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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 사유 Nov 25. 2018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어?

'이성 친구'를 정의하다

  문득 그녀의 발가벗은 몸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그리고 그녀와 키스하는 상상을 한다. 내게 묻는다.

  '그녀가 내 생각을 읽는다면 뭐라고 말할까? 과연 이런 상상을 해도 되는 걸까?'

  혼자 부정하고, 다시 그녀와의 대화에 집중한다. 나는 이런 사이를 이성 친구라고 부른다.


  친형은 이성 친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남녀 사이에 완벽한 친구는 없어. 분명 둘 중 하나는 호감이 있거든."


  그 당시 형의 철학은 내가 이성 친구에 관한 나름의 정의를 내리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물론 나는 조금 다르게 이해를 하고 있다. 혼자서 '그녀와 연인이 된다면······' 혹은 '그녀와 키스를 한다면······' 등의 가정을 세워보는 것이 '호감'의 부분적 정의라면 형의 의견에 일부 동의할 수 있다. 우리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어떤 의미로 호감을 이해하든 간에, 호감이 일었던 사이는 친구라 부를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연락하고 지내는 이성들은 친구가 아니고 무엇인 것일까?


  방송작가라는 직업은 성비가 전혀 맞지 않는다. 나는 작가로 일을 하며 나 이외의 남자 작가는 단 한 명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회사에서 만난 동료 작가들은 동생이면서, 누나이고, 동갑이었지만 크게 보면 모두 '이성 친구'라는 그룹으로 묶여 있다. 만약 성적 호기심을 느끼지 않아야 진정한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작가로 일하면서 어떤 친구도 사귀지 못한 게 된다. 그건 정말 억울한 일이다. 내 생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지 모르겠다만, 외톨이로 남지 않기 위해 정한 나만의 '이성 친구관'에 대해 얘기하고 싶다.


  빅토리아 시대(1837-1901)에는 성충동을 경멸했으며, 출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섹스는 건강한 성행위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성적 욕구를 품고 살며, 그건 빅토리아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성적 욕구를 자신만의 문제라 믿고 어느 누구와도 마음 터놓고 욕구를 공유하지 못했다. 자신의 아내, 아들은 그러지 않을 것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은밀한 섹스 중독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적 억압은 그들을 환자로 만들었다.


  몇 년 전까지 JTBC에서 방송했던 '마녀사냥'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던 성적 욕구에 대한 언급. 시청자들은 분명 '마녀사냥'을 보며 묘한 해방감을 느꼈을 것이다. 우리는 아닌 척했지만, 얼마 전까지 빅토리아 시대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트는 환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공개적이고, 건전하게 섹스에 대하여 얘기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렇다. 나의 성적 호기심에는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는 얘기를 해봤다. 밑밥은 이 정도로 하고, 다시 친구 얘기로 넘어가 보자.


  친구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적절한 나이 차이. 둘째로는 일정 부분 맞아떨어지는 생각의 교집합. 두 가지 모두 해당되는 사람과 지속적으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때, 우리는 그를 친구라고 부른다. 그럼 이쯤에서 다시 고민해봐야 한다. 성적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매력적인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가 나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으며 생각이 비슷하다면? 


  "같이 길을 걸을 때 부끄럽지 않으면, 그 남자랑은 이성 친구가 될 수 있어."


  어떤 이성 친구는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누군가에게는 성적 매력 또한 이성 친구의 척도가 되는 마당에, 원치 않게 특정 상황을 상상하게 되는 것이 뭐가 문제냐는 말이다. 생각은 제어할 수 없다. 그래서 규제할 수 없다. 이러한 생각을 제한하기 시작하면 연역적 체계에 의해 우리의 연애나 그 외의 다른 사생활들도 침해당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러한 사회를 '전체주의'라고 말한다. 

 게다가 친구라는 관계는 성적 호기심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성적 매력'과 '이성 친구'는 구분해서 이해해야 한다. 전자는 인상이 주를 이루고, 후자는 인성이 주를 이루는 엄연히 다른 개념의 문제다. 둘 중 하나만 존재할 수도 있지만, 병행할 수도 있는 것이다.

  

  성별을 떠나서, 나와 꾸준히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부분이 있다. 그리고 이성 친구의 경우에는 그 부분이 더 쉽게 촉발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급히 생각을 떨쳐내고, 하던 얘기에 집중하는 것 말고 없다. 여태껏 이 점에 대해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던 이유는, 키스나 섹스와 같은 행위는 '연인의 역할'이라 믿는 사회에서 통용되는 일반적인 도덕적 규범 때문이다. 나는 그저 친구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네게서 성적 매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라는 말보다야 좀 낫지 않나 싶은데, 나머지는 이성 친구들의 판단에 맡기고 싶다. 그들이 불편했다면 뭐 어쩔 도리가 있나. 


  내가 내린 '이성 친구'에 대한 정의를 장황하게 설명해봤다. 이해를 바라고 쓴 글이지만, 나의 이성 친구들은 이 글을 보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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