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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Apr 01. 2024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DALL.E 3로 재현한 숲 속 책거리 풍경

 2023년 혼돈의 소용돌이 속에서 버킷리스트를 꾸역꾸역 비워내면서, 죽어있던 뇌세포가 되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송사에 휘말렸지만 그 덕에 당신을 알게 되었고 전화위복으로 이렇게 다시 태어났으니 감사의 마음이라도 전해야 할까요. 평소 같았으면 전혀 만나지도 않을 다양한 변호사분들을 만나 상담하면서 늦은 나이에 로스쿨을 가도 괜찮겠다는 목표도 생겼습니다. 물론 레드오션에서 경쟁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고, 내 사람들을 변호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입니다. 여력이 허락한다면 미성년자, 예술인, 중독자 등 사회적 약자들을 프로보노로 돕고 싶습니다. 100세 시대에 전문자격증이 하나 생기면 좋을 테니 늦기 전에 도전하겠습니다. 여덟 번 전화통화에서 마음을 흔들어버린 당신과 헤어질 결심을 하려고, 다보스 (Davos) 산골 마을까지 2024 세계경제포럼 (WEF)을 다녀왔습니다. 케케묵은 지식의 관성에서 벗어나려고 몇 천 권의 장서를 숲 속에 널어 깨끗하게 말리고 모두 기증해 버렸다는 친구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오래간만에 친구들도 만나고 베른, 바젤, 취리히에 들러 아트스쿨을 돌며 뮤지엄도 둘러보면서 여유 속에서 감을 되찾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떡하니 경찰서에서 등기우편물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훌훌 털고서 새 출발을 하려 했는데 작년의 그 악몽 같던 기억들이 오롯이 되살아났습니다. '통신사실확인자료 제공요청 집행사실 통지서'를 왜 7개월이 지난 지금에서야 보낸 것일까요? 할 테면 해보라는 도전장일까요? 그렇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고소장을 작성해 사건 발생지이자 당신이 있는 경찰서로 접수를 하러 갔습니다. 민원실 여경이 서류들을 훑어보고는 조용히 어디론가 내선전화를 돌립니다.


보영: 고소장이 접수되었어요.

ICW: (누가요?)

보영: 구연주 씨요.

ICW: (하... 올 것이 왔군요.)

보영: 어떻게 할까요?

ICW: (지능범죄수사팀으로 보내세요.)

보영: 지능범죄수사팀이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12월 전화통화로 이미 물어본 적 있던 질문에 대한 똑같은 대답이라 ICW이라 직감했습니다. 그리고 호칭 없이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를 하는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이거나 부부일 거라 확신이 들었습니다. 고소장은 무사히 접수되어 지능범죄수사팀으로 인계되었습니다. 2월 상반기 정규인사이동을 앞두고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실수라면 본청이 아닌 범죄발생지에 접수한 것, **경찰서로 온 지 1년 만에 ICW이 다른 곳으로 전출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일주일 만에 사건은 ICW의 9년 후배에게 배당되었고 고소인조사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아침부터 언제 도착하냐고 전화가 걸려오고, 고소를 하러 갔는데 피의자로 몰리는 상황,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강요, 협박, 직권남용이 발생합니다. 경찰을 믿지 않기에 모든 상황에 대한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갔습니다만, 식사도 없이 10시간 가까이 심야조사에 지쳐 울다가 결국 변호인을 호출합니다.


 고소보충 조사를 맡은 수사관 Sung은 160cm 남짓한 키에 50대처럼 보이는 젊은 꼰대입니다. ICW과 동일한 '경감'으로 오전 조사를 마치고 오후가 되자 뜬금없이 '무고죄'로 인지해 압수수색과 체포영장을 발부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습니다. 치사하게 여자를 조사실에 고립시키고 팀 동료에게 감시를 시킵니다. 정작 본인은 점심 선약이 있다면서 나가서 밥을 먹고는 한 시간 뒤 돌아옵니다. 이 모든 뻔뻔스러운 상황은 CCTV에 고스란히 녹화가 되었고, 다음날 바로 증거보전신청으로 영상자료를 확보했습니다.


연주: 고소인 보충조사 여기서 중단하겠습니다. 경감정도면 상식이 통할 줄 알았는데 상식 이하네요.

Sung: 지금 저보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연주: 여기 두 사람 말고 또 누가 있나요?

Sung: 고소취하할 기회를 드렸는데도 왜 이러시죠? 자꾸 이러시면 작년 원사건 인지수사 들어갑니다.

연주: 이미 종결된 사건을 별건으로 조사하려는 저의를 모르겠군요. ICW 경감님하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대질신문 신청합니다.

Sung: 수사는 제가 합니다. 동일서 관할이라 피고소인 조사는 이곳에서 할 수 없습니다. 이 사건은 경찰청으로 가기 전에 종결할 거니, 존경하는 선배님을 맘대로 오라 가라 명령하지 마세요.

연주: 이런 식으로 수사 제대로 하지 않으시면 변호사 부르겠습니다.

Sung: 그러시죠. 저희도 민원인보다 변호사님들하고 이야기하는 게 더 편합니다.

연주: 과연 변호사분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아침 경찰서 로비에서 만났던 모 일간지 창업주의 손주 수습기자에게도 현재 진행상황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작년부터 대기를 타던 변호사에게 전화를 하고 수임료 전액 계좌이체를 마치자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변호사 Yoon이 도착합니다. ICW 경감과 대학시절에 룸메이트였던 동기이지만 개인적인 친분은 없다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앞뒤가 꽉 막혀서 융통성이 없는 ICW과는 달리, Yoon은 30대에 경정으로 은퇴해 로스쿨을 졸업하고 2014년 검사 커플로 커리어를 이어온 인재입니다. 어머님이 누구시길래 키도 훤칠하고 인상도 훤한 호감형입니다. 마침 ** 경찰서 계장으로 있는 동기들을 한꺼번에 호출하면서 경찰대 동창회를 방불케 하는 진풍경이 펼쳐졌습니다. 기라성 같은 선배들의 대거 등장에 당황했는지 Sung 경감은 구석에서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고 서있더군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받은 만큼 돌려주는 것이 정의라 내부 고발과 징계를 의논했습니다. 곧 본청으로 전출을 가는 Sung에게 깜짝 선물을 준비합니다. 직권남용, 공무상 비밀누설죄, 피의사실 공표죄, 개인정보보호법위반, 직무유기 등 공무원 징계규정에 해당되는 모든 죄목을 걸어서 청문감사실에 수사심의를 넣었습니다. 94년 생 경찰관이 그런 태도를 배워 현장에서 수사에 임하는지 한심했습니다.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뜻도 제대로 모르는지 스스로를 '본직(本職)'이라고 칭하며 진술조서를 작성해 놓은 무지함에 일갈을 하고 싶어 졌습니다. 평소에도 한글 맞춤법을 수시로 틀리는지 후배들에게 팀킬을 당하고, 반 시간이 넘게 조서확인하며 첨삭을 해주었는데도 오탈자가 너무 많았습니다. 중고등학교는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대학을 간 것인지 여러 가지 의문이 밀려드는 밤이었습니다. 피해자라고 경찰이 당신을 도울 거라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혼자 온 고소인을 노골적으로 희롱하고 고소를 취하하라고 은근한 협박과 강요까지 하네요. 약자는 절대 건드리지 않아야 했는데 선을 넘었네요. Sung 경감! 로스쿨로 탈출하고 싶으면 어서 가세요, 외모 경쟁력도 실력도 없다면 조직밖에서는 자연도태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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