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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r 25. 2017

#05, 한 여름의 오헨로미치를 걷다

걷고 걷고 또 걷고 (for #18~#19)

2015년 10월 18일 일요일 여전히 맑고 무쟈게 더움


아그네스 호텔 -12km - 18 恩山寺(Onzanji) - 4km - 19 立江寺(Tatsueji) - 후나노사토 - 10km - 가네코야까지 도보, 후나노사토에서 픽업


비라도 내려달라 빌어볼까


여행을 떠나오면서 제일 걱정했던 게 날씨, 태풍, 지진, 쓰나미 뭐 그런 거였다. 걷는 여행인데 비가 잦으면 그 불편을 어떻게 감수할지 신경이 쓰였다. 

막상 와서 보니 다행스럽게도 날씨만은 내내 맑음였다. 공기도 깨끗했다. 


호텔에서 묵으면 불편한 게 아침 식사, 7시나 되어야 먹을 수 있으니 소중한 아침 시간을 허비하게 된다.

그래도 굶을 수는 없기에 골고루 챙겨 먹고(아그네스 호텔, 호텔 조식으로는 먹을만하다) 7시 반에 호텔을 나서서 도쿠시마 시내를 남쪽으로 가로질러 걷는다. 그늘 하나 없는 55번 국도를 따라 인도를 걷는데 자동차가 쌩쌩 소리도 요란하고 공기도 덥혀놔서 아침인데도 벌써 얼굴이 발갛게 닳아 오르도록 덥다.


다른 아루키헨로상들은 다 어느 길을 가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했는 데 어디선가 노부부 한 쌍이 여자분이 앞에, 남자분은 뒤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길이 좁지는 않으니 다정하게 나란히 가도 좋을 텐데 꼭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걷는다. 여자분은 쌩쌩한 데 남자분이 힘겨워해서 종종 쉬는 모습이다. 씩씩한 여자분과 힘없이 착해 보이는 남자분의 조합이 쥐와 고양이 같아서 실소가 나온다. 

지루한 길에 입간판이 재밌다


시코쿠 여행이 다른 여행과 다른 건 외국에 나와 있다는 느낌이 거의 없다는 거다. 환경도 사람도 외관으로 봐선 우리나라와 거의 다르지 않다. 새로운 게 없으니 때론 지루하다. 다른 거라곤 입간판의 글자 정도? 그러니 오늘처럼 대로변을 걷는 일은 수행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지치기 쉽다. 어떤 면에서는 쇼산지 가는 산길이 더 좋게 느껴진다. 포장도로가 아닌 흙길이 간절하다. 


헨로미치가 꼭 하나만 있는 건 아니다. 온잔지로 가는 길도 55번 국도가 주이지만 샛길로 이어지다 55번과 만났다가 다시 갈라지는 길이 있다. 거리도 그닥 차이가 나지 않으니 다시 대로변을 걷게 된다면 가급적 이면도로를 이용하는 게 어떨까.


지독한 55번 국도는 가도가도 끝이 보이질 않는다.




12km니 세 시간을 예상하긴 했는데 10시 반에야 절 근처에 온 듯 '온잔지 주변 헨로 미치 맵'이 눈에 띈다. 아직도 조금 더 가야 하나보다. 결국 10시 50분에 산문을 들어선다. 

지도를 보며 걷는 일, 헨로 스티커를 찾아가며 걷는 일은 아는 길을 가는 것보다 더딜 수밖에 없다.


온잔지(恩山寺)는 원래 여인 금제의 도장이었다. 코보대사가 수행을 하고 있을 때 가가와현-코보대사의 출생지가 가가와현의 75번 사찰 젠츠지다-에서 어머니인 타마요리 고젠이 찾아왔다. 코보대사는 여인 금제를 해제하기 위해서 일주일간 폭포를 맞으며 수행을 하고, 해제에 성공하여 어머니를 맞아들여 효도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하니 온잔지에서는 특히나 부모님과 형제자매를 위해서 묵상을 바칠 일이다. 



19번 다츠에지(立江寺)까지는 4km, 딱 한 시간 거리인데 다행히도 대로를 비껴간다.

얕은 숲길과 한적한 마을을 지난다. 12시가 되어가는 데 숙소가 미정이라 비즈니스 료칸(료칸에도 비즈니스가 붙나?!) 광고판에 시선이 간다. 다츠에지에서 2km, 스도마리(식사 없이) 3000엔부터란다. 박선생님은 어찌하실 작정인지, 혼자였으면 하루 전에 숙소부터 정했을 텐데, 일일이 의견 여쭙기도 어렵고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하루 30km 가까이 걷는다고 가정했을 때, 19번 다츠에지에서 10km쯤 더 가서 20번 가쿠린지 아래 가네코야에 묵는 게 맞지 않나 싶은 데 아직 예약을 못해서 속으로만 조바심을 내고 있다.

새빨간 다리 난간이 양쪽과 3분의 2 지점 차도와 인도를 가르고 있는 다리를 건너 다츠에지에 도착하니 12시 반이다. 카메라가 여전히 시원치 않아서 스마트폰 사진 반, 카메라로 반을 찍어본다.


다츠에지는 칸쇼지(関所寺)의 하나란다. 칸쇼지는 프라임 일본어 사전 어플에서도 찾아지지 않지만 안내책자에 의하면 코보대사가 오헨로상의 평소 행동을 체크해서 그 행실이 나쁘면 그보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절이란다. 시코쿠에 칸쇼지는 19번 다츠에지를 시작으로 27번 고노미네지, 60번 요코미네지, 66번 운펜지의 총 넷이란다.


실제로 다츠에지에서 발이 묶였던 불륜 커플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1803년에 혼슈 남서부에 위치한 시마네현의 경(京)이라고 하는 여자가 남편을 살해하고 정부와 도망을 쳐서 시코쿠 순례에 나왔다가 이 절에서 머리카락이 종의 밧줄에 얽히고 감기었는데 참회하여 생명은 건졌으나 머리카락은 밧줄에 얽힌 채로 잘라 절에 봉납했다는 것이다. 

나는 무사히 다츠에지보다, 고노미네지보다, 요코미네지보다 운펜지보다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카메라는 망가져도 오헨로 미치에 집중해야 하는 걸까



역시나 숙소가 문제가 된다. 가네코야 예약이 만실이란다. 안내책자에는 다츠에지부터 가쿠린지까지 숙소라곤 가네코야 밖에는 없는 걸로 나와 있다.

그럼 이 근처에서 묵어야 하는 걸까. 아직 1시, 오늘 16km 밖에는(?) 못 걸었는데? 헐~ 혹시 나 다츠에지에서 묶인 거? 무슨 잘못을 했다고...


다츠에지 인근의 후나노사토에서는 오늘 묵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만 걷기에는 너무 이르니 배낭을 맡기고 20번 가쿠린지 방향으로 걸을 수 있는 만큼 걷고 나서 다시 돌아오기로 한다.

다행스럽게도 후나노사토 안주인께서 픽업 서비스를 해주겠단다. 힘닿는 데까지 걸어가서 전화를 하면 데리러 와주겠다고. 감사해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후나노사토, 바닷가 인근이라 그런 이름이 붙은 듯한데 집도 시골집마냥 아기자기한 게 정겹게 생겼다.

숙소가 해결되니 시장기가 돈다. 

오늘은 더 이상 납경받을 일도 없으니 카메라랑 핸드폰만 달랑 들고 신작로를 걷다가 논두렁 건너편에 우동집 현수막을 발견하곤 저절로 발걸음이 그리로 간다. 건물은 허름한 데 가케우동이 싸고 맛있다.

같은 자동차 도로라도 28번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은 55번 도로만큼 나쁘지 않다. 양쪽으로 논과 밭을 지나 적당한 거리의 야트막한 산에는 유난히 가느다란 대나무가 많은 데 오후 태양빛을 받아 금빛 빛깔이 곱다.

목표는 가네코야까지로 잡는다. 내일 일정도 만만치 않은 게 20번 가쿠린지, 21번 다이류지가 모두 500m 급 헨로고로가시(お遍路転がし)다. 물론 쇼산지만큼은 아니겠지만 나름 힘들지 않겠는가. 거리상으로는 산행 후에도 12km를 더 간 22번 뵤도지까지 도전해 볼 만하니 오늘 최대한 멀리 걸아놔야겠다.


28번에서 22번 도로를 만나는 곳에 도로표지판이 있다. 우측으로 가쿠린지까지 11km, 좌측으로 다이류지까지 10km란다. 19번 가쿠린지에서 20번 다이류지까지 약 6.5km라니 산술적으로 맞지 않는 거리인데, 아마도 이 길은 자동차 도로 기준이고, 오헨로미치는 등산로를 따라갈 거라고 짐작해 본다.

우측으로 22번 도로를 따라 5~6km를 더 걸어 가네코야 근처까지 가니 3시 반 정도 된다. 대로변의 아오키식당으로 픽업을 와달라고 후나노사토에 전화를 걸고는 기다리면서 사진 찍고 논다. 카메라가 이 정도로만 버텨줘도 참 고맙겠다.



체구가 조그마한 후나노사토 안주인께서 운전은 어찌나 터프하게 하시는지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손이 땀에 젖는다. 내일 아침에도 오늘 그 자리로 데려다주시겠다는 데 그 먼 길을 안 탈 수도 없고, 여행자보험 들고 오길 잘한 것 같다. 


숙소에 돌아오면 가능한 한 빠른 순번으로 욕조를 차지해야 한다. 이제까지 보면 보통 많게는 예닐곱 명부터 적게는 두세 명까지 한 숙소에 묵는 데 늑장 부리다가는 꼴찌로 남들이 다 담갔던 욕조에 들어가야 하고, 저녁시간에 맞추기도 힘들어질 뿐만 아니라 세탁까지 돌리지 못할 수도 있다. 


최대한 먼저 들어가서 최대한 오래 담그기, 그래서 매일의 피로를 풀자


물론 민폐를 끼치지 않을 만큼, 대한민국 욕 먹이지 않을 만큼이어야 한다.

후나노사토에서도 재빠르게 먼저 씻고 세탁도 무료라 하루 분량의 옷과 양말 모자까지 세탁기에 넣어 세팅한 후 머리를 말리고 있자니 5시에 벌써 저녁을 먹으란다. 오헨로상의 저녁은 다음날 이른 아침을 위해 7시를 넘기지 않는 게 보통이지만 5시는 그래도 너무 빠르지 싶다. 

2층 방에서 1층 마루로 내려가니 4인용 앉은뱅이 식탁이 2개, 순례자는 여섯이다. 여자는 나까지 둘. 박선생님과 나와 다른 여자 오헨로상이 한 상을 차지하고 다른 쪽에는 남자 셋이 저녁을 먹는다. 

후나노사토 오카상, 운전만 잘하는 게 아니라 요리도 최고, 부지런함도 최고다. 4시에 우리를 픽업하러 와서 10분 이상 달려왔으니 4시가 넘었을 텐데 5시 전에 6인분을 찬도 푸짐하게 완벽히 셋팅해 놓았다. 그래서 그렇게 빨리 달렸나 싶고 저녁이 감동이라 난폭운전도 용서가 된다.


주인장도 서비스로 니혼슈를 한 잔씩 돌리고 박선생님은 당연한 수순처럼 맥주를 주문한다.

곰곰 생각해보니 순례 첫날 빼고 매일 술이다. 들어오던 날은 김묘선 선생님과 리무진 버스 안에서, 첫째 날은 건너뛰고, 둘째 날은 혼술, 셋째 날은 다시 김묘선 선생님과, 넷째 날은 박선생님과, 오늘 또 숙소에서 단체로...

싫은 건 아니고 몸과 마음을 정화하러 와서는 이래도 되나 좀 찔릴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건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나!




후나노사토(2식 포함) 6500엔

식사(음료 포함) 1330엔

여성용품 162엔

납경(18~19번) 600엔 


도합 8592엔

이동거리 약 26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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