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나, 동생, 손님, 흰 망태공주, 푸른곰팡이
내 동생과 나는 엄마 아빠와 떨어져 지내고 있다. 내 동생의 성적표를 어쩔 수 없이 몇 년 동안 내가 관리하고 있다. 동생의 성적표에는 주욱 성격이 '내성적'이라고 적힌다.
죽순이 부엌 선반에서 3주 동안 방치되어 썩어가고 있었다. 겉부터 안으로 파고 들어가며 빨강과 파랑이 섞여 보랏빛으로 문들어지고 느슨해지고 이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생생한 모습을 기록하며 변해가고 있었다. 부엌 창문을 거쳐 안으로 들어온 반투명한 햇빛에, 혹은 달빛에 동생과 나는 몽롱한 기분이 되었다.
우리는 그 죽순을 바라보고 앉아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을 주고받았다. 내가 가질까, 네가 가질래? 서로에게 결정을 미루었다. 눅눅한 죽순을 가질 사람을 정하는 문제가 죽순이 썩고 있다는 문제보다 훨씬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죽순은 형태를 잃어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결정을 미루고만 있었다. 그때 초대장도 없이 손님이 찾아왔다. 제가 이 죽순을 사고 싶은데 얼마입니까? 황당한 질문에 우리는 대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손님이 답답했는지 목소리에 힘을 주어 우리를 설득했다. 나는 정원관리사입니다. 이 죽순이 반드시 필요한 정원을 돌보고 있습니다. 죽순값은 후히 드리겠어요. 우리는 이제 죽순을 지켜야 했다. 이제 죽순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중했다. 절대로 팔 수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을 듣고도 손님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몇 날 며칠을 찾아와 문 앞을 서성거렸다.
그러는 사이 썩은 죽순의 몸은 달라졌다. 흰색과 검은색의 곰팡이가 몸을 덮었다. 며칠이 더 지나고 죽순의 몸은 그물을 찰랑거리는 흰 망태버섯으로 완전히 변신했다. 그제야 손님이 왜 썩은 죽순에 집착했는지 알게 되었다. 곧이어 흰 망태버섯으로도 모자라 흰 드레스를 입은 하나의 공주로 변신했다. 손님이 더 이상 들어올 수 없도록 문을 막고 집을 완전히 밀패 했다. 동생과 나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 집 안 온도를 확인해 보니 40도가 넘었다.
공주는 흰 드레스를 펄럭거리며 춤을 추기에 바빴다. 동생은 몸이 좋지 않은지 콜록거리는 소리를 냈다. 체온을 재보니 열이 45도였다. 몇 주 동안 아픈 동생을 지켜보았다. 내성적인 동생은 공주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내색하지 못하고 나에게 수차례 당부했다. 절대로 문을 열어서는 안 돼.
동생의 허리에서부터 아름다운 푸른곰팡이가 생겨났다. 그제야 공주는 동생에게 눈길을 주었다. 3주 후에 동생은 아름다운 푸른곰팡이로 다시 태어났다. 잠잠하던 손님이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손님에게 문을 열어주고 흰 드레스를 입은 공주와 공주가 소중히 안고 있는 유리병 안에 든 푸른곰팡이가 된 동생을 자랑스레 보여주었다. 손님은 곧 마술사로 모습이 변하여 공주와 동생을 데려갔다.
마음이 텅 비어 구부러진 무릎을 끌어안았다. 그런 자세에서 책상 아래쪽으로 눈이 갔다. 먼지와 곰팡이가 뒤 썩인 상자를 발견했다. 뚜껑을 열었다. 어릴 적 나의 사진과 성적표가 있었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내성적인 성격이라고 적혀있을 거야. 성적표를 펼쳐 종합란을 보았다. 이미 과거의 내가 검은색 색연필로 덧칠해 알아볼 수 없었다. 검은색 색연필 사이로 희미하게 두 개의 단어가 보였다. 공상. 되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