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시작 못한 인생>
대학교에 갔을 때 화장품 부자였다. 나를 도토리 부자라고 불렀던 친구는 란제리 부자였는데, 내 방에 놀러오면 화장품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코덕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코덕, 즉 코스메틱 덕후였다. 원래 지망하던 약대를 못갔으니 숨은 코덕이 모이는 학과에 진학했다. 국내 최고의 화장품 회사에 취업한 동문 선후배가 꽤 많다.
나는 좋아하는 외국계 화장품 회사에 지원했다. 영어 점수 때문에 떨어진 것 같다. 남들처럼 억척스럽게 취준을 하지 못했다. 산다는 건 그런 거라는 것을 몰랐다. 나만큼 무모하지는 않았지만 비슷하게 덜 억척스러운 친구들밖에 없어서 정보력은 여전히 부족했다. 정보력 부족으로 과학고에 떨어졌는데 악몽이 되풀이되려는 순간이었다.
그 외국계 회사에 정말 가고 싶어서 영문 자기소개서 첨삭을 받았다. 영어도 외국어긴 하지만 첨삭을 받는다는 건 꽤나 절박한 행위였다. 자기소개서의 완성도가 올라도, 토익 점수가 오르지 않았다. 취업 시즌이 되어서야 토익을 보러 간 내가 너무도 순진했다.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은 지금의 내가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취업은 입시 이상의 난코스였다.
영어가 꼴도 보기 싫었다.
내게 주어진 환경이 내게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일류 대학의 영어고자가 되는 거라니. 참 이상한 세상이야. 영어가 필요없는 일을 하고 싶었다. 원래도 가기 싫었던 대기업은 자동으로 필터링이 됐다. 중소기업은 우리 학교 졸업생을 싫어했다.
서류 탈락을 시켜도 되는데, 계약직 사원을 뽑는 자리에 굳이 불러놓고 진짜 그 학교 맞냐고 묻는다. 그러고 면접에서 탈락시킨다. 나름 바쁜 사람을 갖고 논다. 내가 취준생인지도 모르고 안일하게 살았던 졸예자 시절에는 꿈에도 몰랐다. 취준생은 을도 아니고, 병도 아니고, 정도 아닌 것을. 인사담당자가 그냥 얼굴 보려고 불러서 얼굴만 보고 불합격시킬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오셨어요?"
면접장이 있던 건물, 중년의 리셉션 사원은 면접자를 잡상인 취급했다. 그녀랑 싸운 기억만 나고, 건물 위치나 회사 이름은 기억도 안 난다. 면접을 보긴 한 건가? 싸우고 그냥 나왔을 것이다.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예의도 없고 철학도 없는 비문을 구사하는 인간들이 꼴보기 싫었다. 사물 존칭이야 갑들이 갑질을 하니까 그런 거고. 면접보러 오지 않았다면 더 중요한 일로 방문한 고객일 수도 있는 사람한테 저런 워딩을 한다고?
"차타고 왔어요." (드라마 <더 글로리> 중에서)
이런 워딩에 대한 솔루션을 제시한 그 작가도 어지간히 짜증났었나보다. 차라리 왜 왔냐고 물어봐야지 어떻게 오셨냐니.
대체 어떤 초등학교를 나온 거야.
내 주위에 드물었던, 조금 이상한 친구에게 물든, 별로 고급스럽지 않은, 공격적인 어휘로 짜증을 잔뜩 내고 돌아섰다. 그거 알아?
난 대졸사원 취업고자긴 하지만, 학력무관 취업의 신이야. 그 당시 나의 빠르고 끊임없는 이직을 실시간으로 알고 있던 오빠들은 어쩜 그렇게 잘 그만두고 잘 취업하냐고 신기해했다.
음. 고졸인 척 하면 돼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