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구순 아버지는 커피 원두 한 알까지 60g을 정확하게 측정해 에스프레소를 내립니다. 몇 년 전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고 마음을 잡을 루틴이 필요하셨을 겁니다. 카페인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딸을 위해서 매일 아침 정성스럽게 에스프레소를 네 잔 뽑습니다. 브레빌에서 나온 신제품 바리스타 터치 임프레스는 버튼만 누를 수 있으면 에스프레소를 반자동으로 내려주기에 특별한 자격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딸아이는 늘 샷추가를 해서 진하게, 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기에 샷 3잔은 딸에게 그리고 샷 1잔은 아버지 당신께서 따뜻하게 드십니다. 달달한 인생을 영위하려면 커피는 쓰게 마시는 게 좋다는 철칙으로 살아왔기에 설탕이나 시럽은 일절 첨가하지 않습니다. 에스프레소를 뽑는 행위는 마치 종교의식과도 같이 정확한 시간에, 엄숙하고 조용하게 이뤄집니다. 아버지가 매일 커피를 뽑는 시간은 아침 식사를 끝낸 8시 5분입니다. 그런 아버지가 쓴 증인진술서와 탄원서를 무시하다니, 당신은 선을 넘었습니다.
"아빠, 경찰서나 검찰청에서 우편물이 오더라도 놀라지 마세요."
"응 그럼요, 나는 잘 해결될 거라고 믿어요."
"사건 진행상황과 통지서라서 종이만 아깝지 내용도 몇 줄 없습니다."
"내가 출석해서 증언을 해야 하면 알려줘요. 내 목숨이 붙어있는 한 연주를 도와줄게요."
"판검사님들은 제대로 배운 분들이시니까 아빠의 글을 이해하실 거예요. 그 경찰이 비상식적이었지."
"그 경감이라는 자는 애비애미도 없는 사람인가 봐요. 그러니 내 탄원서를 읽지도 않았겠지요."
"언젠가 죗값을 받는 날이 있겠죠. 손해배상청구를 했으니 법의 판단을 기다려보세요."
맞아요, 나는 경감님과 마주친 적이 있습니다.
2015년 사촌동생 지수와 점심약속이 있어 가로수길에 갔습니다.
동생이 여자인데 키가 178cm로 커서, 둘이서 있으면 늘 내가 동생이나 후배인 줄 오해를 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키가 더 큰 남자분과 인사를 하더군요. 잠깐이었지만 모델처럼 마르고 커서 놀랐었고요.
경찰대 출신 로스쿨 선배라고 소개를 했는데 활짝 웃으며 인사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주말에 어울리지 않는 줄무늬 넥타이에 회사원 같은 슈트를 입고 나오다니
참 패션센스가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습니다.
2017년 부활절 미사에서 우연히 당신을 만났습니다.
방사능이 우려되었지만 후배 결혼식으로 일본을 방문했고, 어느 가톨릭 교회였어요.
독특한 자리라서 한인이 또 있을까 싶었는데 당신이 한 친구분과 견진성사를 하러 방문했더군요.
밝은 체크무늬 슈트에, 윈저 매듭으로 하늘색 넥타이를 매고, 왼손 약지에는 묵주반지가 끼워져 있었습니다.
결혼반지일 수도 있다는 합리적인 의심도 들었지만 임관반지 혹은 묵주반지라고 결론 내렸습니다.
남자 둘이서 손을 수줍게 잡고 견진성사를 하러 들르는 것은 평범하지 않은 상황이니까.
당신은 ‘암브로시오’라는 학자의 세례명으로, 그분은 ‘가브리엘’ 천사의 세례명이었어요.
괜찮아요, 다 이해합니다. 난 적어도 내편에게 비밀은 지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2018년 빌라왕 검거 언론브리핑으로 얼떨결에 포토라인에 나온 당신을 보았습니다.
언론에 내 얼굴을 박제시키는 일이라 팀에서도 다들 등 떠밀고 발뺌을 했겠지요.
몇 달을 고생했는지 눈은 퀭하고 다크서클이 두 뺨에 내려오고 입술은 부르터있었죠.
빳빳하게 다린 청록색 제복에 신분증을 목에 걸고 당황하는 얼굴로 걸어 나왔습니다.
플래시가 터지면서 긴장했는지 준비해 온 원고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배경으로 경찰청 로고가 보이는데 날개 부분이 정확히 당신의 날갯죽지에 오버랩되었습니다.
보통 경찰들은 머리정도에서 뿔처럼 걸리는데 키가 큰 당신인 줄 한눈에 알았습니다.
"틀린 질문에 맞는 답이 나올 리가 없잖아?"
-영화 <올드보이>
송치결정서를 찬찬히 읽어보니 '피의자의 거짓말'에 대한 언급이 수십 차례 나와 있습니다. S 경장의 거짓말이 훨씬 더 많으면서 내가 한 말들이 모두 거짓이라니 가히 명예훼손에 해당하는 폄하입니다. 인간은 자아가 형성되는 3살부터 누구나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에 200번, 즉 8분에 한 번꼴로 거짓말을 하는 셈입니다.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는 하얀 거짓말부터 범죄자들이 하는 새빨간 거짓말까지 거짓말의 스펙트럼은 다양합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함무라비의 정의로 갚아주기로 했습니다. S 경장을 '허위공문서 작성 및 동행사'로 고소하는 고소장에는 그의 새빨간 거짓말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했습니다. 87분에 해당하는 경찰청 공식 녹음파일을 비용을 지불하고 녹취록으로 만들었습니다. 전용플레이어가 있어야만 들을 수 있어 복제하거나 듣는데 불편합니다. 난생처음 속기사무소에 의뢰한 녹취록은 음질과 시간당 비용이 책정됩니다. 뿐만 아니라 고통스러운 그 시간을 수십 번씩 반복해서 듣기가 힘듭니다. 초안은 공인속기사가 작성하지만 검토는 내가 할 수밖에 없어 고막에서 피가 나도록 AI 크로버노트로 드래프트 시트를 작성하고 암기할 수준으로 구간반복 청취했습니다. 덕분에 당시 인지하지 못했던 S 경장의 전라도 사투리 억양이라든가, 삼단봉으로 위협하며 신경질적으로 툭툭 치는 소리, 발로 책상을 퉁퉁 걷어차는 소리 등을 캐치했습니다. 직권남용에 의한 권리행사방해, 협박, 강요 등 여러 죄목이 추가되는 순간이었죠.
만일 경찰서에 출석한다면 꼭 영상녹화를 하기 바랍니다. 변호사 없이 고소를 하거나 고소를 당한 분이라면 반드시 영상녹화를 추천드립니다. 미란다원칙 고지부터 조서를 검토하는 것까지 전체 과정을 담아야 하기 때문에 조사관도 몸을 사리고 언행에서 조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측면과 정면 앵글이 두 가지로 제공되기에 영상 사각지대가 거의 없습니다. mp4로 연속 저장되어 코덱만 준비되면 언제든 플레이가 가능합니다. md5라는 원본임을 증명해 주는 암호화된 파일까지 함께 제공되니까 영상 조작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반면 CCTV 영상은 감응형이라 특이하게 비연속적으로 녹화가 됩니다. 그러니까 움직임이 없으면 기록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화질은 영상녹화보다 좋지만 아쉽게도 음성이 없습니다. 대신 표정이나 입모양 등 움직임을 세세하게 볼 수 있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유추까지 가능해 보입니다. 만일 고화질의 영상이 증거로 필요하다면 휴대폰, 블랙박스, 전용녹음기 등 스마트기기를 사전에 준비해서 따로 녹음이나 촬영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형사소송이든 민사소송이든 오직 증거만이 가장 확실한 증명이 되어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