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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히르 Mar 27. 2017

#07, 다시 혼자가 되다

그래도 이제까지처럼 코보대사, 카미사마가 지켜 줄 거야 (for #23)

2015년 10월 20일 화요일 맑음


17.3km - 23 薬王寺(Yakuōji)


걷다가 포기할지언정 걸어서 완주할래!


전날의 뵤도지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다.

23번 야쿠오지까지의 헨로미치가 새 지도에 의하면 정비가 덜 되어서 55번 국도로 우회했다가 기존의 헨로미치로 합류하거나 아니면 쭉 55번 국도를 따라서 가라고 하는데 사실 난 55번 국도를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바다를 조금이라도 조망할 수 있는 헨로미치로 갔으면 싶었다.

박선생님은 웬지 55번 국도로 가자신다. 그 쪽이 조금 더 빠르기는 하겠다. 완만한 오르막길이 연속된다.


둘이 걸으면 보조를 맞추기가 참 어렵다. 등산로보다 포장도로에서 더 그렇다.

항상 일정한 속도로 걷는 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힘이 있어 빨리 걸을 때와 상대방이 빨리 걸을 때의 간극도 있고, 힘들어 쉬고 싶을 때에도 상대방은 더 걷고 난 후에 쉬었으면 하는 경우도 있다. 하다못해 간식이나 점심 타임도 희망하는 시간대가 다르다. 참 사소한 부분인데 걷는 게 주인 오헨로미치다보니 크게 다가오는 건 아닌지.

박선생님과도 그런 부분에서 힘들 긴 했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이 길에 대한 회의가 들고 있었다.

길 나서는 걸 좋아하고 오랫동안 꿈꿔왔던 길이지만 기대와는 많이 달랐다.

불교신자도 아닌 내가 이 길을 택한 건 그냥 여기 한 달 이상 생각하면서 걸을 수 있는 길이 있어서, 그나마 일본은 가깝고 만만하니까, 1200킬로라는 긴 거리를 다 걸었을 때의 그 뿌듯함, 수행처럼 걷고 났을 때 얻어질지도 모를 어떤 깨달음, 마흔을 훌쩍 넘기고도 여전히 10대처럼 20대처럼 떠나지 않는 불안감을 떨치고 찾아 올 지도 모를 마음의 평화, 헛된 열망으로 잠식당한 번뇌의 굴레에서 도망치기, 이 모든 게 복합된 하나의 의식으로서는 아니었을까.


문제는 이 땅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길거리의 풀 한포기 이뻐할 수 없는 이 땅을 왜 나는 내 나라를 떠나서 걷고 있는지 미친 짓처럼 여겨졌다.

그렇다고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이대로 돌아가면 한동안 모멸감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든 걸 차치하고 그냥, '내가 1200킬로를 완주했어' 라는 정도라도 자기 확신이 필요했다.


이런 생각에 빠져 나는 말을 잃어갔다. 그래서 박선생님이 야쿠오지를 목전에 두고, 이 절을 마치면 다음절까지 80킬로가 넘는 데 기차로 이동하지 않겠냐고 물었을 때도 내 생각에 빠져서 박선생님을 살피지 못했다. 아니 살폈더라도 살짝 고민은 했겠지만 답은 같았을 거였다.


'중도에 힘들어서 포기할 지는 모르겠어요. 그치만 포기하기 전까지는 걸어서 갈래요'




23번 야쿠오지(薬王寺)는 액막이 절로 유명하다. 일본에서는 여자 나이 19세나 33세, 남자 나이 42세나 61세에 불운을 겪기 쉽다고 여기며, 가장 위험한 나이는 여자 32, 33, 61세, 남자 41, 42, 61세로 이 때에 큰 아픔이나 불운이 찾아온다고 알려져 있다. 야쿠오지에는 남자 액막이 42계단 , 여자 액막이 33계단이 있어서 이 계단을 한 단, 한 단 오르며 액막이를 빈다고 한다.


61세가 되도록은 액운이 낀 해가 없는 셈이니 좋아해야 하는데 그래도 서른 살로 돌아갔음 싶다

야쿠오지에서도 나는 납경소를 먼저 들렀다가 이곳 저곳 넓은 경내를 살피면서 카메라에 담기 바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아무리 기다려도 박선생님이 나타나질 않는 거다.

전화를 해봐도 꺼져 있은 후에야, 가져온 변압코드가 망가져서 핸폰 충전을 못하고 있다는 말을 하셨던 게 생각났다. 처음엔 걱정이 앞서다가 30분 넘게 찾아 헤맨 후에도 보이지 않을 때는 내가 뭘 크게 잘못했나, 이렇게 말도 없이 혼자 가실 정도로? 하는 생각도 들었다가 화가 나기도 했다.


내 힘이 미치지 못하면 포기도 빠른 나지만 기분이 다운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서울로 전화를 해서는 엄한 친구한테 한참을 징징거린다.

빈 말이라도 3박4일 응원차 와주겠다는 소리를 듣고서야 전화를 끊고 기운을 차린다.




야쿠오지 주변을 돌아보니 기차역 히와사(日和左)가 있다. 아와 무로토간 sea side line(阿波室戶 シーサイドライン)이란다. 아와가 도쿠시마의 옛 이름이니 도쿠시마에서 고치현 무로토까지 운행되는 열차노선인가 보다. 다음 사찰 24번 호츠미사키지까지는 오헨로미치 전 구간에 걸쳐 가장 긴 83.4킬로, 무로토 땅 끝까지 가야 하니 아직은 까마득하지만 2박3일 후면 무로토에 닿아 있지 않을까.

왼쪽으로 태평양을 조망하면서 걷는 길이니 나름 호연지기를 꿈꿔봐도 좋겠다.


오늘은 근처에 여장을 풀고 앞으로의 일정을 계획한 후에 내일부터 다시 마음을 다잡고 걸어볼 요량으로 히와사역 광장 옆의 케안즈호텔에 체크인을 하지만 시설이 열악하다.

역 주변을 한바퀴 돌아봐도 식당이 마땅치 않기에 편의점에서 사발라면, 맥주, 물과 내일 먹을 간식거리를 챙긴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며 창 밖으로 기차가 오가는 모습, 아주 적은 인원이 기차를 내려 광장을 가로지르는 모습도 본다. 웬지 모르게 정감가는 바닷가 옆 기차역 마을이다.


이제 걷는 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으니 내일부터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강행군 해보련다.

일단 숙소 예약이 먼저다. 지도책에서 30킬로 거리일 듯한 숙소 두 곳을 시뮬레이션 해보니, 유유나사 후레아이도나도까지는 살짝 아쉬운 28킬로, 하루루테이까지는 35킬로다. 35킬로까지는 무리일 듯 해서 내일은 이름도 요상한 유유나사 후레아이도나도로, 모레는 민슈쿠 도쿠마스(33킬로다)로 예약 전화를 돌리는 데 비용이 만만치 않다. 각각 8250엔, 7000엔이다. 그래도 오늘 먹은 게 부실하니 내일부터는 끼니도 잘 챙겨야지 하는 생각으로 예약을 한다. 도중에 사찰이 없으니 걷는 데만 집중해서 7~8시간 정도씩 걸으면 무리는 아니지 싶다.


밤에 잠을 설친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 지 태풍의 전조는 아닐까 불안하다. 바람이 계속 창문을 때려 덜컹대는 소리에 자주 잠이 깬다. 쓰나미가 무서운 태평양 연안을 걷기 전 날에 바람소리가 불길하다. 낼 아침엔 일기예보에 집중해야겠다.



케안즈(스도마리) 4800엔

식사(음료 포함) 1095엔

납경(23번) 300엔


도합 6195엔

이동거리 17.3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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