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별을 떠도는 노마드 플라뇌즈

여행덕후에서 에세이스트가 되기까지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이제라도 여행을 좀 해보는 거야. 이제라도.


늦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정신수양에 집중했던 시간이 있었다. 거의 처음으로 모든 것에서 자유로웠던 순간에 바로 여행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그러고보니 한때는 2012년 새해, 서른이 되는 이 순간을 뉴욕에서 맞는 꿈도 꾸었다. 그때는 나 자신이 욕망의 집결지라서 이 꿈을 쉽게 이루지 못할 걸 알았지만 그래서 그런 희망사항이 더욱 절실했다.


진짜 여행의 시동이 걸렸던 계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춤이었다. 새로운 스승을 찾던 중 해외 공연이 내정된 팀을 발견했다. 그날의 결심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이십 대에도 해외 공연을 한 적이 있고 그게 유일한 해외 여행이었으나 외환위기 때문에 스페인행을 포기하면서 5년 동안 여권을 묵혔다.


그러니까, 글로벌 댄서는 이미 이룬 꿈이었는데 그 정체성을 잊고 있다가 아, 이제 회사가 날 때려 죽여도 공연하고 여행가야겠다, 라는 생각에 도달하자 새삼스럽게 재발견한 것이다.


인간의 망각 속도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여행을 떠나는 것도 시간이 나서 하는 게 아니다.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2018년까지는 뉴욕 땅을 밟겠다는 목표가 이미 있었다. 여권 만료일과는 상관없는 계기로 결심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첫 번째 여권의 만료일이 2018년 가을이었다.


그 여권으로 2014년에 처음으로 혼자 출국해서 도쿄의 공연장을 찾아갔다. 모든 것이 그렇듯, 처음이 어렵지 그 다음은 쉽다. 말 안 통하는 일본에서 길찾기에 성공한 후 자신감이 폭발했다.


그로부터 2년 후 뉴욕 왕복 항공권을 50만원대에 득템했다. 여권 만료일도 2년이나 남아있었지만 전자여권이 필요해서 재발급받았고, 두 번째 여권의 만료일은 아직도 3년이나 남아있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달 살기를 할테다.


일본에서 24시간도 머물지 못했던 서러움이 폭발했다. 여행 자체는 고생스러운 면이 많았으나 귀국을 미루면 미루었지 앞당길 의사는 없었다.


미국 대선을 앞두고 있어서 여행 전에는 CNN을 틀어놓고 작업했다. 오바마가 살던 백악관에 다녀와서 트럼프가 당선되는 날 집에 왔다. 머나먼 귀국길에 오르기 전, 지인이 한 명도 없는 보스턴에서 스피킹이 폭발했다. 국내에서는 클럽 통역 담당이라 이게 큰 사건은 아니었다.




진짜 사건은 내 영어를 정체시킨 어휘력을 리부트한 것이다. 그때까지 한 번도 완독한 적이 없었지만 과외하려고 사두었던 수능단어장(은 원래 완독하는 것아 아니지만)의 예문 1000개를 모두 필사했다.


대학영어, 그 중에서 모르는 단어는 영영사전, 데일 카네기 원서. 나에게는 과학 교과서보다 어려웠던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거의 열 번쯤 읽었다.


그러는 동안 오사카도 다녀오고 짐바브웨도 다녀오느라 진짜 2018년에는 국제선 보딩만 12번 했다. 내게 이런 날이 올 줄이야! <라이온킹> 인터네셔널 투어(당연히 영어다)로 시작한 2019년, 다시 미국에 갔다. 미국에서 할 수 있는 것에 비해 해 본 것이 너무 없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A5사이즈 여행계획 바인더를 만들었다.


조직업무에만 J를 발현하고 그러다 종종 번아웃이 되는 천상 P인 내가 뉴욕과 워싱턴 재방문을 포함한 두 번째 한 달 살기, <무한대 미국일주>를 다녀오기 위해 바인더를 만든 것이다.


생각해보니 최초의 유럽 여행 계획은 중학교 시절의 레포트(바인더는 아니지만 구성이 알찬 소책자)였고 그 테마로 초등 영재 융합 교재(내부용이라 출판하지 않음)도 직접 만들었다.




서른의 뉴욕이라는 막연한 꿈이 존재감도 없이 사라졌으나 서른 여섯의 뉴욕이라는 완전 구체적인 목표는 조기 달성했을 뿐 아니라 거의 기간 내에 2회 반복했다. 서른 넷의 첫 번째 한달살기와 서른 일곱의 두 번째 한달살기-그 정중앙에 데드라인이 있었고 이 중점으로부터 실제 여행 날짜가 앞뒤로 약 18개월이다.


여기까지는, 아주 성공적이다. 다음 목표는 파리와 영화블로거(정확하게는 유튜버)로 정했다.


<레베카> 취케팅으로 시작한 2020년, 파리도 유튜브도 팬데믹에 치여 없던 일이 되었지만 <파리 가이드북>과 최종 목적지 MIT의 사진을 인스타에 올렸다. 너무 저렴해서 언젠가 사두있던 인생책 <밀레니엄> 영어판을 우연히 펼쳤는데, 앞부분을 다시 읽자니 어느 틈에 꽤 많이 읽어두어서 읽던 곳을 마저 읽다가 리딩(과 인스타그램)이 폭발했다.


원서읽기, 라는 인생목표(이 시점에서 MIT로 업그레이드 돼버렸지만)를 이룬 셈이다. 그동안 참았던 독서 욕구(와 인스타그램)도 폭발했고 서평을 쓰다보니 쓰는 분량(과 블로그)도 폭발했다.


대학원 시험인 GRE 영어 포스팅을 120일 동안 매일 했는데 살짝 번아웃이 왔다.




역병이 절정에 달한 2022년 3월부터 지금까지 일년동안 하루에 평균 2천자-인스타그램 캡션의 허용 분량만 썼다. 퇴고할 때 2만자(실제로 브런치에 와서 10-100% 증량된 글이 많고, 그래서 챕터도 많은 내 브런치북 두 권은 초고가 그랬듯 허용 분량을 가득 채웠다.)가 될지라도 주로 이전 스토리에서 이어지는 새 글을 2천자만 쓰는 건 힘들지 않았다.


새로운 주제는 이미 쌓여있다. 이걸 우선순위로 하면, 그러니까 모닝루틴으로 이 냅킨에세이를 매일 쓰면, 100일에 200,000자, 책 한 권을 쓸 수 있다.


매년 책 세권을 쓸 수 있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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