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시작 못한 인생>
가장 오래 다닌 회사도, 내 피를 가장 많이 빨아먹은 회사도, 마침내 사회생활의 법칙을 통달하고 사표를 내던진 회사도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 평생 불완전할 것 같은 고용기간 20년 중 고용보험을 통해 증명이 가능한 재직 경험은 단 2개월. 그렇다고 20년 내내 아르바이트를 하지는 않았다. 주로 공부하고 가끔 알바를 하거나, 주로 과외하고 겸사겸사 수능 공부를 하려다 못하거나, 주로 회사에서 피를 빨리고 수입이 부족해서 알바까지 하거나.
그 모든 것을 번갈아서 하거나.
원래 알바몬의 알바 경력은 순탄치 않다. 때로는 승진이 빨라서 어리둥절하지만 때로는 성수기가 지나자마자 해고를 당한다. 과외를 의뢰한 학생의 엄마가 '그냥 싫어서' 수업 한 번만 하고 자르는 경우도 있다. 그 한 번의 수업료는 에이전시에서 차감할지라도 내 손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냥 싫어서, 갑의 언어다.
여행 준비를 어느 정도 하고, 다시는 노비처럼 일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시즌 2가 끝났다. 굶어도 취업하지 않겠다며 셀프고용한 메이커 겸 마케터가 되어 가내수공업을 했다. 파트타이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 정규직에 가까운 풀타임 아르바이트는 하지 않았다. 홀로 일어설 도움닫기 시공간이 필요했는데 풀타이머 신분으로는 불가능했다.
책 쓰는 직장인, 워킹맘과 워킹대디들은 놀랍다. 어쩌면 워라밸을 통해 자신에게 투자하는 시간을 확보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셀프고용기간을 제외하면 워라밸이 좋았던 적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든 회사에 피를 빨리고 음주가무를 통해 수혈받았다.
소속이 확실한 명함이 탐날 때가 있었다. 고개를 가로저어야 한다. 정말 그게 탐나는 거냐고 물어야 한다. 그냥 명함을 파.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남들과 깔맞춤 한 명함을 탐내는가.
묻어가지도 못할 거면서. 묻어감을 결심하고 3초 만에 관종이 될 거면서. 프리랜서 명함을 주문한 적도 있었고, 캘리그래피로 셀프 제작한 명함을 사용한 적도 있었다. 급할 땐 예전 명함의 전화번호만 수정해서 사용한 적도 있었다.
오프라인으로 사람을 만나는 일이 줄어들면서 명함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그동안 내 커리어와 기본 정보가 바뀌었다는 사실과 함께. 커리어의 중심이 온라인으로 이동했기 때문이지만 상대적으로 오프라인은 여행하듯 자유로운 평행우주가 되었다. 더 이상 나를 설명하기 위해 애쓰지 않는다. 오프라인에서도 온라인 친구들을 만나거나, 아니면 원래 지인을 만나거나, 새로운 사람은 지인을 통해 만나거나, 또는 그냥 서로를 몰라도 되는 상태로 만난다.
지금은 포지션이 유동적이다. 수식어를 바꿀만한 제안을 수시로 받는다. 굳이 호들갑 떨고 싶지 않는데 그렇다고 이 모든 것을 사소하다 여기면 거만해지는 그런 제안들이다. 적정선에서 자랑 중이고, 매우 감사하다. 제안이 대단한 무언가라면 오히려 의심을 했을 것이다. 나는 대단하지 않다, 아직은. 그저 합리적 제안을 꽤 자주, 다양하게 받을 뿐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뱁새를 기죽이는 황새가 되었다는 것을 안다. 이 사실을 간과하고 내 커리어를 축소하면 내 기회도 줄어들지만, 내가 거대해 보이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무시하는 일이 될 것이다. 반대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그랬다. 동시 병행하기 어려운 작업들을 척척 해내면서 겸손을 부리는 사람들을 보면 갑자기 나도 뱁새로 돌아간다. 미출간작가 낫워킹 싱글인 난 아직도 그중의 하나를 이루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저 겸손과 여유는 뭐람. 스스로 하찮게 느끼더라도 남 보기에 황새인 사람은 스스로를 적당히 귀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야지. 떴다고 겸손한 척하는 거 아니야." (드라마 <시크릿 가든> 중에서)
나는 겸손할 만큼 충분히 성장, 아니 시작도 하지 못했다. 내 눈에 황새들은 스스로 느끼는 성취감이 충분해서 (또는 더 큰 황새를 의식해서) 고개를 숙이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 멀었다. 혼자 걷는데 걸어진다는 것도 감격스럽다. (자랑해야지!) 겸양을 부릴 여유가 들어설 자리는 없다. 막 혼자 겨우 일어서서 내게 오는 모든 제안이 감사한데. (자랑해야지!)
떴다고 겸손한 척할 생각도 없다.
경험상 일시적으로나마 모두가 인정하는 사람이 되면 굳이 매력 어필을 안 해도 된다. 그냥 못되게 굴지만 않으면 된다. 그냥 좋은 생각만 해서 인자한 인상을 유지하면 된다. 겸손 떨 것도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