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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 사유 Aug 01. 2020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

바꿀 수 있어도, 바꿔서는 안 되는 것

  그가 몇 달 전 홀딱 반했던 이 여자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에게 무척이나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기 삶에 있어서 그녀에게 그녀 자신의 자리,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순수한 영역을 비워주려 애썼다.


 -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한 달 전에 동묘에 옷을 사러 갔다가 b사의 중저가 블루투스 스피커를 발견했다. 전부터 눈여겨보던 스피커인지라 졸고 있던 아저씨에게 가격을 물어봤는데, 큰 거 다섯 장을 불렀다. 사장님 이거 정가가 4만 원인데요? 음... 어... 이건 버전이 다른 거야 버전이. 나는 사장이 애초에 본인이 팔려는 제품이 스피커인지, 라디오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날은 썩 마음에 드는 옷도 없었고, 그래서 집으로 돌아올 때 내 손에 들려 있는 건 헌책방에서 산 SF소설 한 권이었다. 워낙 오래된 탓에 절판된 책이었는데, 어찌 내 눈에 들었던 게 나름의 수확이었다.


  나는 예전부터 저렴한 가격에 독특한 구제 의류를 구하기 위해 동묘를 돌아다녔다. 그러나 지금은 워낙 이곳을 찾는 청년들이 늘기도 했고, 대부분의 옷가게에 장사치가 상주해 있는지라 발길이 좀 뜸한 편이다. 그래도 가끔씩 동묘에 가서 먼지 쌓인 물건들을 뒤적거리다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이상하게도 이제는 예쁜 옷보다 낡은 옷에 눈이 가고, 새 책보다는 누군가 밑줄을 그어놓은 빛바랜 헌책이 끌린다. 누군가가 닳고 닳을 때까지 입고 읽었던 것들은, 그 나름대로의 매력을 이미 인정받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요즘은 다들 PC주의(Political Correctness)에 빠져 무언가를 고치고, 바꾸려 들기 바쁘다. 적어도 2018년 한 해 동안만큼은 PC주의가 '올바름'에 대해 그럴듯한 기준을 세워주지 않았나 싶다. 그런데 어느샌가 내 입맛대로 사람을 재단하고 줄 세우는 행위로 변질됐고, 결국 말만 번지르르한 약아빠진 단어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는 '자존적 올바름'(Self-respecting Correctness)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주워들은 모든 것이 자신의 가치라 믿는 자기 교만의 끝판왕들이 인간관계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이다.

  참 아쉬운 건 내가 그렇다는 것이고, 사랑을 찾을 때도 그러한 잣대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SP주의'의 잣대를 앞세워 사랑을 찾아다니는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이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다.


  동묘에서 찢어진 옷을 사면, 옷가게 직원은 이런 말을 한다.


  원래 이 옷은 이 정도 대미지가 있어야 더 예쁜 옷이에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구멍 난 옷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면서, 이상하게도 사랑을 만나면 우리는 사랑의 흠을 메꾸려 한다.  그러나 힘내라는 말이 힘을 주지 못하듯이, 이해한다는 말이 이해를 부르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가 갑자기 왜 우는지도 모르고, 갑자기 왜 화를 내는지도 모른다. 왜 이렇게 비뚤어졌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런 그를 보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런데 보통 나의 경우에는, 그녀가 그런 사람이라는 게 사랑의 이유였다. 어찌 보면 내게 필요한 건 그녀를 바꾸려는 노력이 아니라, 나로 인해 그녀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나를 바꾸려는 노력이 아니었을까.


  나는 언제나 내 사랑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보다, 내가 그로 인해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즐거웠다. 앞으로 다가올 나의 사랑은 그대로 두자. 생채기가 날 대로 난 그녀는, 이미 그녀 나름대로의 사랑을 해온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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