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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J May 18. 2024

우리들의 베이킹 클래스

DALL.E 3로 재현한 결혼 10주년, 그리고 베이킹클래스

 사건의 발단이자 공통분모는 베이킹 클래스였습니다. 중년이 되어 안 해본 것을 해보겠다고 잠시 팔자에도 없는 한 눈을 팔았습니다. 유튜브 방송보다 배울 것 없고, 자격증도 못 따는 수업을, 시간이나 때우려고 다니는 전업주부들의 계에 동참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결국 겨울 한 시즌만 듣고 재등록하지 않았습니다. 커리어우먼이 자신들의 편에 서지 않아 괘씸했는지 대자보 자작극으로 위계공무집행방해를 하며 신고를 하였고 저는 그 덫에 걸렸습니다. ICW 경감의 아내 역시 구석 어디에선가 케이크 시트를 만들고, 과자를 굽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 허접한 베이킹 클래스 사건을 자진해서 배당받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로 나는 탄수화물을 완전히 끊었습니다. 카톡사진을 둘러보니 당신은 여전히 생크림케이크와 달달한 빵을 즐기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제 불혹에 접어들었으니 중성지방과 혈관관리를 잘해야 할 겁니다. 180cm가 넘는 마른 체형에 ET처럼 내장지방으로 배만 나오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소처럼 일만 하다가 요절하면 슬프지 않겠습니까.


 당신 덕분에 내 삶이 성장했고, 당신을 지켜보면서 행복했고, 동시대에 당신처럼 멋진 라이벌이 있다니 감동스럽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선후배와 동기, 대학시절 룸메이트까지 만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들으면서 마치 탐정이 된 것처럼 짜릿했습니다. 당신이 나에 대해서 속속들이 알았던 것만큼, 나도 당신의 삶을 알아야 공평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서로 만난 적이 없지만 서로의 사진을 살펴보고, 전화로 목소리를 나누고, 주변인들의 세평을 들었습니다. 입양이라는 공통점도 있고요. 나는 당신의 논문을 읽었고, 언젠가 당신은 나의 소설을 읽겠군요. 숨겨왔던 나의 달란트와 취향을 발견하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경찰대 출신이면 35살에 일찍 경정을 달 수 있었을 텐데, 대학원 진학과 해외연수 등으로 10년을 늦춘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빵빵 터지는 당신의 웃음버튼과 경청하는 자세도 정말 좋았습니다.


 이렇게 굿바이 편지를 띄우지만, 사과는 정식으로 받겠습니다. 당신의 팀원 S 경장은 미씨 여성들의 꼬임에 홀려 편파수사를 일삼았고 상당 접대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좋은 게 좋은 거니까. 그에 반해서 장발 플러팅조차 먹히지 않던 나란 사람은 통제가 되지 않아서 불편하기 그지없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정기적으로 모시는 장인어른만큼이나 제 구순 아버님도 제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셨으면 합니다. 제 아버지도 40년 넘게 근속한 공무원이셨고 당신처럼 착하게 평생을 일만 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공부를 좋아하고 마르고 키가 큰 것이 닮았기에 당신을 보며 연민이 들었습니다. 아랫사람의 잘못을 대신 떠안으려고 하거나 세상 융통성이 없게 원칙만 앞세우는 벽창호 같은 모습이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착한 척 행동하는 모습이 주변 누군가에게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인생을 조금 더 살아온 예쁜 누나이자 열린 선배로써 드리는 충고입니다.


 어쩌면 내부징계로 끝날 수 있었던 일을 직무유기, 직권남용, 공무상 비밀누설 등의 죄목으로 공소를 제기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당신이 법대로 하라기에 그렇게 했을 뿐입니다. 당신이 싫어 번거롭고 긴 소송을 감내한 것은 아니라는 점 기억했으면 합니다. 나도 내 전문분야에 대한 직업윤리가 있고, 불의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겠지요. 서로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었는데, 당신도 나도 서로에 대해 몰라도 되는 TMI까지 알게 되어 참 민망합니다. 현명한 당신이라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지 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경찰을 그만두고 로스쿨에 진학한다면 그 선택또한 존경 합니다. 개인적으로 삼재라 힘들었는데, 당신 덕분에 에너지를 얻고 커리어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어서 고마웠습니다. 우리 인연이 닿는다면 당신이 종종 들르는 숯골원냉면갈비, ㅇㅇ 성당, 한강둔치, 크림라벨 카페에서 마주칠 수도 있겠네요. 정인, 편인, 편재의 사주로 올해부터 큰 변화가 몰아치는 당신을 이제 놓아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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