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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유하는 사유 Oct 21. 2020

살신성인을 바라는 나의 애인에게

모든 것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사랑할 수 있는 걸까?

  남자라면은 누구나 자기 여자에게 사치스러운 아름다움을 주고 싶어 해. 옥상에서 빨래를 너는 니 옆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 알고 있어도 그래. 오늘은 니 생일이잖아. 니 생일.


UMC - '가난한 사랑 노래' 中


  어려서부터 다시 태어난다면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이를 낳고 아버지가 됐을 때, 내 아이에게 장애가 있거나 누가 봐도 예뻐 보이지 않는다면 나는 과연 내 아이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9개월간 아이를 품고, 가장 가까이에서 체온을 나누는 여성의 모성애가 부성애보다 끈끈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나는 내 아이가 어떻든 간에 사랑하고 싶고, 그래서 임신을 위해 여자가 되고 싶었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선망하는 이들은 애인에게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큰 편이다. 그리고 그들은 연애를 할 때마다 항상 본인의 선택에서 찾아오는 죄책감에 몸부림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선망한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일에 인색하다는 말의 반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도 선택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스스로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결국 혼자 골방에 틀어박혀 자책하고, 자학하고, 본인의 처지를 핑계 삼아 자위하게 된다.


  나는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는 한다.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 애인의 다급한 호출에 뛰어나갈 수 있을까. 혹은 애인의 생일날, 그녀가 즐거워할 모습만을 상상하며 지갑을 탈탈 털어 값비싼 선물을 건네줄 수 있을까. 그럴 때마다 나의 대답은 '그럴 수 없다'였다. 나는 항상 나의 것을 내려놓는 일에 서툴러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서툴렀다. 육신을 갖고 태어나 '신의 사랑(Agape)'을 갈구하고 쫓으려는 노력이, 오히려 나를 무력하게 만들고 그때를 노려 나의 가랑이를 찢어놓았다. 그래서, 나는 사력을 다해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안위가 너무나 중요해서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다시 생각해보려 한다. 내가 이상적인 사랑의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무조건적인 헌신'이었고, '무조건적인 사랑'과는 별개인 것이라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내가 무너지지 않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나의 것을 남겨두어야만 한다고. 나의 사랑이 내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길 바라지 않듯이 그녀 또한 내게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최근에는 조금 달라졌을 수 있겠지만 일본에는 '조토(贈答) 문화'라는 것이 존재한다. 누군가의 선물을 빚으로 생각해 빠른 시일 내에 답례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값비싼 선물보다는 상대방에게 부담을 지 않으면서 의미 있는 선물을 하는 게 당연하게 여겨진다. 나의 사랑 또한 그렇다. 부담 없이, 나를 가장 나답게 해주는 이가 나의 사랑이다. 내가 조심할 건 내 것을 남겨두는 일에 당위성을 갖고 나의 것을 아까워하는 마음이 커져가지 않도록, 그 경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했어도


  나의 것을 모두 벗어줘도 아깝지 않은 사랑이 찾아왔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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