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더럽히지 마세요
나는 물티슈를 찾았고, 그녀는 담배를 찾았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봤고, 그녀는 좋아하는 만화영화를 봤다. 나는 계속 어둡길 바랐고, 그녀는 일어나 불을 켰다.
우리의 섹스는 사랑의 연속선상에 있던 것인가, 아니면 대상이 서로였을 뿐인 것인가.
스무 살 때, 소개를 받은 적이 있다. 우리는 주선자 없이 역전 카페에서 만났다. 나는 그녀에게 전날 저녁에 알아본 몇몇 데이트 코스를 읊어줬다. 영화를 보면 무조건 잠이 든다고 해서 영화관은 탈락, 밥은 먹고 왔다고 하니 식당도 탈락, 이미 커피를 마시고 있으니 카페도 탈락. 탈락, 탈락, 탈락. 그녀가 원하는 곳은 따로 있었다.
“술 마시러 갈래요?”
“좋아요”
그녀가 자주 간다던 근처 룸술집에 들어가 마주 보고 앉았다. 소주병이 세병이 넘어갈 즈음, 우리는 서로 말을 놓고 첫 만남과 어울리는 가벼운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한창 대화를 하다가 그녀는 에어컨 바람이 너무 세다며 내 옆에 와 앉았다.
“내 팔 좀 만져봐.”
나는 조심스레 그녀의 팔을 만졌다. 에어컨 바람을 계속 맞고 있어서 차가워진 팔. 그녀가 입고 온 스트라이프 원피스는 너무 짧고 얇았다. 스무 살의 나는 지금보다 눈치가 없던 놈이라 담요를 가져다 달라하지 않았다. 덮어줄 겉옷 또한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살갗이 닿을 만큼 꼭 붙어 앉아 있었다.
“허벅지도 차가워.”
그녀의 허벅지에 손등을 대고 잠시 있었다. 차갑네. 속에서부터 역한 술냄새가 올라왔다.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그 말이 왜 이리 듣기 싫었을까.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말로 들려서, 더더욱 집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술집을 나와 함께 택시를 탔고, 그녀의 집 앞에 내려 작별 키스를 하고 헤어졌다. 그녀는 내게 전화해 자장가가 듣고 싶다고 했다. 잘 자라 우리 아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순수한 사랑'은 어디에 있는 것일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는 로맨스를 꿈꿨다. 오랜 시간 손을 잡고, 천천히 떨림을 느끼며 입술을 맞추는 꿈. 섹스를 사랑의 마지막 종착역이라 믿고 지나오는 모든 풍경을 구경하고 싶었다. 나는 그녀와의 술자리를 창문이 없는 급행열차쯤으로 치부해서, 만남을 후회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그녀는 아주 순수한 사람이었다. 둘 중 한 명을 비난해야 한다면 나를 비난하는 게 옳다. 어떤 연인은 자신과 헤어진 뒤에도 많은 여자와 섹스를 해봐야 한다며 내게 조언해줬고, 친구는 혼전순결주의자야 말로 섹스를 가장 문란하게 생각하는 이들이라고 말했다.
섹스는 사랑의 과정이 아닌 욕구를 해소하는 과정이다. 때가 되면 찾아오고 채워지면 사라지는, 그리고 다시 찾아오는 욕구를 해소하는 하나의 방식. 그것은 행위에 불과하며 섹스를 사랑의 일부로 끌어오는 과정에는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불어넣는 연인 간의 노력이 있다. 식사를 하며 상대방의 입술을 닦아주고 고기를 대신 썰어주는 것처럼, 발가벗은 몸이 다치지 않게 쓰다듬어주고 끊임없이 눈을 바라보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섹스는 의미를 갖는다.
내가 그녀를 순수하지 않다고 판단한 이유는, 섹스를 순수한 사랑과는 대비되는 행위로 바라보고 임의로 노력을 생략해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첫 경험이 환멸만을 남기고 사라질까 두려워 택시를 잡았다. 욕망을 마주 보지 못했던 겁쟁이. 내 뒷모습을 지켜봤을 그녀를 생각하니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다.
오늘은 알몸으로 이불을 덮고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싶다. 옆에 있는 사람과의 사위를 복기하며 다시금 얼굴을 붉히고, 부끄럽다는 듯이 웃고 싶다. 그리고 옆에서 나와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