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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원 Jun 29. 2021

유리컵과 자취의 상관관계

나의 투잡 이야기

한국어 수업을 하기 위해 학생의 회사를 찾아간 날이었다.


“ 선생님, 사무실에 이것밖에 없어서 죄송해요. ”


물이 담긴 머그컵을 내밀며 민망해하는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 왜 미안해요? ”

“ 사무실에 유리컵이 없어서요.. ”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한동안 잊고 있던 평범한 일상이 떠올랐다.


무더운 여름날, 델몬트 병에 담긴 시원한 보리차를 유리컵에 따라먹던 초등학교 시절. 그때 투명한 유리컵에 담긴 누르스름한 빛깔의 보리차는 그 어떤 탄산음료보다도 더욱 시원하게 보였다.


반대로 추운 겨울이면 할머니께서 두꺼운 머그잔에 우유를 따뜻하게 데워 설탕을 타 주셨던 것도 생각이 났다.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 앉아 뜨겁지만 달달한 우유를 호호 불며 열심히 식빵을 찍어먹곤 했었다.


우리 집 찬장에는 항상 각종 유리컵과 머그잔이 다양하게 있어서 시원한 음료는 유리컵으로, 따뜻한 차는 머그에 마셨다. 하지만 지금 홀로 사는 이 집에서는 더 이상 유리컵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그날 처음으로 깨달았다.


자취를 시작했을 땐 나도 다른 이들처럼 아기자기하고 예쁜 식기류를 많이 샀었다. 하지만 설거지하며 깨뜨리고, 청소하며 깨뜨리고, 그냥 아무 이유 없이 부딪혀 깨뜨리면서 유리컵이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자취로 인해 컵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워낙 덜렁대는 성격이다 보니 예전에도 자주 깨뜨렸는데, 지금과 다른 점은 그걸 치우는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친다며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신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부모님이셨다. 그때의 나는 그저 멀뚱히 지켜보다가 죄책감은 금방 던져버린 채 유리컵을 계속 쓰고, 또 깨고 다녔다.


혼자 살게 되면서 스스로 치워야 하다 보니 유리컵을 점점 멀리했고 그 결과, 나의 찬장에는 온통 두꺼운 머그와 스테인리스 컵으로 가득 찼다. 이런 상관관계를 떠올리다 보니 문득 할아버지께서 항상 쓰시던 물컵이 어느 순간 크고 두꺼운 머그로 바뀌게 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여러 나라에서 온 다양한 학생들을 만나다 보면 새로운 것을 알게 되거나 깨닫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유리컵과 자취라는 생뚱맞은 연결고리도 발견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많은 것을 느낄 수도 있다. 그래서 한국어를 가르치며 나 또한 다양한 것을 배우고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오늘 수업 후 집에 가는 길엔 예쁜 유리컵 하나를 사서 보리차 한잔 시원하게 마셔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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