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 만에 올라갔더니 이게 뭐야
한 번이라도 이 곳을 지나갔다면, 알아볼 수 있는 뷰. 하이라인 계단을 세 번쯤 올라갔고 이 날은 그 세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하려다 결국 실패했다. 날씨요정을 기다리며 길지 않은 산책을 했던 공중정원의 끝에서 마주한 것은 닭똥같은 빗방울과 먹구름. 그럼에도 이 곳을 정복했다고 자축할 수 밖에 없었다.
플로리다 노튼 미술관과 함께 2019년 주목할만한 신축 랜드마크가 이 길의 끝에 있었다.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쉐드'이다. 막상 실제 위치에 와보니 거대한 빗살무늬 토기 모양의 구릿빛 계단 구조물인 '베슬/베셀'이 시선강탈을 했다.
이들 뉴비를 포함해 허드슨 야드 전체가 2016년에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그땐 쇼핑몰 본체를 공사하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역사덕후 아님을 항상 강조하는 것은 인물, 사건의 생몰년도를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니 건축물의 생몰년도를 기억하려는 가망없는 시도는 하지 않겠다. 그런데 수학은 잘 하시지 않아요? 라고 묻는다면 수학은 인과관계이므로 숫자암기력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할 수 밖에. 그리고 연도를 기억 못하는 거지, 날짜는 잘 기억한다. 내가 태어난 이후의 날짜들은 특히 잘 기억한다. 언젠가는 2016년임을 헷갈릴 수 있지만 10월 12일은 뉴욕에 처음 도착한 날이다.
하이라인과 주변 시티뷰를 제대로 볼 수 있었던 날은 2019년 9월 26일이다. 이제 장부를 보고 있다. 두 번째 여행은 첫 여행의 느슨함을 보완해야 했기에, 뉴요커 모드로 내 특기 중 하나인 빨리걷기를 뽐내는 한편 관광객 모드로 랜드마크를 접수하러 다녔다. 둘을 합쳐 홍길동 모드라고 부르겠다. 홍길동 모드의 동선은 정확성을 위해 날짜, 시간별 위치를 기록한 장부를 참고해야 한다. 일기라고 하기엔 플래너에 가깝고, 플래너라고 하기에는 자유분방하게 작성해서 장부라고 부르겠다. 이 절반의 성공을 앞두고 3년 전에는 클럽 가는 길에 하이라인에 들렀다가 야경만 보고 내려왔다.
잠들지 않는 맨해튼에서 잠드는 곳이 있다면 공원이다. 심야개방을 하면 서로 위험하고 녹지와 (특히 큰 공원의 경우) 상주하는 동물들이 있기에 휴업 시간이 필요하다. 나 역시 밤산책이 펜스로 막혀서 서운한 적도 있었지만, 첫 여행 이후에 빠져든 대부분의 스릴러 드라마에서 '센트럴파크 살인사건'을 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억지로라도 들어가지 않기를 잘했지모야.
그 우연히 발견한 계단을 다시 찾아갔을때 9시 55분이었고, 하이라인 공원도 마감을 하고 있어서 반쯤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인파에 합류했다. 이로써 두번째 시도는 발도 못 들인 것으로 끝났다. 여행 끝물이었다. 며칠 후 보스턴, 돌아와 타임스퀘어 스타벅스, 잠깐 멍때리다 뉴저지, 뉴어크 공항에서 바람맞고 JFK 공항. 아메리칸의 제휴사 대한항공의 남는 좌석과 옆 좌석까지 차지한 채 귀국했다. 기나긴 미국 스릴러 드라마 binge watching의 시간들을 보내고 3년만에 뉴욕에 돌아왔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바로 하이라인 공원. 두 번째 뉴욕의 첫 공원투어는 비바람과 함께 시작했다. 그 후 다른 공원들은 대체로 야경에 가까운 해질녘이었지만 무난했다. 여러 상황의 조합으로 선셋 스팟까지 계획해서 움직이진 못했다. 그랬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풍경 사진을 촬영하는 '작업'이 되었을 것이다.
리버티 언니는 하이라인 징크스도 주고 브라이언트 세렌디피티도 주셨다. 이 날의 선셋은 황홀했다. 하지만 떠나는 날의 징크스를 피할 수 없었다. 하이라인 징크스보다 강력한 건 워싱턴 징크스. 워싱턴행 버스를 타는 뉴욕 마지막 날에는 브라이언트에 먼저 갔는데도 비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앞서 하이라인을 거쳐 휴식할 공간으로 활용했던 허드슨 야드의 고급 델리인 시타렐라를 대피소로 삼았다. 베셀 앞을 지날때는 더욱 강력해진 비바람에 쫒기듯 달려갔다. 뉴욕이 정 떼려고 작정했나봄.
뉴욕은 첫 여행의 불가피한 거점이 되어 10월 말부터 11월 초까지 총 22일을 보낸 곳인데, 대체로 목요일 쯤에 비가 좀 많이 오고 나머지 날들은 화창한 편이었다. 두 번째 뉴욕은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총 9일이었으니 정말 운이 좋아도 한 번, 그게 아니라면 두 번은 비가 올 예정이었다. 그 비가 허드슨 야드에 갈 때마다 왔기 때문에 새로운 랜드마크가 된 베셀과 쉐드, 한 맺힌 하이라인의 상큼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이 또한 불가피한 일정이었다.
(다음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