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지은 Nov 06. 2019

제주 당근밭에서 멍줍했습니다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두 번째 만남 : 이응 님(上)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2018년 3월 18일. 아침부터 우중충한 하늘이 심상치 않은 날이었다.

그는 의뢰받은 벽화 작업을 하기 위해 구좌읍 세화리로 향했다. 그날 마침 목적지가 같은 방향이었던 지인의 차를 함께 타고.


평소라면 버스를 타고 큰 도로를 지나쳐갔겠지만, 지인이 길을 잘못 들어 평소 잘 다니지 않던 밭담(밭 옆에 쌓은 돌담)길로 들어섰다. 곧이어 창 밖으로 낮은 돌담과 당근 밭이 펼쳐졌고, 길을 따라가다 보니 돌담 아래 웅크리고 있는 새끼 강아지 2마리가 눈에 띄었다. 미리 발견하지 못했다면 아찔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좁다란 길이었다.


'아휴, 놀래라. 강아지들이 왜 이런 곳에….'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들었지만 차는 이미 그들을 스쳐지나고 있었다.

.

.

.

오늘 만나실 분은,
제주 서귀포에 사는 '이응'님입니다.
'이응'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일러스트 작가이기도 합니다.






벽화 작업을 하던 그는 문득 그 강아지들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위험한 길가에 나와 있던 게 영 마음에 걸리기도 했다. 강아지들 생각에 작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던 그는 작업을 중단하고 잠깐 쉴 겸 강아지들을 보러 나갔다.

다시 가서 봤더니 2마리가 아니라 5마리였다. 그는 일단 길가에 나와 있던 강아지들을 돌담 안쪽으로 옮겨두었다. 그러고서 주변을 휘 둘러보니 수확이 끝난 당근밭이 허허벌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일을 하러 나온 사람조차 없었다. 인적도 드문 곳인데 어미개도 없이 새끼 강아지 5마리만 있다는 게 못내 미심쩍었다.


'너네들 엄마는 어디 간 거니?'


귀여운 강아지들을 한참 지켜보다가 다시 벽화 작업 현장으로 돌아갔지만 좀처럼 마음을 잡을 수 없었다.


'혹시 길가로 다시 나오진 않았을까.'
'강아지들을 누가 데리고 갔을까.'


답도 없는 걱정이 되돌이표처럼 반복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신경 쓰였는데 비까지 내리자 강아지들 걱정이 앞섰다.


'비가 오는데 얘네들이 어쩌고 있으려나.'


그는 또다시 당근밭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당근밭에 도착했을 땐 동네 할아버지가 새끼 강아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혹시 이 할아버지가?'


하지만 그의 기대는 곧 실망이 되어 돌아왔다.


"글쎄 아침에 나와 보니까 누가 여기다 버리고 갔더라고.  에이, 나쁜 놈들!"


할아버지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웃집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지내는 작은 마을이라 더 그랬다.

어느 집 개가 새끼를 낳았다면 몰랐을 리 없다고.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보니 그곳은 누가 일부러 데려다 놓지 않고서야 어린 강아지들이 우연히 찾아오기엔 너무 외진 동네였다.


"에휴…."


그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가뜩이나 버려져서 불쌍한 새끼 강아지들이 비 피할 곳도 없는 당근밭에 버려져 있으니 그렇게 딱해 보일 수가 없었다.

안됐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나란히 서서 강아지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던 중 눈치백단인 할아버지가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처자가 데려가서 키워."


할아버지의 권유에 그가 손사래 치며 정색했다.


"에이, 한두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나 되는 걸 제가 무슨 수로 키워요."


절대 안 될 일이었다.






다시 벽화작업을 위해 돌아왔지만, 누군가에게 버려진 강아지들이라는 걸 확실히 알게 된 뒤로는 강아지들이 더 눈에 밟혀서 벽화작업도 진척이 더뎠다. 강아지들이 잘 있는지 걱정돼서 거의 30분마다 그곳으로 향했다.


'혹시 그 사이에 누군가 와서 데려가지 않았을까?'

'주인이 데려가고 없었으면 좋겠는데.....'


부질없는 기대인 줄 알면서도, 그는 내심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낯선 곳에 버려져 겁먹은 강아지들은 옴짝달싹 하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지만 또 한편으로는 한숨이 깊어졌다.


'아직 꽃샘추위가 한창인데 비까지 내려서 큰일이네.'

'며칠 동안 계속 비 온댔는데 이대로 두고 가면 탈 나지 않을까.'


다시 작업 현장으로 돌아왔지만 그의 신경은 온통 당근밭에 가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데려가자니 그 이후의 현실이 눈에 훤했다. 넉넉지 않은 수입으로 5마리가 먹어치울 사료값과 접종비, 기타 용품비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고, 무럭무럭 클 게 뻔한 흔한 믹스견 5마리를 입양 보내는 건 더 자신 없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자니 마음이 영 내키지 않았다.

이렇듯 계속 오락가락하는 비처럼 그의 마음도 오락가락했다.


이윽고 결심을 굳힌 그는 큰 상자를 구해 당근밭으로 향했다. 강아지 5마리를 모두 상자에 넣었더니 어깨가 뻐근할 정도로 무거웠다.

 

'집까지 어떻게 데려간담.'


구좌읍 세화리에서 그가 살고 있는 제주시까지는 꽤 먼 거리였고, 게다가 결혼 예정이던 남자 친구와 함께 지내고 있었다. 어차피 '멍줍' 사실을 알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잠시 후 도착한 남자 친구는 강아지 5마리를 보고 조금(?) 당혹스러워했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강아지들을 상자에 넣은 째 차 뒷좌석에 태우고 집으로 출발했다.

강아지들이 차 안에서 울기도 하고 가만히 있지 않았는데, 쉴 새 없이 꿈틀거리던 강아지 한 마리가 불쑥 상자 밖으로 뛰쳐나왔다. 차는 계속 달리고 있는데 상자에 다시 넣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제 무릎에 앉혔다.


그런데 잠시 후, 멀미 때문인지 긴장을 해서 그랬는지 무릎에 있던 강아지가 오줌을 세 번이나 싸는 바람에 바지가 흠뻑 젖어버렸다.

도중에 내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라서 모든 냄새와 축축함을 꾹 참고 집으로 갔다.

그는 이렇게 강아지들과 함께 고생문 안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바지에 오줌 쌌던 용눈이


이튿날, 근처에 있는 동물병원에 한 마리만 데리고 들어가서 생후 2개월 된 진도 믹스라는 것과 전반적인 건강상태가 양호하다는 것 정도만 확인했다. 그리고는 약국에 가서 딱 2차까지 접종할 약을 구입하고 자가 접종하는 요령을 배웠다. 5마리나 되기 때문에 비용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잘 안 되거나 부작용이 있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5마리 모두 순순히 잘 맞고 부작용도 없었다.


강아지들의 몸에 약 기운이 퍼지자 기생충이 나오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죽은 채 배변으로 나왔지만 때로는 살아 있는 기생충이 나오기도 해서 그를 기겁하게 만들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그와 달리 강아지들은 천진난만 똥꼬 발랄했다.



 

'근데 얘네들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입양 홍보에 뛰어들기 전에 이름부터 '잘' 지어야 했다. 그는 5남매 전체를 하나로 묶어주면서도 제주도와 관련된 이름을 원했다. 그러다가 문득 제주의 상징인 '오름'을 떠올렸다.


“사실 고민을 많이 하고 지은 이름이에요. 제주도이기도 하고 당근밭에서 처음 만났으니까 오름 이름으로 하는 게 묶어서 홍보하기에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일단 오름 중에 유명하면서도 이름으로 부르기 적당한 걸로 골랐어요. 물영아리 같은 건 유명하긴 해도 이름으로 부르긴 힘드니까요."


최종적으로 5남매를 위해 엄선된 이름은 새별이, 백약이, 용눈이, 거문이, 사라였다.

5남매에게 각각 어울리는 이름을 배정하고 '오름이들'을 홍보하는 SNS 계정도 만들었다. 포털사이트 자유게시판에도 글을 올렸고, 일러스트 작가인 자신의 재능을 십분 발휘해 '당근밭의 오름이들'이라는 웹툰을 그려 사진과 함께 홍보하기 시작했다.



“처음 강아지들을 데려올 때부터도 입양 보내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방면으로 생각을 많이 했죠. 한두 마리면 사진만 올렸을 텐데 5마리니까 무조건 빨리 알려야 되겠다 싶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게 그림이니까 이렇게 하면 사람들이 좀 봐주지 않을까 해서 툰을 그린 거예요.”


그의 색다른 홍보 방식은 기대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오름이들’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SNS 계정의 팔로워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인터넷 뉴스로 기사화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직접적인 취재 연락이 오지도 않았고, 출처나 연락처 표기가 전혀 안 되어 있어서 기사에서 입양 문의까지 연결되지는 못한 점은 아쉬웠다.


그래도 초기 홍보에 성공한 덕분에 입양 문의가 적잖이 들어왔지만 입양까지는 쉽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대형견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오름이들은 하루하루 폭풍 성장했다.


그가 약국에서 구입했던 2차분의 접종약을 모두 맞힌 뒤, 3차 접종부터는 ‘약이 남을까 봐’ 일부러 대량 구매하지 않고 1회분씩만 사서 접종시켰는데, 결국엔 5차 접종까지 다 끝내고도 입양이 성사되지 못했다.



글·그림 / 자유지은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관련 글 


무지개다리를 건널 때까지
외눈박이가 된 품종묘
호갱이었지만 괜찮습니다
가족을 잘 만나야 견생이 핀다
임신한 고양이는 갈 곳이 없었다
고양이 집사가 얼마나 힘들게요
죽음의 문 앞에서 살아 나온 강아지
견생2막에 파양은 없다


이전 03화 호갱이었지만 괜찮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