 사업 투자금이야. 전화 끊고 얼른 보내.]
“… 알았어.”
가영이 전화를 끊자마자 병호로부터 계좌번호를 적은 톡 메시지가 날아왔다. 예금주 명의는 ‘윤정식’이었다.
가영은 스마트폰의 은행 어플을 켜서 가게 통장의 잔액을 확인했다. 통장 안에는 3,800만 원 정도가 있었다. 병호가 알려준 계좌로 3,000만 원을 바로 송금하고 나자 가게 통장에는 돈이 이제 1,000만 원도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보냈어.」
가영의 메시지를 확인한 병호는 별다른 답 메시지를 보내오지 않았다. 가영은 다소 불안한 마음으로 달력과 가게 통장 잔액을 번갈아 살폈다.
사실 <박가네 불고기>는 겉으로 보기에 번듯하게 장사가 잘되는 것에 비해서는 의외로 돈이 많이 남지 않았다. 가영도 이렇게 가게 통장 관리를 맡아서 통장을 들여다보기 전에는 잘 몰랐던 사실이었다.
<박가네 불고기>는 개업 초기부터 같은 자리에서 18년 째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창기부터 장사가 잘 되었어서 그런지 집주인이 재계약 때마다 따박 따박 월세를 올려서 받았다. 월세를 내고, 각종 전기세, 가스비, 수도세와 같은 공과금, 4대 보험, 인건비를 다 지불하고 나면 사장인 병호가 가져갈 수 있는 돈은 고작 몇백만 원 정도였다.
그 남은 돈에서 합쳐서 100만 원이 조금 넘는 주택담보대출의 원금과 이자를 갚고, 아파트 관리비를 내고, 보험비를 내면 실질적으로 겉에서 보이는 가게 규모에 비해 그렇게 많이 남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하루 12시간 씩 가게에 나가서 일하며 그렇게 고생을 해도, 수입은 웬만한 직장인보다 조금 더 많은 수준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박가네 불고기>는 의외로 이런저런 비용이 많이 드는 식당이었다. 사장 박병호의 성향 때문이었다. 그는 가게 통장에 돈을 쌓아두는 성향이 아니었고, 매번 수익이 생길 때마다 가게에 꼬박꼬박 재투자했다.
병호가 딱히 가게 문을 닫고 공사를 해야 할 정도로 요란한 인테리어를 자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게 문을 매일 열고 장사를 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가게의 테이블이나 의자, 집기류 등은 2년에 한 번씩은 큰돈을 들여 바꿨다. 이외에도 주말이면 바깥에서 한참 대기하는 고객들을 위하여 대기 시설의 냉/난방 시설을 업그레이드하는데 큰 돈을 들였다.
그래서인지 가영이 아직 직장에 다니던 시절, 한 달에 한두 번씩 가게에 일을 도우러 갈 때마다 그녀는 매주 놀라곤 했다. 가게에 올 때마다 이전까지 못 보던 것들이 막 들어와 있곤 했기 때문이다. 가영이 놀라 '이번에는 또 뭘 산거냐?'라고 물으면 병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돈 쥐고 있으면 뭐하나? 돈은 흐르는 거야. 어차피 쥐고 있으면 써버릴 거, 차라리 가게에 써버리면 그게 남는 거지."
비록 이런 지금 당장은 돈이 나가는 것 같아 아까워도 그렇게 해야 손님도 더 편하고, 장기적으로 봤을 때 더 이득이라는 것이었다. 이게 박병호 스타일의 ‘투자’였던 셈이다.
그렇게 병호는 자신의 인생의 라스트 샷이나 마찬가지인 이 가게에 지속적으로 엄청난 공을 들여왔다.
이런 연유로 마침 이번 달에도 예정에 없던 큰 지출이 좀 있었다. 설 명절 전후로 일시적인 식용유 파동이 있어 값이 크게 뛰기 시작했는데, 병호가 아는 식자재 업자를 통해 1년 치의 식용유를 미리 벌크로 구입한 것이다. 그러면서 연말부터 비축해뒀던 몇천만 원을 한 번에 지출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 달에는 노후되어 고장 난 냉동고 두 개를 한꺼번에 바꾸기까지 했다.
문제는 다음 주 후반이면 월말이고, <박가네 불고기>직원들의 월급날은 월말일이라는 것이었다. 정직원 3명에 일용직, 사업 소득자들 근로 내역을 전부 정리해서 월급을 줘야 하는데. 그 인건비만 다 합쳐도 대략 3천만 원 가까이는 들 것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박가네 불고기>는 주요 식자재 거래 업체에 월말에 다음 달 식자재 비용을 선불로 몇백만 원씩 미리미리 결제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칫하면 재정적으로상당히 쪼들릴 수 있는 불안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이 계좌로 카드사들 결제 수익이 꾸준히 떨어질 테지만, 아무래도 지난 한 달 반 동안 가영이 모아 두었던 가게 현금 수입을 합치지 않으면 약간 아슬아슬할 것 같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현금이 지금 전부 무나틱 코인 스테이킹에 묶여 있었다.
가영은 살짝 초조해졌다.
‘괜히 가게 돈으로 추매했나?’
가영은 코인 거래소 애플리케이션을 켜 보았다. 가영의 무나틱 코인 매수 평단 8,900원. 현재의 무나틱 코인 매매 단가 10,500원. 그러니 가영은 약 17%의 수익률을 자랑하고 있었다. 다 스테이킹 해지 기간에 묶여 있어서 문제지.
가영은 MOONATIC Base에 들어가서 어제 입금했던 1천만 원의 스테이킹 해지 일자를 확인했다. D-13이라는 글자가 야속하게 떠 있었다.
‘어떡하지…?’
그러나 가영은 이내 마음을 놓았다.
‘뭐, 괜찮겠지. 어쨌든 당분간 딱히 우려되는 악재는 없으니까.’
이 추세대로 무나틱 코인 시세가 쭉 올라주기만 한다면…. 아니, 여차하면 그냥 유지만 해준다 해도 현금화하면 나름 수익도 생길 테니 괜찮을 것 같았다.
‘아 몰라, 그냥 닥치면 생각하자. 아빠도 다 생각이 있겠지 뭐.’
가영은 그냥 마음 편하게 먹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어차피 지금 안달낸다고 스테이킹 해지가 빨리 되는 것도 아니니까.
정 안되면 CMA 계좌에 있는 300만 원으로라도 어떻게 돌려막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대충 불안한 마음 정리한 가영은 다시 노트북 화면을 켰다.
갓 무료 연재를 시작한 웹소설 작가로서 이런 잡생각을 하느라 일일 연재 원칙을 어길 순 없었다.
새 에피소드를 쓰기 전 그녀는 잠시 텍스피아에 들어가 자신의 웹소설의 성적을 체크했다.
처참한 선작수와 조회수.
과연 읽어주는 사람이 두 자릿수는 될까? 싶었지만….
그래도 가영은 미련할 정도로 고집스레 소설을 계속 이어 쓰는 중이었다.
인터넷 창을 끄고 다시 한글 문서 창으로 돌아온 그녀는 손가락을 풀며 후하고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는 안경을 끼고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속으로 스스로를 계속해서 다독이며.
‘어쨌든 조회수를 보면 몇 명이라도 보는 사람은 있다는 거니까. 일단 완결만 내자.’
***
“형님, 역시 그릇이 크십니다. 이렇게 선뜻 투자금을 내주실 줄은 몰랐어요!”
정식은 본인 계좌로 3천만 원이 입금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몇 번이고 이렇게 감사 인사를 했다. 병호는 그럴 때마다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 고향 사람 좋다는 게 다 뭐야? 그리고 나는 가오 떨어지게 찔끔찔끔 간 보고 그런 거 안 해. 한번 믿고 가면 화끈하게 가는 거지!”
그들이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근수는 곁에서 이 광경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형님, 이번 일 정말 잘 됐으면 좋겠네요. 형님도 그동안 식당 운영하면서 고생 많으셨으니 이번 기회에 조금 더 편하게 수익낼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생기면 좋겠고요.”
“그럼 그럼! 우린 이제 운명 공동체인 거야. 우리 세 명이서 딱, 이렇게 도원결의를 한 거라고!”
“박가네 불고기 밀키트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결국 기분이 들뜬 병호는 그날도 술을 꽤 많이 들이켜고 말았다. 이후 집에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눈앞이 번쩍 뜨여 정신이 확 들만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지만 말이다.
***
병호는 언제나처럼 현관문의 도어록을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그는 거실로 올라서며 습관적으로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TV 화면은 켜져 있었지만, 늘 거기에 시체처럼 누워 있던 가영은 없었다. 아마 잠깐 화장실에라도 간 모양이었다.
병호는 후-하고 한숨을 쉬며 피곤한 어깨를 주물렀다. 그리고는 습관적으로 잠깐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소파에 앉은 그의 시선에 소파 테이블 위에 펼쳐져 있던 가영의 노트북 화면이 들어왔다.
가영이 뭔… 소설을 쓰겠답시고 허구한 날 하얀 배경을 틀어놓고 뭔가를 써제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가끔씩 가게 손익계산이나 노무사에 인건비 신고를 하기 위해 뭔가 사무실에서나 쓸법한 프로그램을 띄워둔 것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리를 비운 가영의 무방비한 노트북 화면에 띄워져 있는 것은 박병호로서는 전혀 본 적이 없는 낯선 화면이었다.
빨간색과 초록색의 막대기가 위아래 나뉘어 표시된, 오르락내리락하며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는 것처럼 보이는 그것은… 마치 무슨 주식 차트 같았다.
온통 영어로 쓰여 있었지만, 상단에 쓰여 있는 +3.2% 같은 퍼센트라던지… 화면의 모양새가 뭔가 불길할 정도로 익숙했다.
병호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주식 투자를 직접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가끔씩 근수가 스마트폰으로 주식 어플 화면을 들여다보는 것을 본 적은 있었다.
‘이게 뭐야. 근수, 너 설마 주식하냐?’
‘네. 가게 정리하고 나니까 조금 심심해서 소액으로 시작했어요.’
‘요즘은 이렇게 스마트폰으로 다 되나 보지?’
‘그럼요, 형님. 요즘 세상이 참 신기하죠?’
빨간 막대, 초록 막대…
오르락내리락하는 저 선들.
그리고 저 퍼센테이지.
썩 좋지 않은 무엇인가를 직감한 병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직전까지 기분 좋은 술기운의 여운에 달큰하게 취해 있던 병호의 정수리로 누군가 얼음이 가득한 양동이라도 쏟아부은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현관 옆에 붙어있는 화장실 쪽에서 쏴아-물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곧바로 덜컥 하고 화장실 문이 열렸다. 벌써 며칠 째 안 빨고 계속 입어서 이제는 거의 꾸덕꾸덕해진 홈웨어를 입은 가영이 거실로 걸어나왔다. 그 얼굴에 걸린 표정이 마치 힘겨운 전투에서 승리한 듯한 시원하고 상쾌해 보였다.
“왔어?”
그러나 병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병호의 시선은 아까부터 쭉 가영의 펼쳐진 노트북 화면에 띄워져 있는 불길한 화면을 향해 있는 상태였다.
가영은 아무런 대꾸가 없는 병호를 보고 뭔가 이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이내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듯 그 자리에 멈춰섰다. 병호가 아까부터 아무런 미동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것이다. 그리고 병호의 시선이 어딘가에 붙박인 듯 고정되어 있다는 사실도.
가영의 동그랗게 떠진 눈이 병호의 시선이 이어진 곳을 쭈욱 따라갔다. 그러면서 가영은 생각했다.
‘잠깐, 방금 전까지 내가 뭐하고 있었더라?’
그리고 마침내 가영의 시선이 노트북 화면에 닿은 순간. 가영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굳어버렸다.
‘와, 좆됐다.’
지금 이 거실 안은 숨 막힐 듯한 침묵으로 가득했다. 이 상황에서는 어디 뭐 도망칠 데도 없었다. 가영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욕을 뇌까렸다.
‘아, 망할 변비 새끼!’
가영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옴짝달싹 못하고 있는데, 병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가영.”
그 목소리가 마치 지옥에서 끌어올린 것 같이 어두웠다. 가영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긴장하여 침만 꿀꺽 삼킬 뿐이었다.
“너, 이게 다 뭐냐?”
가영은 잠시 고민했다.
이런 상황이 닥칠 줄 몰랐고, 닥치지 않길 바랐지만 일단 닥친 이상은 어쩔 수 없었다.
어차피 이미 병호가 볼 건 다 봐버린 상황에서, 거짓말로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 아닌가? 가영은 그냥 잠시 진실로 뻔뻔해지기로 결심했다.
“코인이지 뭐….”
“뭐?”
짧게 반문하는 병호의 목소리가 상당히 무시무시했다. 병호는 고개를 돌려 가영을 보면서 말했다.
“너, 이런 걸 하는 거야?”
“이런 거라니?”
가영은 항변하기 시작했다.
“아빠가 맨날 뉴스로만 코인 접하고, 주변에서 못 봐서 그렇지. 사실 코인이라고 다 똑같은 코인이 아니거든? 이거는 무나틱 코인이라는 건데, 시총 7위에다 스테이킹이라고 해서 꼬박꼬박 이자도 주고…”
“뭐가 달라! 다 도박이나 마찬가지지!”
병호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가영은 헙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박병호의 인생 트리거 워드, 그것은 바로 ‘도박’이었다. 그것 때문에 잘 나가던 30대 중후반의 사업가의 삶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으니까.
물론 병호는 그렇게 한번 인생을 제대로 말아먹은 이후에 도박을 완전히 끊었다. 주식 투자도 절대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틈이 날 때마다 가영에게 이렇게 강조해 왔다.
‘주식도 도박이니 절대! 절대 하면 안 된다.’
따지고 보면 가영이 또래에 비해 다소 늦게 주식 투자에 입문한 것도 박병호의 그런 조기교육 때문이었다.
“얼마나 넣었어?”
“아, 그런 건 왜 물어봐….”
“천? 2천?”
“그거보단 좀 더 돼….”
방금 전까지 ‘도박 아니다’ 하면서 뭔가 당당하게 항변하려는 듯했던 가영은 투자 금액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조심스럽게 찌그러들었다. 병호는 가영의 대답에 억장이 무너질 지경이었다.
‘2천보다 더 넣었다고?’
병호의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달아올랐다.
“넌 백수가 대체 이런 걸 무슨 돈으로 하는 건데?”
“그냥, 내 퇴직금이랑… 오피스텔 보증금이랑… 이거 저거….”
“설마 여기 가게 돈도 들어가 있어?”
“그게…. 조금 들어가 있긴 한데….”
그 말에 병호가 입술을 꾹 물었다. 가영을 노려보는 눈빛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가영은 다급하게 덧붙였다.
“너무 그렇게 걱정하지 마! 언제든 뺄 수 있으니까.”
“….”
“아니, 아빠가 몰라서 그래. 이게 수익률도 좋고… 다른 코인과 달리 안정성도 있다고 하고. 그냥, 나는 가게 현금을 그대로 놔두는 것보다 이렇게 해서라도 조금이라도 불리면 좋을 것 같아서….”
가영은 눈치를 보면서도 억울한 듯이 조곤조곤 말하고 있었다. 병호는 속이 답답해졌다.
“너 지금 말하는 꼬라지가 도박쟁이들하고 똑같은 거 아냐?”
지금 박병호가 보기에는 저 박가영 저거 눈이 완전 확 돌은 것처럼 보였다. 생각해보니, 병호가 도박에 빠져서 집안을 홀랑 날려먹은 것도 박병호의 나이 36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무슨 돌고 도는 유전자의 저주란 말인가?
“돈 놓고 돈을 먹겠다고? 넌 세상 사는 게 다 그렇게 네 뜻대로 되는 줄 아냐?”
병호는 말하다 감정이 복받치는 듯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화장실 앞에 서있는 가영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가영의 코앞까지 다가온 병호가 가영의 등짝을 손바닥으로 후려치기 시작했다.
“낼모레면 40인 애가!! 앞으로 못해도! 한 40년은! 더 살아야 하는데! 한심하게! 벌써부터! 놀고먹을 생각이나 하고! 자빠져가지고!!”
느낌표에 맞춰 ‘찰싹’ ‘찰싹’하는 소리가 온 집안에 울렸다. 날벼락이 내려치는 것 같은 충격에 가영은 몸을 배배 꼬며 비틀었다.
“아야, 아빠! 잠깐만!”
가영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패닉에 빠졌다. 36년을 살면서 병호에게 이렇게 후드려 맞아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병호는 이젠 어금니까지 꽉 깨문 채로 찰지게 가영의 등을 때려대고 있었다. 가영의 체감으로는 이미 등짝이 부서지고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넌 아빠가! 뭐 때문에! 인생 망했는지! 진짜! 몰라서 그래?”
“아야! 그만! 그만 때려!!”
“딸년이고 뭐고! 당장!! 패서 쫓아내야!! 네가! 정신을!! 차리지!!”
“그만!!!! 그만해!!!”
쥐도 궁지에 물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등짝이 오그라질 정도로 처맞던 가영이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빠도 오늘 투자했잖아, 3천만 원!!”
“그거랑 이거랑 같냐? 그건 미래 가능성이 있는 구체적인 사업에 투자한 거고, 이건 그냥 아무 실체도 없는 도박판이잖아!”
“나도 미래 가능성에 투자한 거거든? 이거 나름 시총 7위라 안정적인…”
“웃기시네!! 완전 도박에 눈이 멀어가지고!!”
병호가 다시 손을 들어 올리자, 가영은 방어를 위해 무심코 팔꿈치를 치켜들어 병호의 손을 막았다. 잠깐 병호가 멈칫한 틈을 타, 가영이 조금 소심한 목소리로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 솔직히 나 요즘 인생이 너무 노잼이라 코인 한번 해봤어. 안돼?”
“뭐? 노잼???”
병호는 그 어처구니없는 말에 손을 한번 더 갈기려고 쳐들었다. 그러나 이내 절로 스르르 손에 힘이 풀리며 툭 아래로 떨구고 말았다.
뭐랄까, 전의 상실이었다.
인생 최초로 딸래미에게 손을 올린 병호도 나름 이 상황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아마 난생 처음으로 아빠한테 처맞는 가영의 입장에서도 그 충격은 동일할 것이다.
그런데 30대 중반이나 되어가지고.
사고 쳐서 아빠한테 처맞으면서도.
저렇게 말하는 딸년을 보니 뭔가 짠해서 뭐라고 할 수가 없다.
“솔직히 나 퇴사하고 뭔가 다 잘 풀리지도 않고. 쓰는 소설은 존나 망해가고. 나도 나름 불안했단 말이야.”
“…”
“그리고 내가 뭐 이거 나 혼자만 잘되자고 했나? 이렇게 투자해서 내가 이렇게 돈이라도 좀 벌면 아빠가 나 좀 덜 무시할 것 같기도 하고, 우리 가계에도 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내 나름대로는 진짜 우리 가족을 생각해서 투자한 거란 말이야.”
병호는 정말 몰랐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으로 평생 제 잘난 줄만 알고 사는 줄 알았던 박가영에게 저렇게 절절한 효심이 있었는 줄은.
그 효심을 깨닫게 된 계기가 다른 것이었다면 정말로 좋았겠지만 말이다.
병호는 기운이 쏙 빠져버렸다. 이젠 정말로 한숨을 쉴 기운 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 너 그거, 횡령인 건 알고 있냐?”
가영은 병호의 질문에 지가 불리하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상황에서 묵비권 행사라니 얼척이 없었다.
“금융 범죄라고. 뉴스에 나온다고 이거.”
“아니,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가영은 뭔가 억울한 듯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을 툭툭 터치하며 조작하기 시작했다. 바쁘게 어플을 켜고 이것저것을 누른 가영은 병호의 얼굴 바로 앞에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내가 돈을 잃었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지금 이렇게 벌고 있는데!”
거기엔 가영의 매입 단가와 현재 무나틱 코인의 시세에 따른 수익률이 표시되고 있었다. +17%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특히 이 무나틱 코인은 거의 예금이나 마찬가지니까. 스테이블 코인이라 다른 코인처럼 막 도박같이 하는 것도 아니고, 시총 7위라서 어느 날 갑자기 망할 일도 없다고.”
“시끄럽고, 당장 가게 현금 거기서 다 빼서 다시 통장으로 넣어둬.”
“… 당장은 어렵고.”
“뭐?”
“이게 스테이킹 해지하면 거래 가능해질 때까지 14일이 걸리는데…”
“그만.”
병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가영 쪽으로 손바닥을 펴서 올렸다. 그렇게 가영을 순식간에 꿀 먹은 벙어리로 만든 병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됐고, 거기 들어간 가게 돈 천만 원. 최대한 빨리 찾아서 넣어 놔.”
병호의 목소리에는 정말로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한 5년은 늙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앞으로 넌 가게 현금 정산 아웃이다.”
“…”
“박가영, 너 지금 공금 횡령으로 해고당하는 거라고.”
***
그날 이후 이틀이 지났다.
병호는 가영을 집에서 내쫓진 않았지만, 한동안 그녀와 말을 섞지도 않았다. 한 집에서 마주쳐도 두 사람은 서로를 거의 유령처럼 대했다.
가영은 공금 횡령으로 현금 정산 일에서 해고당했고, 당연히 더 이상 가겟돈을 횡령할 수 없었다. 가영으로서도 어차피 병호가 저렇게 질색팔색 하는 이상 더 시도할 생각도 없긴 했다.
병호는 도박에 대한 병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가영이 하는 투자가 도박이 아닌 투자라는 것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았다. 병호는 가영에 대한 배신감에 그야말로 부들부들 떨었다.
서른여섯 박병호가 도박에 빠져서 전재산을 날렸던 것은 그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가장 뼈저리게 후회하는 일들 중 하나였다. 그런 자신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 또한 딸인 박가영이었다.
박병호의 도박은 어린 박가영에게서 가족을 앗아갔고, 병호는 딸의 성장기를 고스란히 잃어야 했다.
박병호 일가의 비극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특히 가장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인 박가영이라면 절대로 절대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다. 박병호는 너무 서글픈 나머지, 일터인 식당에서도 좀처럼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급기야는 이 모든 게 다 한때 도박에 빠졌던 병호 자신의 실수를 박가영이 유전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허무주의적 운명론에까지 빠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가영의 횡령이 발각된 그 밤의 난장 이후 3일째 되는 날. 박병호에게 얻어맞아 시뻘겋게 부은 가영의 등짝의 붓기가 어느 정도 가라앉았을 때쯤.
박병호는 브레이크 타임에 식당 한 구석에 붙어 있는 벽걸이 TV를 켰다가 불길한 뉴스를 보게 되었다. 정확히는, 뉴스 화면 아래로 띠처럼 지나가는 단신 문구를 본 것이지만.
「시총 7위 무나틱 코인, 하루 만에 99.9% 급락… 충격에 휩싸인 투자자들」
병호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때마침 집구석에서 뉴스를 보고 있던 가영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지금 서로 다른 장소에 있었지만, 마치 싱크로를 일으킨 듯 같은 채널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각각의 장소에 있는 두 사람의 몸이 동시에 TV 앞으로 이끌리듯 기울어졌다.
한참을 TV 화면을 들여다보던 가영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무나틱?
그 무나틱?
내 무나틱?
...
에이, 설마.
그러면서도 가영은 슬금슬금 한 손으로 소파를 더듬어 어딘가에 내팽개쳐둔 스마트폰을 찾았다. 지문으로 황급히 잠금을 해제하고 코인 거래소 어플 화면을 켠 그녀의 눈에, 주식+코인 투자 역사상 최초로 보는 길이의 빨간색 음봉 막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선명한 빨간색이 마치 그것을 보는 가영의 심장에서 철철 흐르는 핏물 같았다.
어플 상단에 표기되고 있는 무나틱 코인의 개당 현재 시세는….
₩9.75 (-99.9%)
‘와, 좆됐다.’
그녀는 초조하게 눈을 굴리며 생각했다.
‘이거 소수점 앞에 0 하나, 아니 한 3개 정도는 빠진 거 아닌가? 어제 자기 전에 확인해 봤을 때 분명히 만원 대였는데?’
가영의 동공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그녀는 다급하게 MOONATIC Base에 있는 무나틱 코인 보유 금액 총액을 확인했다.
2천7백만 원의 0.1%가 얼마인지 아는가?
2만 7천 원이다.
그리고 이것은 박가영으로서도 살면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던 산식의 결과였다.
심지어 무나틱 코인의 몰락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추가적인 가치 하락이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었다. 스테이킹 해지를 기다리는 중인 가게 현금 … (구) 1,000만 원 (현) 1만 원은 살리지 못할 게 뻔했다.
「스테이킹 해지 대기 중」이라는 안내 문구 옆에는 D-10이라는 숫자가 야속하게 떠 있었으니까.
가영은 잠시 고민했다.
‘나머지 1만 7천 원이라도 찾을 가치가 있을까?’
섣불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일단 한숨을 쉬며 화면을 꺼버렸다.
그 사이 뉴스에서는 무나틱 코인의 역대급 폭락을 급히 편성된 속보로 보도하기 시작했다.
가영은 뭔 정신인지 모를 정신으로 화면에 멍하니 시선을 고정했다.
TV에서 뭐라뭐라 막 떠들고 있었지만 그런 것따위 하나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오직 이 생각 밖에 없었다.
어쩌냐.
나, 개털 됐다.
- 다음 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