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시작 못한 인생>
공감의 기본은 역지사지다.
소위 옛날 분들은 장애인과 반려동물을 비하하는 어휘를 구사한다. 좀, 입장 바꿔 생각 좀 해보시면 안되겠냐고 묻고 싶다. 당신 딸이 다운증후군인데 남들이 그렇게 말했으면 좋겠어? 공감을 하고 공감에 대한 충분한 표현을 해야만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기 생각만 하고도 한 시절을 잘 통과한 사람이 있다. 그대의 출생연도와 성별은 부차적인 요소다. 되게 중요한 것 같지만, 잘 따져보면 그대의 포지션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소는 세습된 계급과 성취가능성, 즉 너의 근성이다.
의지와 노력으로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잘못된 의지와 노력도 있고, 태생적 한계가 있다. 사람들은 내가 너의 조건이었다면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쉽게 한다. 나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각자의 조건과 성격은 당사자만 알 수 있는 조합이다. 대부분의 경우 당사자도 모른다.
내가 남들에게 바닥을 깔아주는 성적이나 커리어를 갖게될 지 누가 알았겠는가? 내가 부르주아 학교에서 한없이 작아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나만 몰랐을 수도 있다. 내가 성장한 환경이 대단치 않았고, 여기서 아무리 내가 이 구역의 블레어라고 외쳐도 그래봐야 우주의 먼지다. 환경이 조금만 바뀌어도 금방 초라해지는 변방의 프린세스다.
세계의 중심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왔다. 그다지 할 일도 없는데 서울을 떠나지 않는 이유. 더 좋은 장소가 많은데 뉴욕에 집착하는 이유. 무엇이 그토록 중심성에 목숨걸게 하는 것일까. 중심을 차지해본 적이 없는 소박한 삶의 향기를 알면서도. 중심에서 물러난 해방감을 더 사랑하면서도.
내 낭만적 은둔은 다시 돌아오기 위함이었다.
미쳐버린 광대, 고담의 조커도 하나의 페르소나, 슈퍼 인싸라고 허세를 부리는 동네 슈퍼에서 쇼핑 라방하는 관종도 하나의 페르소나. 조커도 관종이라는 점에서 나를 관통하는 한 단어는 관종인가. 부정하지 않겠다. 관종이면 뭐 어때.
나를 양육하는 셀프 양육자 입장에서 끝없이 관심과 의지와 노력을 퍼부어도 나는 쉽게 만족하지 않는 먹성을 지닌 블랙홀 같은 욕망의 백화점이다. 내가 예뻐지지 않으면 평생 예쁜 사람들을 미워하게 될 것을 알기에 최선을 다해 나를 예쁘게 키웠다. 내게 타고난 식스센스가 있다면, 조상의 언행에서 미래를 본다는 점이다. 그런 사람들을 가끔 만난다. 거울에서 조상님을 만난 사람이 내가 처음은 아닐테니.
지능에 대한 컴플렉스는 짧은 일생을 바쳐 영어라는 거대한 장벽을 등반하고 난 후 멀리멀리 날아간 손수건처럼 사라졌다. 이 장벽이 한국인을 가로막고 있다. 투덜대지말고 그냥 하는게 낫다. 나는 35년을 바칠 각오로 매달려서 3.5년만에 등정했다. 평생을 걸고 해보지 않았다면 투덜대지를 말던지.
모두의 모국어는 완벽하지 않다. 외국어를 현지인만큼 하고 싶은 나머지 그걸 기준삼아 비교하면 의욕만 꺾일 뿐이다. (어차피 안 돼.) 모국어처럼 하게 된 사람도 있지? 그 사람의 재능을 시기하지 말고 인품을 봐. 외국어를 자기 입에 붙인 사람 치고 공감 능력 떨어지는 사람 없더라. 한국어로 모르는 단어를 영어로 뱉을 수 있겠니? 한국어에 없는 단어를 습득하려면 영영사전을 자유롭게 횡단할 수 있어야 해. 그건 곧 같은 언어 안에서 얼마나 설명을 잘 이해하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느냐에 관한 문제가 되거든.
부러우면 너도 해.
이게 정답이다. 칭찬의 의미로 부럽다는 말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다. 나도 그냥 멋지다고만 해야겠다. 상대방이 정말 내가 부럽나? 나를 질투하나? 라는 오해를 하면 안되니까.
내가 너무 아메리칸 스타일에 물들었다. 주로 미국에서, 질투를 빙자한 칭찬으로 언어유희를 한다. 질투가 날 정도로 예쁘다, 뭐 그런. 하지만 한국인의 질투는 정색한(?) 질투인 경우도 있고 행간에 숨어있기도 하다. 워낙 숨겨두어서 들춰내면 또 정색한다.
"나 질투나!"
이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도 아마 실제로 질투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워킹맘, 워킹대디 출간 작가가 부러웠다. 그런데 진심을 들여다보면, 부럽지 않다. 부러우면 당장 애부터 만들어야 하는데, 그건 아니지. 부럽지 않은데 부럽다고 여기는 것은 질투일까?
그들의 의지와 노력을 본받고 싶은 걸까, 의지와 노력을 하지 않고 그들의 성취만 부러운 걸까? 타인의 알고 싶지 않은 사생활까지 밀접하게 노출되는 시대에 나의 심리를 정확하게 아는 것은 중요하다. 나도 나를 모르지만 남은 나를 더 모른다. 오지랖은 사양한다. 당신의 통찰력이 진정 훌륭하다면 웨이팅 맛집이 됐을 것이다. 나는 내가 선무당이라고 말하지만 오지랖은 줄여야겠다. 갱년기의 징후일까? 참을 수 없는 오지랖 호르몬이 흘러넘치는 날이 있다. 대부분 귀찮아서 잊어버리긴 하지만.
내 말을 믿을 근거는 없다. (가끔 있다.)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내 세계관에 따라 반응한다. 내 뒷면을 뒤집어 보여주고 싶을 때가 있다. 네가 나를 부러워하는 모습이 가끔 불편해. 나는 내 의지와 노력으로 성취했는데 너는 의지도 노력도 없잖아. 부러우면 너도 해.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