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노니까 얼굴 좋아졌네
"집에서 노니까 얼굴 많이 좋아졌네."
내가 추석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다. 그런 말을 들을때마다 나는 조금 당황했다. 난 정말 바쁜데, 논다니. 집에 있으면 왜 논다고 생각하지? 나, 놀지 않는데,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이 사회에서 집이라는 공간은 쉬는 공간이고, 9to6로 출퇴근하지 않는 이상 직장인으로 인정받는 분위기는 아니니까.
9to6(사실은 야근과 주말근무까지 했던) 회사를 다닐때, 워킹맘이라는 타이틀로 글을 쓰고 출간까지 했다. 가끔 회사를 그만두면, 나는 워킹맘이 아닐까?라는 의문을 가지곤 했다. 회사를 그만두는 날, 나의 글과 내 책은 어떻게 될까? 도 고민했더랬다.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싶을 뿐, 일을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20년간 했던 일은 싫증났고,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글 쓰는 직업으로 변경하기 위해 오랜 시간 준비했지만 먹고 살기엔 역부족이라 사업이라는 길을 택했다.
한동안 '난 집에서도 일해요'라는 말을 했다. 논다는 말에 불쑥 저항감이 일었기 때문이었다.
왜 사회는 직장인과 비직장인으로만 나뉠까. 그 사이에 있는 프리랜서와 창업, 주부의 일은 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것은 돈의 생산량 혹은 시간을 구속하는 양에 따른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만약 프리랜서로 수천만 원의 수입을 얻거나, 사업으로 몇백억 매출의 신화를 일으키거나 집안일을 한 달 단위로 계산해서 대기업 수준의 월급을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한다. 어딘가 소속되어 내가 깨어있는 시간의 절반 이상을 어딘가에 바친다면 또 이야기가 달라지겠지.
나도 한때는 편견을 가졌던 때가 있었다. 머리로는 '그래, 인정해. 집에 있어도 바쁘지.'라고 했지만, '그래도 나만큼 바빠?'라는 마음이 있었다. 요즘 그런 편견이 아주 처절하게 깨지고 있는 중이다.
시간관리가 오로지 내 개인 몫으로 떨어지고 난 뒤, 나는 시간 나누기를 더 치열하게 계산해야 했다. 출퇴근 시간에 읽던 독서를 일부러 시간 내서 읽어야 했고, 사업을 위해 주 1회 출근을 하고, 아이들 온라인 수업하는 동안 마케팅 관련 공부와 실습으로 책상 앞에서 오전을 보낸다. 오후엔 아이들 식사 챙기고, 라이딩을 한다. 출근할 때 점심시간에 하던 운동은 틈새 시간을 찾아내 겨우 하고, 글쓰기는 회사 다닐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새벽시간에 할애를 하고 있다. 주말엔 기사 원고를 쓰고, 글쓰기 멤버들 첨삭을 하고, 소설 수업 과제를 한다.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다 어느 날 눈을 들어보면 달력은 월말을 향해가고 있다. 매달 이런 숨 가쁜 일정 속에서 보냈다. 그러니 집에서 논다는 말에 저항감이 일었던 것일까.
그러다 어제 누군가의 질문을 받으며 문득 깨달았다.
"퇴사 후에 어떠세요?"
그 질문의 대답으로 "마음이 아주 평화로워요."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니, 저렇게 정신없이 보내는데 평화롭다니! 왜 그런 대답이 떠올랐을까.
생각해보니 몸은 바쁘지만, 마음은 즐거워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 즐거울 수밖에. 물론 수입은 이전에 비해서 많이 쪼그라들었지만, 먹고사는데 지장 없으니 되었다. 내가 원한 것은 글쓰기를 하고 싶었고, 그 시간을 확보하고 싶었고, 먹고사는데 지장 없고 싶었다. 필요조건이냐 충분조건이냐의 기로에서 나는 필요조건이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조금만 갖추어져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이란 걸 회사 밖에서 깨달아가는 중이다.
집에서 논다는 말을 인정하기로 했다. 나에게 지금 일은 놀이다. 사업이 조금씩 커져가는 것이 재미있고, 매일 아침 글벗을 만나서 글쓰기를 하는 것도 재미있고, 오마이뉴스에 연재기사를 발행하는 것도 재미있다. 재미있다고 해서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재미는 힘겨움을 넘게 한다. 그러니 어쩌면 나는 놀고 있는 것이 맞는지도 모른다.
더 바쁨에도 불구하고 내 얼굴이 좋아져 보이는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 아닐까. 나는 앞으로 더 열심히 놀아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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