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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덕후 한국언니 Jun 17. 2023

루틴 강요하는 사회와 불규칙수면

못 자고 못 일어나는 사람 여기 붙어라

잠이 항상 부족한 상태라면 잘 수 있을 때마다 잠을 보충하고, 때에 따라서는 잠도 몰아서 잘 수 있다. 다른 모든 것들을 몰아서 할 수 있듯이. 하지만 돌림노래처럼 잠들지 못하는 이야기는 곳곳에서 튀어나올 예정이다. 때이른 소나기가 오는 것 같다. 어제는 예정보다 많이 걸었고, 최근 3년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 걸었을지도 모른다. 피곤함을 억지로 참은 것이 아니라, 행복에 취해 피로를 덜 느꼈고, 그래서 비와 함께 뒤늦은 피로가 몰려오고 있다.


피로를 견디지 못하는 몸으로 바뀌면서 초능력이 사라진 초능력자처럼 일상을 조심스럽게 살아가느라 두배로 피곤했다. 여행 중에는 행복 호르몬 덕분에 그럭저럭 괜찮았고, 그리 행복하지 않아도 바뀐 공간 때문에 적어도 첫날은 잠을 설쳤다.


그래서 시카고 둘째날 새벽산책을 했고, 2년 후 부산에서는 파도소리와 함께 폭풍 타이핑을 했다. 산책도 여행도 쉽지 않았던 무수한 날들은 피로조절 불가 상태였다. 이론서나 단어장을 정리하면서 공부를 엄청 하거나, 눈뜨자마자 3초 출근해서 폭풍 타이핑을 하면 16시간쯤 후에 잠들 수 있다. 그러다 가끔 피곤에 절어 늦잠을 자고, 그러다 자는 시간을 놓치면 그때부터는 불면증과 전쟁이다.




잠이 부족한 상태로 나돌아다닐 기력이 없어서 병든 닭 모드로 빈지왓칭을 하거나 인스타그램 피드를 무한 스크롤하게 된다. 기력이 있어도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장벽때문에 굳이, 돌아다니지 않았고 1-2주 정도 칩거를 하면 갑자기 방탈출 욕구가 솟구쳐서 서점에 갔다. 대상포진과 코로나 사이, 10개월만에 모든 것을 잃었다. 그 해 미국여행을 못했다면, 이라는 상상은 너무 끔찍하니까 하지 않겠다.




여전히 뜬금없는 시간에 잠이 깨고, 그 시간이 한동안 습관처럼 나를 깨우고 보다 상쾌한 아침을 위해 억지로 더 자는 날도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코로나 이후 반 년 동안 분노의 타이핑과 분노의 스크롤을 한 결과, 잠을 어느정도 자고 나면 자동으로 몸이 움직인다. 복수심에 읽고 쓰던 루틴이 그냥 갓생 루틴이 됐다. 여기에 별 것 아닐수도 있는 자극 하나가 추가되었다. 특정 연령(숫자는 자극적이라 생략함) 이상인 사람들은 잠을 특정 시간 이상 많이 자면 뇌세포가 죽는다는 기사를 봤다. 예전처럼 많이 자고 뿌듯해하고 싶지 않아졌다. 너무 많이 자는 것도 우울증의 일부인데, 불면증이 잠잠할때는 밀린 잠을 잔다는 핑계로 다음달의 잠까지 미리 잤던 것 같다.


지금 보니  기사는 후킹이고 나는 낚였지만, 덕분에 3처럼 5-7시간만 자고 불면보다 졸음참기를 견디는 중이다. 이게 낫다. 일도  많이 하고, 할수록  하고 싶어서 잠을 줄인 것도 즐기는 . 유의미한 환전을 (아직까지는) 기대하지 않고, 오직 나의 입지를 위해 뭐라도 쓰되 (아직까지는) 무료배포하고 있어도 잉여감은 크게 희석됐다. 나 글쓴다!


사업 실패 이후 분노의 공부, 를 했지만 뚜렷한 목표가 없었다. 대학원 가려면 학부 재입학을 해야하는데 그러려면 GRE, 토플 전에 수능을 봐야 하고 그게 요이땅이 쉽지 않았다. 취미생활로 읽히는 사진놀이 말고 이걸 한다고 말할  있는 , 커리어 비슷한 것 생기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마음을 졸였던지.




갈 곳이 없어서 그랬던 걸까? 여행 첫 날, 하루 못 자는 거야 낭만일 수 있다. 그러나 한 달에 일주일 이상 불면증과 의도하지 않은 미라클 미드나잇에 시달리면 나머지 날들은 지나치게 많이 잤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이 증세는 특히 밤잠을 놓치고 오전 내내 깨어있을 때 가장 심하다—일을 많이 하면 좋지만, 항상 그럴 수 없다. 그 피곤함에 복수하듯 나머지 기간에 미친듯이 잤는데...


갈 수 있고, 가고 싶은 곳이 많았다면 어땠을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돌아다니고 싶다는 욕구가 어색했다. 아주 많이 돌아다녔던 삶을 살았기에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는 집에 있어도 그 정적인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집에 있고 싶은 상태와 집에 있어야 하는 상태가 만나서 3년 동안 집에 있어보니, 매우 답답하면서도 나가면 금방 피곤해서 돌아오게 된다.


돌아다니는 행복과 돌아다니면서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행복, 사소한 디테일에 제약이 걷히면서 칩거와 불면으로 쌓인 피로를 억지로 버티지 않고 즐길 수 있는 상태를 오랜만에 경험했다. 그동안의 소극적인 루틴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여전히 다른 사소한 디테일에 제약이 있지만 이전과는 다른, 그렇다고 대과거로 복귀하지도 않은, 제 3의 상태가 되었다. 잠들기 힘든 날은 언제고 찾아오겠지만 이제 일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의도치 않은 미라클 모닝, 또는 늦은 미라클 이브닝이라도 꼬박꼬박 출근(커피를 들고 책상에 앉아 업무를 개시)하는 이유는 누가 시켜서도, 잘릴까봐 겁나서도 아니다. 나는 잘리지 않기 위해서 뼈를 깎는 노력을 했고, 잠들기가 그토록 힘든 만큼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오로지 내가 스스로 계획한 일을 계속하기 위해 일어나는 아침은 사명으로 충만하다. 그 맛을 알면, 절대로 남을 위해 내 시간을 내주지 않게 된다. 내가 타인을 위해 시간을 쓴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내 시간의 가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지 않다, 라고 확신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주도해도 되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다. 왜 누군가는 리드하고 누군가는 팔로우를 해야 하지? 팔로워가 없으면 리더도 없다. 그걸 아는(outsmart) 팔로워는 리더를 리드한다.


그런 이들, 혹은 대세를 따르는 척 하면서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고 사고치지 않고 적당히 묻어감으로써 내게는 꿈만 같은 '평균적인' (그보다 많았던 적도 있었지만 그런 고임금은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일시적인 성과급인 경우가 많음) 급여를 꾸준히 벌어가는 사람이, 주도하지 않음으로써 '취할 수 있는 이득을 취하는' 입장을 아싸인 내가 배려해야 할까? 나는 충분히 이단으로 살면서 고통받았다. 9시 정각에 출근해야 했던 적은 별로 없지만, 그와 비슷한 시간에 일정하게 출근하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다.


그걸 잘 하고, 그래서 나보다 풍족하게 사는 사람들은 걱정하지 않겠다. 이들의 품위 유지비나 융자는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는 안정적인 수입도 아마 평생 없을 것이고, 목돈이 생긴다면 크고 작은 생활비로 쪼개지거나—안 쓰고 버틸 때는 아무도 모르지만 쓰게 되면 나 혼자 조용히 행복한 그런 품목이, 책 한 권(그게 이 책이다)에 담길 정도로 아주 많다—여행을 갈 것이다. 조직이 정해준 루틴에 따르는 댓가가 아무리 커도, 그 '따르는' 행위에 딸려오는 홧병의 규모가 더 크다. 약값이 더 많이 나온다. 그냥 다른 노력을 해서 내 시간을 내가 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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