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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타임스퀘어 산책과 선셋

뉴욕 사진, 피사체와 관찰자 시점

뉴욕은 걷고 싶어서 걷게 된다기 보다, 걸을 수 밖에 없는 곳이다. 뉴욕을 상징하는 맨해튼 미드타운은 대체로 차가 지나가지 못하고 잼처럼 굳어있는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타임스퀘어 근처의 사무실로 출퇴근하는 친구와 만나거나 헤어지는 장소는 주로 9th Ave다. 브로드웨이 42nd st는 차가 들어오면 나가지 못하는 곳이기 때문에 헤어졌다가 각자 들어와야 한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같이 오더라도 버스를 타고 온다.) 뉴욕을 접수한 첫 해에는 귀국 전 마지막 날 타임스퀘어에서 미국 대통령 선거 특집 방송을 녹화하고 있었다. 나는 뉴욕과의 기약없는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지저분한 디즈니 존은 금새 질렸다.



강렬한 석양도 고층 건물에 밀려서 못 들어오는 맨해튼


그동안 일출을 기다리며 스벅모닝, 디즈니 스토어 및 각종 SPA매장에서 윈도우 쇼핑, 세포라에서 변장하기(코로나 전이었으므로), 친구 기다리며 혼자 마가리타 마시기(친구는 so cool하게 다른 친구를 사귀어 보라고 했다.), 관광객이 아닌 척 하면서 다른 관광객 구경하기, 길 알려주기, 그리고 여행영어를 도와준 힐러리가 실패하는 것을 목격하기 등 많은 것을 이 곳에서 해봤다. 더는 시도해볼 것이 없겠지? 이 근처 어딘가에서 야근하다가 뉴저지로 퇴근하는 친구를 마저 기다리기 위해서 버스를 타고 유니언 시티로 갔다.


그리고 맨해튼과 3년 간의 이별을 했다.

공백은 <가십걸>로 채웠지.


돌아온 첫째날은 화창했다. 목적지가 타임스퀘어는 아니었지만 또 9th Ave에서 그 친구를 만날 예정이었다. 퀸스에서 남미식 불백을 먹고 짐을 맡기고, 어메니티 없는 숙소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퍼이스트 사이드까지 와서 드럭스토어를 털고, 다시 체크인을 하고 짐을 풀기 위해 퀸스로 돌아왔다. 그땐 루즈벨트 섬에 갈 수 있는 케이블카의 존재를 몰라서 무식하게 지하철을 타고 왕복했다.



돌아온 뉴욕은 옐로 캡 림보


지나고 보니 또 사진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뉴욕은 그런 곳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급정거를 하다가 바쁜 뉴요커한테 상소리나 눈총을 받아내느니, 그냥 나도 뉴요커인 척 파워워킹을 하게 된다. 이번 무한대 투어가 이루어진 2019년 뉴욕 사진의 대부분은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실내에서 촬영했다. 구겐하임까지 제외하고 남은 사진은 시카고 폴더(역시 미술관 제외)의 사진보다도 갯수가 적다.


진짜 현지인이 되는 시점은 짐을 풀고 나서부터 시작된다. 이제는 마음 편히 타임스퀘어를 지나가기로 한다. 약속 장소가 애초에 타임스퀘어에서 '가깝지만 너무 가깝지는 않은' 곳이다보니, 달리 다른 곳을 구경할 정도의 여유는 없었다. 타임스퀘어에서 해보지 않은 것이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지나가는 소녀와 셀피를 찍고, 풍경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도시의 일몰은 엄청나게 매력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전광판과 네온사인 때문에 빛의 과잉이 벌어지는데다, 매번 지나가지만 설레지도 않는 라디오 시티 골목은 화창한 가을 하늘이 무색할 정도로 어두침침했다. 맨해튼은 그런 삭막함을 견딜 수 있는 사람만 밟고 올라설 수 있는 곳이다.



하늘색이 무색할 정도로 어둡기만 한 골목


미술관에서 보낸 이틀과 허드슨 야드에 가면 비가 오는 징크스로 망친 이틀을 빼면 도착하던 날의 타임스퀘어 일몰, 브루클린 브릿지 스냅 촬영과 이튿날의 브루클린 산책, 센트럴파크를 시작으로 공원 투어를 했던 일요일 정도가 야외 사진을 남길 수 있는 날이었다.


브루클린도 충분히 즐겼다는 느낌은 아니었지만, 맨해튼은 더 심했다. 워싱턴 아치 앞에서 프사를 찍은 그 일요일을 제외하면 거의 다 저녁이었고 열심히 건물 사진을 찍다가 방전됐다. 의상이 좀 지겹긴 하지만 내 사진은 공원 셀피 백장과 브루클린 스냅으로 만족해야 했다. 타임스퀘어에서 만난 소녀와의 셀피는 내가 너무 지쳐있기도 했지만 결정적으로 배경이 너무 안 나왔다. 대체 사진이 뭐길래.


그럼에도 덤보나 타임스퀘어에서 독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부럽다. 브루클린 브릿지는 내 사진이 짱이므로 더 이상 부러울 게 없는데(그렇다. 이 사진이 완성된 후로 '삶의 질'이 달라졌다.) 그래도 아직 부러운 게 있다니, 인간의 욕망에 질리는구만.



초보자도 소실점을 찾을 수 있는 타임스퀘어


하지만 무심결에 타임스퀘어에 있는 '시카고' 쓰레기통 앞에서 포옹하는 연인을 촬영한, 도시 관찰자로의 나 자신도 버릴 수 없다. 그래서 나는 혼자 여행을 한다. 내가 준비되었을 때 남이 찍어주는 사진의 만족감을 사랑하지만, 내가 원하는 앵글로 관찰하는 뷰어의 만족감은 비할 바가 아니다.


피사체냐, 기록자 또는 창조자냐. 어느 정도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곳이 또한, 뉴욕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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