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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Mar 19. 2024

하마터면 고백할 뻔했다

이스탄불에서도 경찰차만 보였습니다 Copyright 2024. Diligitis. All rights reserved.


ICW: 경감 ICW입니다.

연주: 어... 이게 아닌데... 저기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사건에 대해 여쭤볼 것이 있어서요.

ICW: 네. 사건번호나 성함 말씀해 주시겠어요?

연주: 2023-****

ICW: 잠시만요, 성함이 구연주 님 이신가요?

연주: 네, 4월에 경찰서 출석 조사를 받고 6월에 보완수사가 내려왔고 9월에 송치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ICW: 네, 기억합니다. 오래전 종결된 사건이군요.

연주: 그런가요? 제가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지 못해요. 담당 수사관이니 혹시 여쭤볼 수 있을까요?

ICW: 아시겠지만 모 여대 대자보 사건이었고 CCTV 증거가 있었습니다.

연주: 집에서 자고 있었는데 CCTV에 제가 찍혔다는 황당한 상황입니다. 어떻게 피의자로 특정된 것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고소인을 무고죄로 고소하려고 합니다.

ICW: 성명불상으로 고소장이 접수되어서 무고죄는 성립이 안됩니다. 4명 참고인들 진술도 있었고요. 고소인이 제출한 사진도 있었고요. 원한을 산다거나 당시 이해관계가 좋지 않았던 분들이 계셨나요?

연주: 동네에서 불법 종교단체에 가입하라고 아주머니들이 집으로 찾아와서 강요했는데 거절한 적 있습니다. 그 종교단체는 고소인과도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엮었길래 제가 피의자가 되었나요? 혹시 휴대전화 압수수색이라도 하셨나요?

ICW: 통신 3사 영장을 받은 것은 맞지만 사건 발생지에서 연주님의 그 어떤 흔적도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연주: 경감님도 함께 증거물들을 확인하고 수사를 지휘하셨던 것 아닌가요?

ICW: 저는 현장에 가지 않습니다. 팀원들이 수사보고서를 작성해 올리면 사실관계로 판단할 뿐입니다.

연주: 그럼 법리적으로 한 치의 의심도 없는 판단이었다는 말씀인가요?

ICW: 현재로는 그렇습니다.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연주: 사건이 송치된 시점들이 하필 6월 휴가 직전에, 9월 추석연휴 전이라 올해 휴가는커녕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일부러 고생하라고 날짜를 그리 정했나요?

ICW: 아닙니다. 고소장이 접수된 시점이 3월 말이다 보니 3개월 내에 수사를 마무리하라는 규정이 있어 사건은 많고 수사관은 부족하고 밀려 사건을 처리하다 보니 월말이 되었습니다. 고의적으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는 거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연주: 알겠습니다.

ICW: 추가로 궁금한 것이 있으신가요? 언제든 전화 주시면 친절하게 답변해 드리겠습니다.

연주: 알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2023년 11월 10일 금요일 아침 10시, 원점에서부터 사건을 재구성해보려고 **경찰서 민원실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런데 사건번호와 이름을 이야기하니 몇 차례 전환이 되면서 순식간에 담당 수사관 ICW에게 연결을 해버리는 참사가 일어났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중저음으로 무게를 잡기는 했지만, 앳되고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였습니다. 충청도 악센트가 있어 말투가 느리지만 신중히 경청하면서 대답했습니다. 보태거나 숨기는 것 없이 사실을 말해 줄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6월 통지서에 직통번호가 있었는데 진작에 담당팀장에게 전화 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첫 번째 통화에서 얻은 단서들을 바탕으로 국민신문고에 편지를 띄웠습니다. 그가 받아서 읽으라고 처리기관을 콕 집어 지목했습니다. 그리고 검사님과 만날 대망의 스케줄을 잡았습니다. 때론 열 장의 문서보다 한 마디 말과 표정이 진실하게 전달될 수 있으니까요. 11월 13일 아침 10시 ICW에게 두 번째 통화를 했습니다.


ICW: 경감 ICW입니다.

연주: 안녕하세요. 지난주 전화드렸던 구연주입니다. 궁금한 것이 있어서 전화드렸습니다.

ICW: 네, 말씀하십시오.

연주: 정보공개청구로 고소장에 접수된 날짜와 장소로 112 신고건을 받아 보았는데 출동기록이 없었습니다. 주말에 모 여대에 대자보가 붙었던 것이 사실인가요?

ICW: 신고로 접수된 것이 아니라 고소장으로 접수가 되었습니다. 최초 발견자가 따로 있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연주: 고소인이 최초 발견자가 아니라는 말씀이시군요. 그럼 지난번 언급하신 참고인 4명 중 최초발견자가 있나요? 미화원 이후선에 대해 여쭤보는 겁니다.

ICW: 잠시만요. (마우스 폭풍 스크롤 소리) 네, 참고인 4명 중 이후선 씨도 있습니다.

연주: 역시 그랬었군요. 그럼 나머지는 장 씨 여자들이겠고요.

ICW: 어... 어떻게 아셨죠?

연주: 그 사람들 자매들이니까. 몰려다니면서 계를 들라며 삥 뜯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ICW: ㅋㅋㅋ (웃음 참는 소리)

연주: 내일 검사님과 면담하러 갑니다. 그전에 확인해야 할 사실이 있어서요. CCTV를 증거물로 제출했다는데 S 경장은 경찰리 아닙니까. '권한 없는 자에 의한 압수수색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판례를 찾았거든요.

ICW: 팀에서 허 경위님이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경위면 경찰관이 맞고요.

연주: 아, 그랬었군요. 미란다원칙 고지하러 잠시 들어오셨던 긴 머리에 히피펌 하신 분이요?

ICW: 네, 맞습니다. 경찰대 졸업해서 나이는 어리지만 순경 아니고 경위 맞습니다.

연주: 수사 1팀은 면접으로 엘프 종족만 뽑나요? 다들 모델처럼 훤칠하고 빛이 나는 겁니까 질투 나게…

ICW: 구연주 님, 제가 아시는 분일까요?

연주: 글쎄요, 몇 년 전 경감님 언론브리핑 영상을 찾아봤습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수사과정에서 마주친 적이 있어야지요. 아는 사람이면 상황이 달라지나요?

ICW: 경찰도 사람인데 대학원 선후배나 동문이라면 정상을 참작할 수 있었지 않겠습니까. 귀하의 사건이 송치가 되어 담당팀장으로서 유감스럽지만, 검찰 수사 중이라 만족할만한 답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연주: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요. 또 전화드리겠습니다.


 검찰청에서 면담을 하고 12월이 되었습니다. 연말은 다가오는데 마음은 초조해지고 답답함에 나도 모르게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발신자 번호가 보이는지 ICW 경감은 관등성명 없이 전화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연주: 안녕하세요, 피의자 구연주입니다.

ICW: 네. 발신번호가 떠서 알고 있습니다. 검사 면담은 잘하셨나요?

연주: 검사님이 추가서류 그만 제출하라고 타박하시던데요. 6월부터 다섯 번을 갔으니 **검찰청 구내식당도 익숙합니다. 대체 결과는 언제 알 수 있는 것일까요?

ICW: 2월에 인사이동이 있어 크리스마스 전에 결론이 날 겁니다. 전산 입력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거든요.

연주: 경감님은 어떻게 예측하십니까? 혐의 없음 받으면 맞고소하러 경찰서 가도 됩니까? 그땐 경감님과 뵐 수 있나요?

ICW: 물론입니다.

연주: 만약 구공판 가게 되면 경감님 증인으로 신청해도 됩니까? 속이실 분은 아닌 것 같아서요. 사건 관련해서 객관적으로 증언해 주실 분이 경감님 말고 없습니다.

ICW: 결백하다면 검찰에서 혐의 없음 받으실 겁니다.

연주: 참! 경감님이 쓰신 두 편의 논문 잘 읽었습니다.

ICW: 저는 논문을 한 편밖에 쓰지 않았는데요…

연주: 일본어로 된 공무원 장기연수보고서, 대학원 논문의 살라미 퍼블리케이션 맞지요?

ICW: 그걸 어떻게…

연주: 저도 일본에서 근무한 적이 있습니다. 사촌동생 구지수가 경감님과 대학원 선후배로 라이벌이었고요. 모범생으로 성적 장학금 두 번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ICW: 아, 이런...

연주: 한승주 지도교수님이던데 논문 읽다가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왜 소년범에 대한 연구만 하는 거죠? 경제범죄수사팀, 수사구조 개혁팀에 계셨던 걸로 아는데.

ICW: 연구는 학문적 호기심으로 하는 거니까, 일하고는 차이가 있습니다.

연주: 네, 물론 알지요. 가설과 추론이 너무 밋밋해서 본인 경험을 주지화한 줄 알았습니다. 수사과정에서 저에 대해서 불필요하게 조사하셨으니 '지피지기 백전불태 (知彼知己 白戰不殆)'라고 경감님에 대해서 궁금해졌습니다.

ICW: 졸업하고 10년 동안 논문이 단 한 번도 인용이 안되었는데 찾아서 읽어 주시니 황송합니다.

연주: 별말씀을요.


 서로의 이름, 전화번호, 음성에 익숙해지면서 대화는 매끄럽게 흘러갔습니다. 여러 번 통화로 이미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라포 (rapport)가 형성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목소리가 잠시 흔들리기도 했지만, 떳떳하게 만나려면 나의 무죄를 증명해야 했습니다. 그때 ICW 경감은 **경찰서에 온 지 1년 만에 본청으로 갈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제 사건을 엉망으로 결재한 채 도망치듯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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