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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플라톤의 이원론에 대해 비판하는 몽테뉴

몽테뉴 <에세2> 12장 '레몽 스봉을 위한 변호' 중에서 일부 발췌

by 아란도




“그대가 우리에게 약속하는 쾌락이 내가 이승에서 느낀 그런 것들이라면, 그것은 무한과는 아무 공통점이 없는 것이다. 나의 타고난 오감 전부가 환희로 가득하고 내 영원히 바라고 갈망할 수 있는 최대의 만족감에 사로잡힌다 해도 우리는 안다, 그 역시 아무것도 아닌, 무無라는 것을.
내 것인 뭔가가 있다 해도 거기에 거룩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현재 우리가 지닌 조건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면 그것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멸할 인간의 모든 만족은 멸할 수밖에 없다.
저승에서 부모, 자식, 친구들을 알아보고, 그것이 우리에게 감동과 즐거움을 줄 수 있다면, 저승에서도 우리가 여전히 그런 기쁨에 집착한다면 우리는 지상적이고 유한한 즐거움에 속해 있는 것이다. 저 지고하고 거룩한 약속들을 어떻게든 상상해 볼 수는 있더라도, 그 위대성에 합당하게 생각할 수는 없다. 그것들을 합당하게 상상해 보려면, 상상할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초라한 경험에서 나온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상상해야 한다.”




정말 그러하다면, 그때의 기분은 어떨까? 내가 죽어서 만나는 가족과 친지들과 친구들에 대한 그때의 내 기분은 무엇일까? 우리는 죽기 전에 혹은 그 무렵에 아마도 어떤 생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죽으면 육신이 없다는 것을 안다. 이미 죽으면 몸은 내 몸이 아니게 된다. 죽어서 영혼이 계속 존속한다면, 그 영혼이 저승에서 실제적 육신적 고통을 경험할 수 있을까? 감정은 영혼이 이생에서 경험한 축적에 의해 느낄(떠올릴)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죽으면 그때는 모두 다른 무엇이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더 이상 인간은 아니므로. 그런데 가족과 친지, 친지를 만났다고 해서 정말 반가울 것이며, 현세에서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관계를 지속할 것인가? 그렇다면 죽음이 무슨 필요가 있을 것인가? 아니면 한데 뭉쳐 있어야 한다면, 죽음은 그야말로 고통이 아닌가? 좋은 관계와 안 좋은 관계에서 보자면, 영원히 좋은 관계가 있을 것인가? 또한 어린 모습으로 만나야 좋을까? 아니면 젊은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늙은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그 자신이 가장 기억하고 싶은 서로의 모습으로 만나는 것이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그건 자기 자신의 기억과 만나는 것이지, 그 사람을 만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죽은 그 사람은 자신의 그 모습으로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을 것인가? 어쩌면 모두 그 자신이 가장 좋았을 때, 건강했을 때의 모습으로 만나고 싶지 않을까? 그렇다면 이건 모두 왜곡된 것이다. 그리고 다 비슷한 또래에서 만나게 될 것이 뻔한데, 거기에 어떤 가족과 친지, 친구에 대한 감정이 그대로 유지될 것인가? 이렇게 본다면, 사후에 관한 것 역시 모두 기억일 뿐이다. 결국 이원론적인 세계관은 인류의 상상적 세계관일 수밖에 없다. 이원론적인 방식은 우리 정신의 차원이다. 우리는 이 방식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자신의 세계를 구현하는 방식이다.


몽테뉴가 말한 것뿐만 아니라, 이미 고대에서는 자연과 사물을 변화로 본다. 동양의 불교관도 그렇고 주역도 그렇다. 그리고 이미 변화한다는 것은 이 시대에서는 상식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상식만으로 우리가 만족할 수 있는가? 우리 안에 정말로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가? 사후에 대한 관계 지속에 관한 인간의 욕망은 아주 질긴 것이라고 본다. 그런데 인간은 사후에 관해서 그것은 전혀 다른 무엇이라고 생각하기를 멈춘다. 지속적이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현세에서 그 자신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추방당한 것 같은 고통을 느끼기도 한다.


예전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이미 그의 어떤 그 무엇은 인간 사회로 다시 회수된다고 생각했다. 아니 신체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것이 바로 나는 애도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하여도 여전히 우리는 사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모른다. 지독한 무지의 영역인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여전히 사후에서 이미 죽은 자를 만날 수 있다면, 반가울 것인가? 처음에는 그렇겠지만, 점차 무미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평등한 하나의 그 무엇 상태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인터스텔라'의 경우도 그렇다. 주인공 쿠퍼가 아버지였을 때는 어린 딸이 애틋하지만, 아버지는 그대로이고 딸만 노인이 되어버렸을 때는 이미 그것은 이상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다. 기억 속의 어린 딸(머피)과 노인이 된 딸을 보는 여전히 젊은 모습의 아빠(쿠퍼)의 입장에서는 이미 그 세계는 더 이상 현실이 아니게 된다.


기억 속에만 있는 잔상이 되어 버린다. 자식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어떤 관계만 주인공으로 남았으며, 나머지 모든 관계는 변해버렸다. 그렇게 아빠는 다시 그곳을 떠나서 그 자신과 맞는 세계로 떠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의 관계는 시간차가 만들어 낸 것이다. 아빠와 딸의 관계는 항상 나이 터울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친구라면 어떨까? 같은 나이의 친구가 어떤 친구는 그대로이고 다른 친구는 늙어버렸다면, 그래도 그 관계가 지속될까? 남편과 아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한 관계가 크게 비틀릴 때 우리는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시간은 같이 견뎌낼 것이다. 딸이 안 죽고 더 살았다면, 주인공 아빠는 딸의 곁에 더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기가 속할 세계를 찾아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변화가 일어날 땐 해체가, 따라서 죽음이 있다.
각 부분은 이탈하여 원래 자리에서 옮겨진다”
-루크레티우스-




피타고라스의 윤회와 그가 생각했던 영혼들의 주거 이동을 받아들인다면, 카이사르의 영혼이 들어간 사자가 카이사르를 흔들었던 감정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리라고 생각할 것인가? 또는 그 사자를 카이사르라고 할 것인가? 만일 그 사자가 여전히 카이사르라고 한다면, 아들이 당나귀의 몸을 입은 자기 어머니를 타고 다닐 수도 있고, 그 비슷한 엉뚱한 이야기도 가능하다는 것을 들어 플라톤의 의견을 논박한 사람들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종류 짐승의 다른 몸으로 바꿔 태어나면, 새로 태어난 것이 다름 아닌 제 조상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피닉스의 재에서 애벌레가 생겨나 새로운 피닉스가 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 두 번째 피닉스가 바로 첫 번째 피닉스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겠는가?
우리에게 비단을 만들어 주는 벌레는 죽어서 말라비틀어지는 것 같고, 바로 그 시체에서 나방이 나오고 그 나방에서 다른 벌레가 나오는데, 그 벌레를 여전히 처음의 그 벌레로 여기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일 것이다. 일단 존재하기를 멈춘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은 후에 시간이
우리를 형성했던 질료를 다시 모아
오늘의 상태로 복원해 주고,
우리에게 생명의 빛을 돌려준다 해도,
한번 기억의 실이 끊어진 다음엔
그조차 우리와 전혀 관계없을 것이다.”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플라톤이여, 그대가 어디선가, 내세의 보상을 향유할 것은 바로 인간의 영적인 부분이라고 할 때, 그 역시 거의 신빙성 없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눈구멍에서 뽑혀 몸에서 분리된 눈은 그 어떤 사물도 볼 수가 없다.”
-루크레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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