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킹 테이프 1개로 끝!
회사에서 일할 때, 아이들 교육에 여념 없는 엄마들을 보며 ‘나도 일 안 하면 내 딸한테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줄 수 있는데!’ 싶었다. 정작 주말에 아이와 씨름하다 보면 교육은 개뿔, 엄마인 내가 먼저 방전되어 핸드폰을 쥐여주거나 언제쯤 너 혼자 놀 거니... 란 생각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아이를 방치하기엔 너무나 소중한 시기, 3-7세. 앞으로 이 아이가 평생 가지고 살, IQ, EQ 등 뭔가 능력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란 어려운 소명을 짊어지고 오늘도 육아서를 펼치거나 발달에 도움이 되는 놀이를 찾아 헤맸다. 그러거나 말거나, 4살 아이는 옆에서 옷을 물어뜯고 놀자고 난리다.
“가만있어 봐. 놀이를 찾고 있잖아. 오 이거 좋겠다, 이것은 소근육 발달에 좋고요…협응력과 주도성을 기를 수 있고요…이거 하고 놀까?”
가만 보니 출발부터 왠지 (엄마) 주도적인걸. 아이랑 순수하게 놀려고 했는데 어느 순간 아이 뇌 발달을 위해 내가 고른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란 녀자는 너무나 모순덩어리다. 역시나, 아이는 3초 후 등을 돌린다.
‘이렇게 놀면 됩니다’라는 많은 육아서들을 보며 뭔가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공부로 주입된 놀이를 아이에게 선보이면 재미있을 리 없다. (우선 내가 재미없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봤다.
아이를 머리 좋게 만들기 위해 놀이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핸드폰 하는 시간을 확보하려고 놀이를 원한 것인가.
어머나, 둘 다였다...그 어느 쪽도 나와 아이에게 바람직하지 않다.
그래서 철저히 내 주변의 도구로, 기억 속의 놀이를 하나씩 끄집어내기로 했다. 밀키와 놀 때는 핸드폰으로 눈을 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엄마인 나도 좀 즐거워야 좋은 출발이 될 것 같았다. 공부를 1도 하지 않아서 구구단마저 헷갈렸던 시절, 10살까지 나는 열심히 놀았다. 그 때의 놀이가 세세하게 기억 난다. 순수하게 놀았던 시간이 내 재산처럼 느껴지는 건 단순히 내가 멀쩡히 대학 잘 가고, 순탄히 직장을 잡고 살아서가 아니다. 나만의 놀이인 그림과 영상 만들기를 업으로 삼았을 뿐더러, 삶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주변을 둘러봤다. 문구류 수집가인 나는 마스킹 테이프도 내 수집 아이템 중 하나다. 여행할 때마다 하나씩 사모으는데, 손그림을 그릴 때 마스킹 테이프를 적절히 사용한다는…이유를 갖다붙인다. 그냥 덕후. 이 중엔 저렴이 다●소에서 구입한 1000냥 테이프들도 있다. 오늘은 네가 희생해라, 천 냥 테이프.
1. 적당히 매트 (바닥은 노노, 여긴 아파트) 에 죽죽 선을 붙여줬다. (5분 소요)
엄마는 저질 체력이므로 고퀄리티는 사양한다.
2. 하는 김에 숫자도 만들어줬다. 테이프를 자르는 것은 놀이라고 우기며 밀키를 시킨다. (5분 소요)
3. 때마침 퇴근한 밀키 아빠도 참여시켰다. (2분 단축)
4. 그리고 말했다. “밀키야, 여기서 뛰어 봐”
5. 놀이 규칙을 모르는 밀키에게 시범을 보여줬다. 한 발, 두 발, 한 발 뭐 이런 식으로 가는 거야.
문제는 나중에 찾아보니 36개월은 한 발 서기는 할 줄 알지만 한 발로 뛰기는 할 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럴 모르는 엄마란 인간은 자꾸 규칙을 설명하려 한다.
“아니~ 한 발로 뛰어보라니까, 여긴 두 발 칸이고.”
하다가 아차 싶었다. 이미 밀키는 내 말이 들리지 않으며, 두 발로 콩콩 뛰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강시(?) 뛰기가 조금 시들해질 무렵, 다른 제안을 했다.
"엄마가 말한 숫자로 뛰어 볼까? 4에서 6으로, 2에서 7로!!!”
어라, 이건 통한다. 예전 같으면 숫자를 익히게 한다는 둥 뭔가 교육적인 측면을 머리에 먼저 떠올렸을 것이다. 이번엔 좀 다르다. 그냥 더 어려운 미션을 줘보고 싶었다. 점점 더 멀리 있는 숫자로 뛰게 하고 선을 밟으면 다시 하고, 성공하면 할리우드 액션 반응을 해줬더니 30분째 땀을 뻘뻘 흘리며 한다. 딸램이 요 일주일 동안 제일 많이 웃은 시간 같아 미안했다. 미리, 자주 좀 해줄걸.
그 다음은 신기하게도 아이가 룰을 만든다. 갑자기 선 밖으로 나가 안으로 멀리뛰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다시 안에서 바깥으로, 다른 지점으로 놀이를 확장한다. 그 때 알았다. 어른의 룰 따위, 개나 줘야 하는 것이었구나.
육아서에는 10분만 놀아도 된다는데, 한 시간이나 놀았다. 밀키는 서운해하면서도 졸려 한다.
나도 피곤한 것을 잊고 할리우드 연기에 심취했었다. 바닥에 붙은 마스킹 테이프가 너덜너덜해졌다. 뭐 어때. 마스킹 테이프는 얼마든지 있다.
창의력이란 단어는 흔해빠져서 너덜거리기 직전이지만 유아용 상품에 이 단어가 빠지지 않는다. 그렇게 중요한 '창의'가 뭘까. 나는 디자인 뿐만 아니라 일상의 전 분야에서 ‘한정된 자원에서 독창적인 발상을 끄집어 내는 것’이라 정의하고 싶다. 신기하게도, 아이들에게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고의 과정이다! 왠지 내 아이만 능력치가 부족할 것 같은, 어른의 불신이야 말로 최대의 적이다. 억지로 키우기 보다, 내재되어 있는 창의력이 나오는 놀이의 순간을 자주 만들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놀이의 규칙을 누군가의 지시 없이,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느껴진 시간이었다.
뛰어노니까 신체발달! 멋진 마스킹 테이프 패턴으로 아이의 미적 감각 높이기! 이런 얘기는 안 할랜다. 절연 테이프나 녹색 테이프라도 상관없다. 내가 느낀 이 놀이의 핵심 한가지 더. 더 어려운 미션을 주고 성취감을 쌓아가는 것이 정말 주요했다. 핫케이크 쌓듯, 성취감을 쌓아주는 과정이 왜 좋은지는 아동심리학자가 아니라도 알 수 있다. 왜냐면 우린 엄마이고, 부모니까.
인스타그램에서도 만나요! @milkybaby4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