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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r 27. 2017

#06, 헨로고로가시(お遍路転がし)쯤 무섭지 않아

이 산에서 저 산으로, 산 길이 좋아 (for #20~#22)


2015년 10월 19일 월요일 맑음


아오키식당 - 5km - 20 鶴林寺(Kakurinji) - 6.5km - 21  太龍寺(Tairyūji) - 11.7km - 22 平等寺(Byōdōji)


삼림욕의 날, 힘든 만큼 먹는 걸로 보상받다


인심이 후한 후나노사토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오셋타이로 오니기리까지 받아서는 안주인이 다시 데려다준 아오키식당 앞에 내린다. 어제 묵으려고 했던 가네코야도 보이는 지점인데 20번 가쿠린지까지는 약 5km의 등산코스가 기다리고 있다.  21번 다이린지까지 오르락 내리락을 크게 두 번 해야 하는, 쇼산지만큼은 아니어도 두 번째로 만나는 헨로고로가시다.

며칠 동안 걸어 본 결과, 쌩쌩한 오전 시간에 부지런히 걸어두어야 한다. 오후에는 힘이 빠져서 자꾸 쉬고 싶고, 걸음은 느려지니 말이다.


하루 이틀 전부터 박선생님의 발에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도보여행자에게 발에 생기는 물집은 극복하기 힘든 최대의 난적으로 들었기에 등산 양말 안에 얇은 발가락 양말을 덧신은 나는 발이 아프긴 해도 물집이 생기지는 않았는 데 박선생님이 걱정이다.

은퇴 후에 동네 산도 오르지 못할 만큼 체력이 나빠서 정식으로 등산학교에 입교, 등산 이론부터 등산 장비까지 마스터하고, 히말라야 ABC트래킹에 산티아고 순례길까지 다녀오신 분이 이 곳 시코쿠에선 탈이 나기 시작한 거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도 계절을 잘못 선택해서 우기에 출발한 바람에 질척한 길에 발이 푹푹 빠져 고생했다고 들었다. 게다가 순례자 숙소인 알베르게에는 버그가 많아서 주로 호텔을 찾아 묵어야 하는 바람에 배로 힘들었다고 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주를 마치고 돌아온 분께서 이곳 시코쿠에서는 힘들어하신다.

대부분이 포장도로라서 오히려 더 힘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발에 물집도 물집이지만 정신적으로 더 힘드신 것도 같다. 완벽주의자시라 본인이 전문간데 발에 물집 하나 예방하지 못하고 부주의하게 잠깐 동안 신발을 헐겁게 신었다는 자괴감도 크고, 이래저래 짐작도 못할 내면의 아픔까지 겹쳐서 같이 걷는 나까지 숨이 턱턱 막히는 것 같다.

타인의 고통까지 헤아리고 보듬기엔 내가 그릇이 너무 작고, 인생 경험은 일천하다. 그저 어려울 뿐이다.




가쿠린지(鶴林寺)까지는 나름 급경사다. 대나무가 빽빽한 등산로를 꽤 올라야 하는 데 그래도 더워지기 전, 기운이 팔팔한 아침 시간이라 비교적 쉽게 오른다. 475m 산중에 자리하므로 산문에서도 10분은 더 올라야 본당이 나오지만 산문까지 도달한 시간이 7시 10분였으니 이른 아침부터 날아다닌 셈이 아닐까.

가쿠린지는 사실 순례를 완주한 다음에 자동차로 한번 더 오를 기회가 있었다.

그때는 여유가 있어서인지 산중의 절이 참 아름답고, 호젓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하늘을 향해 끝이 안 보이게 쭉쭉 뻗은 삼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향은 얼마나 싱그럽던지...


그런데 이 날은 갈 길이 멀고, 카메라는 시원찮고, 마음은 불안해서 눈에 보이는 게 한계가 있다.

절에 들어서면 박선생님은 순서를 지켜 참배를 하고, 나는 먼저 납경을 받은 다음 절을 돌아보며 사진을 찍는 게 일이다. 한가지 눈에 띄는 건 본당 앞에 거대한 새가 양 옆을 지키고 있는 정도인 데 일본 절이 워낙 특이한 게 많으니 그러려니 했다가 나중에 다시 들렀을 때 현지의 오헨로상한테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사연은 11월 24일에 나올 게다. (자진 스포일러)

나의 이런 참배 행동이 모두 신심이 깊은 일본인 오헨로상들이 보면 참 어이없을 일이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이 길을 걷는 게 아니니 코보대사도 이해해주지 않으시려나?




21번 다이류지(太龍寺)까지 가는 길은 동남쪽 하산로로 내려가서 나카가와를 건넌 다음 정남쪽 등산로를 다시 올라야 하는데 이곳이 또 헨로고로가시다. 그래도 어제의 55번 국도를 생각하면 오히려 등산로를 주로 걷는 오늘이 더 낫다고 위안하면서  걷는다. 산에는 삼나무와 대나무가 즐비해서 햇빛도 차단해주고 공기는 정말 좋은데, 곳곳에 멧돼지, 노루, 뱀, 두꺼비 등이 출몰한다고 하고, 실제로도 땅이 험하게 파헤쳐진 곳이 많아서 으시시하다. 어둡기 전까지는 꼭 등산로를 벗어나야 할 듯.


등산로를 내려와서 나카가와에 다다르니 오전 8시 반, 이 정도면 오늘도 순항을 계속하는 듯한데 이제부터는 또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숨 넘어갈 일만 남았지 싶다.

17번 이도지부터 23번 야쿠오지(도쿠시마현의 마지막 절이다)까지의 오헨로미치가 나와있는 순례자용 지도를 새로 나눠 받았는 데 이중에는 정비 중인 곳이 많아서 원래의 헨로미치가 아닌 새로운 루트로 가야 한다고 나와있다.

새로 받은 지도에도 이 구간에 사람이 미끄러져 넘어지는 아이콘을 곳곳에 삽입해 놓았으니 각오를 다지고 올라야 할 터, 무리하지 않고 천천히 오르는 데 배낭을 덜은 지 언제라고 또 무게가 부담스러워진다.

아무래도 배낭의 문제도 있는 것 같다. 장비 전문가이기도 한 박선생님께서 그 배낭으로는 결원하기 힘들겠다고 하신다. 배낭이 높이 조절이 가능해서 허리도 받쳐줘야 하고, 메쉬 등판 소재로 땀 배출과 통기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허리 벨트가 어깨 벨트 못지않게 두껍고 튼튼해서 무게 분산을 적절하게 시켜줘야 하는 데 내 배낭은 그렇질 못하다고. 그 말씀을 듣고 보니 정말로 온 무게가 다 어깨로 쏠려서 점점 짓누르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무래도 배낭을 공수해서 받던지 무게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던지 해야겠다.

그래도 비교적 이른 시간인 9시 45분에 산문을 들어서고 10시에 본당에 닿는다.

역시나 절은 산 중에 있어에 제 맛이다. 618m 깊은 산에 자리한 만큼 거대한 삼나무가 즐비하고, 뭔지 모를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안내책자에는 서쪽의 고야산이라고 불린단다. 고야산까지 갈지 아직 결정을 못했는 데 혹시 간다면 이 분위기와 비교를 해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고야산은 코보대사가 입적한, 성지로 추앙받고 있는 곳으로 아루키헨로상들이 시코쿠 순례를 마치고 고야산까지 가서 결원을 맺는다고 한다.




600여 미터를 올라 왔으니 다시 내려가야 22번 뵤도지를 갈 터이다.

새로 받은 지도에는 기존의 오헨로미치가 정비가 불충분하니 초보자는 민슈쿠 사카구치야(民宿坂口屋) 경유노선을 선택하라고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 총 거리 중 3키로 정도만 등산로를 내려가서 쭉 28번, 195번, 284번 도로를 따라가야 할지, 195번 시작점에서 다시 미끄러운 등산로를 가얄 지 혼선이다.


등산로 입구는 바야흐로 시코쿠의 가을이 시작되고 있다. 울창한 삼나무 숲도 참 탐이 난다.

시코쿠의 가을 사진을 하이쿠에 접목해 보고자 했는 데 가을이 아직 먼 시점에서 카메라는 탈이 났으니 오헨로미치에만 집중하라는 코보대사의 뜻이 아닌지 모르겠다.


28번 도로와 오헨로미치가 만나는 곳에 휴게소가 있다. 신기하게도 일본어, 한국어, 영어로 쓰여 있다. 그걸 보고 계속 차로로 갈 수야 없지 않은가. 가쿠린지, 다이류지에 비하면 작은 고개일 듯해서 옛 길을 따라 뵤도지로 간다.

뵤도지(平等寺)는 새로 받은 지도에 의하면 '전설에 유명한 하얀 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자료를 찾아보니 코보대사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본존은 5가지 색상의 구름을 통해 나타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하고, 코보 대사가 만든 약사여래는 나이, 성별, 계급, 인종에 관계없이 모든 존재를 질병으로부터 구하기 때문에 뵤도지(平等寺)로 불린다고 한다.


이 절에 봉헌된 물은 눈의 질병에 특히 좋으며 코보대사가 목욕을 한 것과 동일한 물인데, 절의 산책로를 따라 목발 더미가 있는 것으로 그 치료력을 입증한다니 노안이라도 좀 늦춰주십사고 빌어 볼 일이다.



식전 댓바람부터 부지런을 떤 탓에 뵤도지를 마친 시간이 2시를 조금 넘었을 뿐이다.

뵤도지 앞 사잔카는 예약이 안돼서 근처의 에모토 비즈니스 료칸에 문의하니 뵤도지로 픽업까지 해주겠단다.

도쿠시마현의 마지막 사찰 23번 야쿠 오지까지는 17.3km나 되니 오늘은 뵤도지에서 마무리하기로 한다.


뵤도지 앞에 코스모스 꽃들이 만발해 있다. 픽업 차량을 기다리며 길거리에서 사 먹는 고깔 아이스크림도 맛나고, 오후 휴식시간이 길어져서 행복하다. 절 앞에서 단체버스 순례객들이 너무 잘 어울리게 콩고즈에에 기대 휴식을 취하는 모습도 따뜻하다.

게다가, 내일이면 4개 현 중에서 하나를 마친다니 꿈만 같다.

에모토 숙소에서의 이른 휴식도 좋다. 일찍 세탁을 마무리하고 창가에 살랑살랑 널어놓으니 기분까지 상쾌하다.

며칠동안 지나치게 잘 먹고 있는 데 오늘 저녁도 기대된다. 기대에 부응하듯 처음 먹는 스키야키에 생선구이, 빠지지 않는 생선회, 그리고 특히나 계란찜이 환상이다. 심 하나없이 고운 찜 안에 작은 새우가 아삭아삭 알맞게 익어있고 버섯까지, 이제까지 먹어 본 계란찜 중 으뜸이다.


먹는 걸로 하루의 노고를 위로받는 날의 연속, 이런 재미로라도 잡념 버리고 길에 집중하자




에모토(2식 포함) 7000엔

음료 130엔

납경(20~22번) 900엔


도합 9030엔

이동거리 약 23km



가쿠린지의 오미에후다. 귀한 거라 빨강 스트로크! 납경만 받고 이걸 빠뜨려서 순례 끝난 후에 다시 가서 받아야 했다. 사실 7~8번도 빼먹어서 총 3곳을 자동차로 다시 돌아야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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