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투잡 이야기
우연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중등부 학원 강사로 일할 때였다.
작은 학원에서 홀로 영어 문법을 담당하다 보니 수업 시간 외에 준비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 담당 시수는 적었지만 그에 맞먹는 시간만큼 자료 준비에 할애하곤 했다. 그렇게 매일 수업과 더불어 단어 시험, 작문, 숙제 확인 등을 병행하다 보면 어느새 내신 기간이 되어 있었다.
" 자, 다음 주부터 내신 준비 시작합니다. "
" 하.. 너무 싫어요. "
여기저기 터져 나오는 학생들의 한숨에 '나도..'라는 말을 마음속으로 내뱉었다. 시험 준비가 힘든 건 선생님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내가 다닌 학원은 학생 수가 많진 않았지만 학교도 다 다르고 학년도 달랐다. 각 학교의 교과서와 진도에 맞춰 학년별로 가르치다 보면 평소보다 2배나 많이 수업해야 한다. 그래서 주말, 공휴일도 반납한 채 2~3개월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마치 전시 상황처럼 학생들도 나도 모두 힘이 들긴 했지만 낙오자 없이 성실히 따라오는 학생들을 보면 힘이 났고 노력만큼의 좋은 성과를 보면 행복했다.
이런 달콤함도 잠시, 미스터리 하게도 숨을 좀 돌리려 하면 마치 데자뷔인 듯 또다시 내신 기간이다. 꿈인 걸까? 그렇게 꿈속에 있는 것처럼(?) 1년이 정신없이 흘렀다.
내 인생에서 가장 열심히 일했던 때가 바로 그때였던 것 같다. 어쩌다 쉴 수 있는 주말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누워만 있었고, 퇴근 후 밤 12시가 다 되어 집에 돌아올 땐 항상 맥주 한 캔을 손에 쥐고 있었다. 물론 좋은 점도 많고 재미있는 일도 많았지만 쳇바퀴 같은 일상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 볼 겨를이 없게 만들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영혼이 뽑혀 노예처럼 일만 하는 좀비가 된 느낌이 들었다.
그때 찾아가게 된 곳이 바로 캔들 공방이었다. 사실 캔들에는 관심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다. 그런데 왜 캔들을 배웠냐고 묻는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조용하게 할 수 있는 취미를 갖고 싶었다.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라 취미만큼은 혼자, 조용히 하고 싶었다.
둘째, 우연 혹은 운명이었다.
기차 안에서 뒤적이던 잡지에 캔들 자격증으로 공방을 차린 어떤 사장님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캔들이라곤 제사상 양초밖에 몰랐던 나인데 그 인터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다. 우연이었을지도 혹은 운명이었을지도.
캔들을 만든다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왁스를 만져보고 시향을 해보고 심지를 끼워보며 캔들을 만들었다. 특히 시향을 하며 나의 취향을 알게 되었다.
'아, 나는 이런 향을 좋아하는구나, 음.. 이 향은 좀 별로네.'
이런 생각을 하며 향을 고르는 순간 마치 만화 '신의 물방울'에 나오는 주인공이 된 것처럼 진지해졌다. 그리고 어느새 기분이 편안해졌다. 잔잔한 음악과 향기로 가득한 공간에서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만든 첫 캔들을 잊을 수 없다. 따뜻하지만 투명하고 깨끗한 꽃향. 그것이 바로 나의 첫 캔들이었다.
내게 캔들을 만든다는 의미는 나를 알아간다는 뜻이고 힐링이자 명상의 시간이다. 이것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공방에 와서 신중히 향을 고르고 왁스에 섞고 투명한 용기에 붓는 사람들의 행복한 표정을 보면 말이다.
하루의 끝에 내가 캔들을 만든다면 그날이 유독 힘들었다는 뜻이고 지치는 날이었으며 위로받고 싶다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나는 향으로, 캔들로, 나를 조금씩 표현하는 중이다. 그렇게 다시 영혼 없는 좀비에서 향기로운 인간으로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