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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Jan 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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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과 극은 통한다

 CES 출장으로 새해를 맞았다. 없어지는 기업만큼 새로운 비즈니스도 생겨나니 창업 생태계는 유지된다. 아직 능력이 남아있다면 인류와 사회에 공헌하는 것이 마땅하다. 대장정을 위해 소시오패스와 나르시시스트는 조직에서 과감히 떨어내기로 했다. 연말이면 경건한 마음으로 연락처를 250명 이내로 정리한다. 휴대폰에 지인이 몇 천명이 있더라도 그런 관계에 진정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인맥을 정리하는 나만의 방법은 바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딴소리를 하거나 읽씹 하는 사람은 지워버려도 무방하다. 기다리던 초식남의 박사논문 심사를 위해 연구소에 들렀다. 3년 사이 눈가에 표정 주름이 잡히고 허리둘레가 늘었다. 초파리도 늙으면 수분이 빠지고 지방이 늘어난다는 사실에 박장대소 웃었다. ‘나는 살쪄도 너는 빛나야지.’ 박사가 된 기념으로 1박 2일 MOK과 회포를 풀고 라스베이거스로 이동하니 숨통이 트인다. CEO 대행 중인 남편은 대외업무는 뛰어나지만 디테일이 떨어진다. 나보다 일 잘하는 전문 CEO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매 순간 임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귀국 편 비행기에서 고교 동창 강정호를 비즈니스석 옆자리에서 우연히 만나 명함을 교환했다. 강 차장은 MBA 출신으로 매일 쏟아지는 신기술 앞에 문송하다며 자신을 소개했다.


"지금 다니는 회사도 좋겠지만 혹시 이직할 생각 있어?"


 석박사급 인재가 필요했기에 베르니는 스카우트 제의를 건넸다. 포지션과 연봉은 맞춰줄 테니 팀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다면 영광이라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일하는 것이 꿈이라기에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스테이케이션 패키지와 항공권 바우처, 스톡옵션까지 제시했다. '왜 이렇게 진심이지?' 강 차장은 저돌적인 그녀의 제안에 겁이 났다. 와이프도 동문인지라 서로 처지를 훤히 알고 있으니 돌려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강 차장이 2주간의 출장을 마치고 귀국해 보니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30대 박사급 인재가 줄줄이 영입되면서 부장 승진은 물 건너갔고 혼신을 다해 일했는데 마흔일곱에 명예퇴직을 권유받은 것이다. 다가오는 설 연휴에 결혼 20주년으로 가족들과 하와이 여행이나 다녀오려고 했는데 앞이 깜깜했다. 급한 마음에 출장에서 만난 베르니에게 SOS를 쳤다. 지 대표는 강 차장의 구원 투수가 되어 주었다. 졸업하고 해외로 나가 20년 동안 소식도 없던 그녀를 SNS에서 찾아 동창회로 이끈 사람이 바로 강 차장이었다. 위기일발의 순간 동아줄을 내려준 것일까. 작년 무리해서 꼬마빌딩을 사느라 은행에서 주택담보대출을 아직 상환하지도 못한 터라 모든 상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베르니는 비전이 구체적이고 간결했다. 이번 출장에서도 그녀는 미래 기술을 보여주었다. 비트코인 ATM에서 달러를 인출하는가 하면,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 변하는 EV 자율주행차를 타고 담소를 나누면서 bay area 101 고속도로를 달리기도 했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UAM으로 이동하는 모습은 마치 신화 속에서 나온 여신 같았다. 대륙 스타일로 돈 이야기부터 시작하니 우리는 전우인듯했다. 돈에 대해서 언급하면 ‘천박하다’는 옛날 사람들의 인식에 불편해하면서도 기부를 하거나 티를 내면서 돈을 주거나 쓰는 것을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니 신기하다. 서구에서는 모름지기 선행이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 받은 만큼 갚아주는 (payback) 것이 아니라 먼저 베푸는 (pay it forward) 것을 모르는 것이 안타까웠다. 베르니에게 왜 스카우트 제안을 했느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20년 간 해외에 있었더니 한국 친구가 별로 없거든. 그런데 네가 어느 날 치킨 쿠폰을 날리면서 동창회에 초대하는 거야. 졸업 기수가 생각나지 않아서 내가 착각했는데 젠틀하게 넘어가고 말이야! BBQ 치킨으로 받은 은혜를 갚은 것으로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대기업에 강 차장으로 있을 때 다들 귀찮아하던 동창회장을 하며 사비로 선후배를 챙기고 수 천 마리의 치킨을 뿌렸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아내를 만난 동창회가 그저 감사했고 1기 졸업생이란 사명감으로 동창회를 지키고 싶었다. 강 차장과 베르니는 강남에서 태어나 8 학군에서 사춘기 시절을 보냈다. 70년대에는 강남이 논밭이라 뛰놀며 개구리를 잡곤 했었다. 베르니는 일찍이 과학 영재로 두각을 나타내 학교 대표로 올림피아드에 나가는 것이 일상이었다. 대학에 가기 전까지 성별은 전혀 문제시되지 않았다. 강 차장은 눈에 띄는 수려한 외모 덕분에 CF 모델을 한 경력이 있다. 고등학교에 오면서 학업에 집중하려 그만두기는 했지만 어디에서도 빛나는 외모와 시원시원한 성격으로 여심을 사로잡았다.  


 강 차장은 대기업에서 하던 습관대로 아침 7시 출근을 했다. 어차피 집에 있어도 아내에게 아침을 챙겨달라기 미안하던 참이라 임원진이 된 것을 자랑스레 여기며 일찍 나왔다. 그런데 베르니가 라운지에서 뉴스를 보며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표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어, 대표님! 일찍 나오셨네요!"

"왜 그러세요? 갑자기 어색하게... 나도 그러면 존대한다. 작고 평등한 조직이니 말 편하게 해! 아침 안 먹었지? 여기 맘에 드는 걸로 골라봐."


그녀는 샛별 배송 온 샐러드 꾸러미를 건넸다. 비건, 락토, 페스코, 플렉시테리언까지 종류별로 라벨이 붙어 있다. 잘 나가는 회사 패키지로 아침, 간식 서비스 정기구독을 하고 있었다. 역시 할 일만 잘하면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회사 문제도 해결되었고 또 무슨 고민이 있어?"

"오래 미뤄두던 문제가 있긴 한데... 비트코인 말이야."

"응, 무슨 일인데?"

"2015년에 비상금으로 비트코인을 사놓고 숨겨뒀거든. 그런데 비밀번호를 잊어버렸지 뭐야. 창피해서 하소연할 데도 없고. 와이프가 알면 쫓겨날 것 같아 말도 못 하고."

"그쯤이야 물론 가능하지."

"정말? 세상에 그런 기술도 있어?"

"테크가 아니라 인문학적으로 해결하는 거야. 사람이니까 유사한 패턴으로 실수를 반복하잖아."

"우와! 지금 당장 풀 수 있는 거야?"

"퇴근할 때 알려줄 테니까 급한 일 하나만 처리하자. 우리 회사가 코로나 때 성장해 바빠졌잖아. 경력직 충원하고 있거든. 동종업계에 대우가 좋다고 소문이 나서 서류가 천 건이 넘게 몰렸는데 AI로 20% 정도 추려놨어. 오늘부터 마케팅 1차 면접을 하면 좋겠는데 스케줄 어때?

"큰 문제도 해결되었고 난 열심히 일만 하면 되지."

"이력만 번지르르하고 조직에 들어오면 물과 기름처럼 융화가 되지 못하니까 잘 걸러야 돼. 경력이 화려해도 뭔가 이상한 점이 드러나거든. 착해서 손해 보며 살았다고 자격지심을 드러낸다거나, 30년 전 무용담이나 늘어놓으면 한심하지. 여기 사무실 키 카드랑 법인카드 줄 테니 편하게 준비해, 회사에 필요한 비용이면 네 권한으로 사용해도 괜찮아. 모든 결정에서 회사를 위한 것인지 떠올리면 불편한 건 없을 거야. 큰돈이 필요하거나 월급이 부족하다 싶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 줘. 유미한테 미안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 않거든."

"대기업에서 갈고닦은 노하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강 이사님, 잘 부탁해!"


베르니는 강 이사의 와이프이자 후배인 유미를 잊지 않았다. 지 대표의 적극적인 중매로 두 사람이 이어지기도 했고 결혼식 때 무려 축가를 불러줬으니 각별한 사이임은 분명하다. 가족을 잘 챙기고 건사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살다 보면 알 것이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도 있듯이 사람을 쓴다는 것은 신중한 작업이다. 똑똑하거나 경험이 많다고 뭐든 잘하는 것이 아니라 시너지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쳐서 쓸 수는 없기에 ChatGPT로 한 차례 거른다. 인턴에 나이 제한은 없다. 기본적으로 코딩 가능자 중에 학비를 벌러 지원하는 우수한 학생들이 많아 석 달 동안 실력을 증명하면 테뉴어로 전환된다. 경력직은 전공을 보는 편이다. 의대나 법대 등 실용학문을 전공했는데도 자격증이 없으면 아웃이다. 시험운이 좋았거나 부모 실력으로 이룬 것일 테니. 대충 아는 것은 모르는 것이나 다름없는데, 모르면서 질문도 하지 않으면 도와줄 수 없다. 법인은 생명체처럼 생애주기가 있는데 스타트업은 5~10년이면 성장해 엑싯 (exit)을 하기 마련이다. 20년이 되어가는데 지지부진한 기업이라면 자비로 연명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타트업이 그토록 훌륭하다면 국내외로 소문이 나서 IPO 하거나 m&a를 하는 것이 정석이다. 5년 차 베르니는 글로벌에서 시장성을 검증받을 수 있는 때가 왔다고 확신했다. 내년 CES 혁신상 노미네이트를 하고 유레카 관에 전시하는 상상을 매일 하면서 달리자. 얼마를 지불해서라도 모시고 싶었던 첫 번째 인재가 MOK이었다면 두 번째 인재는 바로 강 이사였다. © Lisay 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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