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글부심

단편소설 <시작 못한 인생>

by 산책덕후 한국언니

연애를 안하면 제약없이 친구들과 동행을 하거나 혼자 여행, 혼여행을 갈 수 있다. 연애를 길게 해본 적은 없었고 여행은 길게 해볼 수 있었다.


시즌 2의 나는 매일의 현생에서 즐거움을 찾았고 여행이나 연애를 갈망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왕자님을 남몰래 소망하고 있었다. 썸남 H를 단념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그를 내려놓아야겠다는 결심을 하는 순간, 다른 사람과 결혼하게 될 운명을 앞두고 있었다. 여기서 목적어는 '운명'이다.




결혼은 하지 않았다. 약혼자가 왕자가 아니라서가 아니라고는 못하겠다. 프린세스 메이커의 연장선에 있는 미국 드라마 <가십걸>의 블레어는 모나코 왕자 루이를 저버리고 사랑하는 척 배스를 차지하려 했으나, 루이만큼 잘 할 자신이 없던 척 배스가 물러나면서 프린세스가 된다. 나의 왕자님은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경합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는 경합이 있다는 걸 몰랐다.




그가 끝내 썸남으로 남은 건 평생 가장 오랜 기간을 사랑했음에도 아무런 약속을 못했기 때문이다. 비밀 연애나 개방적인 연애도 어느 정도는 연락의 밀도가 있어야 시스템이 굴러간다. 그와 나는 비즈니스적 대화를 하거나 부티콜을 했지만 그 사이의 우정이 비어있었다. 우애나 동료애, 일상적인 대화가 없는데 서로 동경만 하는 사이라니.


표현을 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표현을 했는데 달라지지 않았을 경우도 생각을 해본다. 사람 속이라는 건 참으로 알기 어렵다. 당시에는 내 속이 더 어려웠던 것 같다. 존경을 깨느니 사랑을 받지 않겠다는 철없던, 사랑이 귀한지 몰랐던 시절이다.


사랑도 사람도 다 보내고 나서야 후회를 한다.




마음이 가는 사람은 안 하던 고민을 안긴다. 여지껏 당연히 혼자 가거나 일부 구간을 마음 통하는 친구와 함께할 생각에 부풀었던 세계일주를 혼자 가도 될까? 같이 갈 생각이 있냐고 물어봐야 할까?


오래 여행해도 되냐고 허락받는 척을 해야 할까?


사랑과 전쟁을 거쳐 서로의 스타일을 인정하는 관계라면 경험에서 나오는 시나리오가 있을 것이다. 그런 경험이 아예 없다. 사랑과 전쟁은 해봤지만, 연인과 여행을 가 보는 경험도 한 사람 앞에 한 번 뿐이었고 그 중 해외는 없다. 친구들과 여행을 갔던 경험도 내가 가고 싶어 안달났던 상황은 아니다.


말이 친구들이지 연인과의 공동 친구는 일종의 감시자 집단이다. 그 중 호시탐탐 새로운 기회를 노리는 자가 있다 해도. 더 친한 사람이 있다 해도.


허락을 받는다, 허락을 구한다는 말 자체가 참으로 낯설고 낯간지럽다.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이야.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 망아지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고 나 역시 그런 사람이기에 인생의 중대사나 본인의 현위치 같은 문제를 연인이라 해도 서로 간섭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 확신을 가지지 못했고, 그래서 깔끔하게 이별하지 못했을지라도. 간섭 당하기 싫어서 간섭하지 않는 마음은 겉보기보다 아주 섬세하다.


내가 당하기 싫은 것을 너에게 하지 않는다.




사랑이 부족해서 무심한 것이 아니라, 사랑이 넘치기에 그의 족쇄가 되고 싶지 않았다. 나 역시 그를 족쇄로 느끼고 싶지 않아서 안전거리를 확보했다. 사랑이 아닌 욕망이라면 번아웃을 시키더라도, 타이밍을 끼고도 사랑을 느껴서 정서적 관계를 지속한 연인과 썸남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가끔은 심하게.


너를 더 오래 사랑하기 위해서. 어쩌면 평생.


너를 자유롭게 유지하도록 마음을 쓰는데 나의 에너지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것이 내 마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어휘는 부족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은 곧 구속이라고 여기거나, 자기도 모르게 그런 행위를 하는데 사랑과 구속은 오히려 반의어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어야, 내가 사랑하는 네가 될 수 있다면 그게 무엇이든 가로막지 않을 것이다. 너를 고쳐야만 사랑할 수 있다면, 너를 떠날 것이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해도 여전히 사랑스러워야 그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개구리는 왕자가 되지 못했다. 그는 반항을 했던 것 같다. 주어진 자유를 권리로 착각한 것은 1차원적인 사고였다. 이 자유가 소중한 것을 모르고 더 큰 자유를 탐하거나, 제멋대로 해서 내게 상처를 주었다. 마음껏에 포함되지 않는 사항도 있다.


타인의 앞에서 내 지위를 절대로 강등하지 말 것.


그게 설령 허세일지라도 나에게는 네 여자의 자리보다 내 지위가 중요하다. 그걸 깨닫지 못한 우둔한 남자는 더이상 연인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이전에 부여한 트로피를 깨고 싶었다. 너는 내 본연의 지위를 삭제하고 네 여자라고만 생각하는구나. 내가 그러려고 너에게 자유를 준 것이 아닌데.




시즌 1과 시즌 2의 나는 충분히 현명하지 못했고 내가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몰랐다. 가장 큰 고비는 시즌 2의 마지막 일 년이다. 여행을 통해, 장소만 바꿔서, 미덥잖은 친구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순진한 생각을 했었다. 그럴리가 없다.


여행을 앞둔 시점, 사랑의 환멸을 느꼈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던 신대륙에 뭐가 있는지 몰랐고 그 곳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었다. 달라졌다. 나도 달라졌고, 나와 세계의 관계가 모두 달라졌다.


남자들은 외국 여성의 신비함에 매료된다. 그러나 나는 야망이 하늘을 찌르는 프린세스 메이커다. 프린세스가 아닌, 프린세스 메이커. 퀸 메이커.


내가 메이킹하는 프린세스가 나였고, 프린세스 메이커인 동시에 프린세스였으나 나를 더 잘 키워서 퀸으로 만들고 싶었다. 왕자님은 이미 놓쳤다.




​여행의 동기를 남기고 간 친구 덕분에 최종 목적지를 발견했다. 물리적인 GPS가 아니다. 대양을 건너보고서야 또렷해진 목표지만 진심으로 소망한다면 어디서든 성취할 수 있는 정신적인 목적지.


나는 영어로 소설을 쓰기로 했다.


영어로 카톡은 할 수 있다. 당연한 얘기지만 해외에서 만난 외국인 친구들과 영어로 대화하고 영어로 온라인 채팅을 한다. 온라인 글쓰기도 영어로 하려다 할 말이 많아져서 잠시 영어를 추방했다. 영어는 이제 자기만의 작고 소중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영국 사람 책, 원문이 탐나는 작가들의 책.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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