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향기 수집하기
" 내가 외국에 살 때 산에 자주 갔는데, 나무들이 크고 좋아 보이긴 해도 숲에 향기가 없어. 향기가."
영어 스터디에서 만난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다. (특정 나라를 말하셨지만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 생략하겠다.) 나는 당시 해외에 가 본 적도 없었고 산에 큰 관심이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그게 어떤 말이었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다.
여름이 시작되는 날의 향기, 가을 아침의 향기, 비 오는 날 밤의 향기
최근, 시간이 생길 때마다 남산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주위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꽃이 피었는지, 낙엽이 언제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는지, 도토리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등 다양한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관찰을 눈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향을 다루는 직업의 특성을 살려 숲의 향기 또한 온몸으로 느끼려 한다. 등산을 시작한 지 세 달이 되어가면서 여름과 가을, 이렇게 두 계절의 산을 겪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느낀 점은 세 달 전, 태양이 뜨거웠던 그때의 숲의 향기와 비가 내린 가을 아침의 향기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한국인들이라면, 특히, 산을 좋아하고 즐겨 찾는 한국인들이라면 지금 이 글에서 내가 말하고픈 향기를 함께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초록의 나뭇잎 사이로 내리쬐는 햇빛, 그로 인해 생기는 선명한 그림자, 수분을 머금은 나무들이 뿜는 시원한 향. 태양은 뜨겁지만 건조하지는 않은 초록색 숲의 향.
그것이 바로 내가 느낀 여름 숲향이었다.
비 소식이 잦은 올 가을의 향은 또 어떠한가. 등산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종종 비 오는 날에도 산과 공원을 찾곤 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확실히 수분을 잔뜩 머금은 향을 느낄 수 있으며 더 무거운 나무 향이 난다. 떨어진 낙엽이 짓눌린 향도 느낄 수 있다. 향을 다루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이런 향들은 눈감고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어릴 적부터 향기로운 산과 숲을 접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이러한 우리 숲의 다양한 향을 좀 더 특별하게 생각하는 또 다른 분을 만날 수 있었다. 함께 조향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분은 시골에 사시면서 국내에 존재하는 각종 허브를 연구하여 아로마 오일로 만들고 싶다는 목표를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틈틈이 연구결과를 가져와 학생들에게 그 향에 대한 피드백을 받곤 하셨다. 주로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국가나 호주의 아로마 오일을 접했던 우리는 한국 땅에서 나고 자란 고유 식물의 향을 시향 하는 경험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런 향들을 맡으니 그동안의 아로마 오일로는 접할 수 없었던, 낯설지 않은 익숙함을 느낄 수 있었고 편안함까지 느껴졌다.
영어 스터디에서 향기 없는 외국 숲에 대해 말해준 분이 없었더라면, 그 말을 내가 기억하지 못했더라면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우리의 숲을 느낄 수 있어서, 향기를 맡을 수 있어서, 그를 통해 계절을 느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고 감사하다.
조향 실습을 할 때 항상 경험을 바탕으로 그 기억을 떠올려 비슷한 향을 만들곤 했는데 앞으로는 우리 숲의 향을 좀 더 구체화하여 계절에 따른 숲향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다. 그래서 한국인에게는 친숙한 편안한 향을, 외국인에게는 한국의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향을 선보이는 것이 나의 목표이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오늘도 나는 향을 수집하러 숲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