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내려온 이후 온탕과 냉탕을 반복적으로 드나들면서 여러 가 지 생각이 들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마다 그 생각은 더욱더 내 마음 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결국엔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되었다
왜 '제주'여야 했을까?
나는 단순히 ‘제주에 오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었고, ‘그냥 제주에 살아보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남들이 고민하고 망설이는 제주 이민 을 무턱대고 저질러버렸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나에겐 ‘~고 싶어서’ 라는 이유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마음이 시키는 일’이라는 것이 내 가 제주에 온 이유의 전부였다.
정말 이것뿐인가? 진지하게 생각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었다. 그 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별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서울 생활이 싫 지도 않았다. 그런데 왜? 내 생각은 한참 동안 같은 지점을 맴돌았다.
그런데 이 질문의 답 찾기는 사실 그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과거의 무엇이 싫거나 벗어나고 싶어서 현실도피를 목적으로 온 것 이 아니라, 단지 서울보다 제주가 더 좋아서 왔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았다.
서울보다 무엇이 더 좋았을까?
어떤 점이 더 끌렸던 것일까?
그랬더니 그 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 바다를 자주 볼 수 있다.
· 경관이 수려하고 녹지가 많다.
· 조용하고 인구밀도가 낮다.
· 사람들이 여유롭다.
· 다른 섬에는 없는 ‘공항’이 있어서 서울과의 왕래가 쉽다.
마지막 줄에 방점을 찍어야겠다. 결국 섬 중 ‘공항’이 있는 건 제주 도뿐이라는 게 결정적이었다. 또 서울 토박이인 내 입장에서 도시의 많은 장점을 전부 다 포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시내권역에는 도시적 인 면모가 있는 제주도가 ‘살기’에 적합해 보였다.
어린 시절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나는 소원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봐야 전부 소소한 것이라 잊혀지고 말았지만, 그중 한 가지는 또 렷하게 기억난다. 바로 시골에 살아보기다.
‘시골’ 사람은 한 번쯤 서울에 살아보고 싶어 한다는데, 서울 토박 이인 나는 오히려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었다. 명절마다 친구가 시골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주면 이야기에 내 상상력을 더해 ‘즐겁고 아름다운 동화’처럼 받아들이곤 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바다를 좋아 해서 이색적인 ‘어촌’ 풍경을 보면 더 강하게 매료되었다. 그러니 동 서남북이 전부 바다로 둘러싸인 ‘섬’은 더없이 아름다운 삶의 배경이 라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강화도, 백령도, 교동도 같은 서해안의 섬 뿐만 아니라 거문도, 흑산도, 완도, 청산도 등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도 가봤다.
도시라고 다 같은 도시가 아닌 것처럼, 섬마다 풍기는 느낌과 색깔, 바람에 실려 오는 냄새까지도 다르다. 그건 섬마다 삶의 풍경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봄이면 제주 바닷바람에서 는 비린내가 아니라 귤꽃 향이 난다.
나는 매일매일 제주가 지닌 여러 가지 삶의 풍경을 마주하고 있다. 때때로 ‘아, 내가 이것들을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느끼고, 비록 부유 하진 않지만 살아있음에 감사하는 순간들이 있다. 자연 앞에 한없이 겸손해지고, 어떤 날은 신선이라도 된 듯이 낭만적인 기분에 도취되 기도 한다. 비록 내가 제주에 온 이유는 단순한 끌림이었지만, 제주가 내게 알려준 삶의 의미와 소박한 일상의 행복은 어릴 적 이루지 못한 소원을 모두 담아놓은 상자처럼 소중하고 값진 선물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