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이민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가장 막막한 과제는 먹고사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서울에서 하던 일을 때려치우고 제주로 왔을 때, 가장 큰 선택지는 두 가지다. 농사짓거나 사업(카페, 게스트하우스)이다. 그런데 이미 포화상태인 카페나 게스트하우스 운영은 만만치 않은 일이며, 농사는 결코 쉽게 도전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요즘에는 땅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데다 구하기도 쉽지 않아서 농사는 더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
나는 어차피 사업할 생각도, 그럴만한 돈도 없었다. 그래서 제주에 처음 내려올 때는 스타벅스에서 일을 했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적은 페이를 받았다. 서울에서 방송작가 했던 것과 비교하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금액이긴 했다. 내가 초반에 쓴 몇 편의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방송작가가 전문직이기 때문에 일반 회사 다니는 또래 친구들보다는 비교적 보수가 좋고 시간적 여유도 많이 허락된다. 그래서인지 내 지인들 중에는 아직도 방송작가가 많다. 최근에 서울 가서 만났던 친한 언니 한 명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지은아, 여기서 그냥 200, 300 버는 거 같으면 아깝지도 않지...
근데 어떻게 다 버리고 가니? 야... 진짜 난 너처럼 못할 거 같아.
방송작가는 프리랜서라, 능력껏, 일하는 만큼 번다. 나는 방송작가가 꿈이었고, 천직 같았고, 즐거웠다. 그런데 '작가님' 소리 들어가며 자유롭게 일하는 전문직 대신, 스타벅스 바리스타로 제주에 왔다. 남들이 볼 때는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일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그게 최선이었다. 제주에 가서 살고는 싶은데 돈이 없다고 미루고, 타지에 가서 할 일이 마땅치 않다고 미루다가, 그렇게 나이만 더 먹고 싶진 않았으니까!
일단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최대한 빨리 실행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을수록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주변에서 바라는 것들'을 더 많이 의식하며 그렇게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정신 차려 보면, '내가 원한 삶은 이게 아닌데...' 하며 씁쓸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목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꼭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젠가 완벽하게 준비되면 할 생각 말고, 바로 그 마음이 든 순간부터 움직여야 한다. 미루다가 똥 되기 전에 말이다.
그래서 나는 제주에 오면서 줄어드는 수입을 감안해, 최대한 검소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명품이나 액세서리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옷도 마찬가지였다. 일할 때는 유니폼을 입으니까 굳이 매일매일 옷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지출에서 가장 크게 줄어든 것은 문화생활비와 용돈이었다.
서울에서는 친구들을 굉장히 자주 만났다. 시간이 자유롭고 친구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생활 패턴의 사람들이어서, 특별히 약속을 안 했다가도 "이따가 만날까?" 하고 연락해서 만나기도 했고, 주말에도 불금, 불토, 그리고 월요일 오후에 출근할 땐 일요일까지도 밤늦게까지 놀다 귀가하기 일쑤였다. 그렇게 자주 만나도 친구들을 만나면 늘 할 얘기가 많고 재미있었다. 어디 친구들 뿐일까? 학교 선후배 모임이나 지인들의 결혼식, 돌잔치 등 주말이고 평일이고 할 것 없이 내 여가시간은 거의 항상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채워져 있었다. 때때로 혼자인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낄 정도였다. 그래서 가끔은 일부러 아무 약속도 잡지 않고 혼자서 광화문에 가거나 한가한 평일 오후에 영화나 전시회를 보기도 했다. 어쩌면 나만의 시간이 필요해서 제주에 내려오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그리워 서울을 찾게 되는 걸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친구들과 만나면 뭐하고 노나? 돈 쓰면서 논다! 그렇지 않나? 근데 제주에는 같이 놀 만한 친구가 없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불금과 불토가 없어지고, 외식비며 음주가무에 드는 용돈이 줄어들었다. 지금은 제주시내에 살고 있지만 서귀포에 살 때는 서귀포에 영화관이 1개뿐인데다 가깝지도 않아서 영화도 자주 보지 못 했다. (그 대신 집에다 빔프로젝터와 스크린을 설치했다.) 서울에서 언제든지 쉽게 접할 수 있었던 연극이나 뮤지컬, 콘서트는 정말 멀어졌다. 또 야구 시즌에 좋아하는 팀의 경기를 직관하지 못하게 된 것도 작게나마 영향이 있었다. 결국 이렇게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환경이 바뀌었기 때문에' 줄어든 여가생활비, 문화생활비가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든 지출 항목이었다.
그렇다면 제주에서 살면서 가장 큰 지출을 차지한 항목은 뭘까? 그것은 다름 아닌 식비였다.
가격대 별로 4만 원대 고등어회 / 1만 원대 파스타 / 3천 원 비빔밥(금복식당)
제주에 오면서 수입도 줄어들고 문화생활과 멀어져버린 탓에, 앵갤 지수가 높은 사람이 된 것이다. 오 맙소사! 고백컨데, 내가 비록 순수예술을 직업으로 삼지는 않았지만, 명색이 예대 나온 사람이라 문화예술을 항상 가까이하고 살았거늘, 여기 제주에 와서 이렇게 앵갤 지수 높은 사람이 됐다고 생각하니 속상하고 우울했다.
그 우울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다른 즐거움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만 했다. 그래서 나는 제주에서 누릴 수 있는 자연을 즐기며 일상을 여행하듯 살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나는 인공적으로 조성된 테마파크 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풍광을 좋아해서 쉬는 날마다 어디 놀러 나가도 용돈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다.
서귀포에 살 때는 남원 큰엉 해안산책로, 대포주상절리, 용머리해안, 산방산을 자주 갔는데 입장료도 필요 없었다. 집에서 아점 먹고 나가서 놀다가 해가 넘어갈 때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는 패턴이라 비싼 관광지에서 밥 사 먹을 일도 거의 없었다. 출출할 때 간식을 사 먹을 돈이나 차비만 있어도 충분했다. 올레길을 걷는 날엔 집에서 준비해 간 도시락을 바닷가의 벤치나 정자에 앉아서 까먹기도 했다. (올레길 중에서는 식당이 거의 없어서 탐방객들에게 도시락을 권하는 코스도 있다.) 쉬는 날 외출 패턴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씀씀이가 작아졌다.
그래도 여자인지라 너무 후줄근하게 하고 다닐 수는 없어서, 가끔 옷을 사야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는데, 막상 사려고 나가보니 백화점도 없고 아울렛도 없는 제주에서는 쇼핑하기가 번거로웠다. 길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 개별 상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왔다 해야 하는 환경은 쇼핑을 '재밌는 일'이 아니라 '귀찮은 일'로 느껴지게 했다. 그렇게 오프라인 쇼핑하는 게 힘들어서 인터넷 쇼핑을 하려고 보면 쇼핑몰마다 제각각으로 책정되어 있는 도선료 추가 옵션 때문에 불쾌했고, 간혹 일주일이 넘어 배송받는 경우도 있어서 택배로 물건을 구매하는 것도 역시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옷도 더 안 사게 됐다. 가끔 서울에 가면 조금씩 사 오기는 하지만, 제주에서 거리의 매장 돌아다니며 쇼핑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이러다 보니 지출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지 않나 싶다.
대신 새로 생긴 지출 항목이 있는데, 바로 반려견을 위한 지출이었다. 각종 접종비용이나 사료비, 간식비, 그리고 내가 서울 갈 때마다 병원에 맡기는 데 드는 비용은 결코 내 의지로 줄일 수 없는 지출 항목이었다. 반려견과 함께 살기로 한 이상, 럭셔리하게 키우진 못 해도 최소한 이 정도 지출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제주에서 집에만 콕 박혀 있으려고 제주이민을 꿈꾸는 사람은 없을 거다. 아마도 이렇게 아름다운 자연환경에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여유 있게 생활하고 싶다는 로망이 그들을 제주로 이끄는 것이 아닐까? 나 역시 그랬다. 대신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선택, 마음의 여유를 얻는 대신 경제적인 여유를 포기했다는 점이 남들과 조금 다른 점 아닐까 싶다. 하지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고 돈 욕심 없는 것 아니고 물욕이 없는 것 아니다. (가전제품에 관심이 매우 많다.) 사지도 않는 로또 당첨을 꿈꾸기도 한다. 다 포기하고 마음을 비우고 사는 것 같아 보여도, 욕심 한 점 없는 사람 어디 있을까? 사람 마음은 똑같은 것 같다. 어느 누군가에겐 부러움의 대상이고 완벽해 보일지 몰라도, 완벽히 행복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돈이 많은 사람도 더 큰 '부'를 꿈꾸고, 애인이 있어도 외로울 수 있으며, 대기업에서 일해도 노후에 대한 걱정은 매한가지다. 사람들은 어쩌면 본능적으로 '부족한 것'을 찾아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욕심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더 치열하게 노력하고,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욕심이 열정으로 바뀐 대가로 지금의 인류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남들 다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나만 너무 나태한 것 아닐까?
이러다가 너무 뒤쳐지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 때도 있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어쩌면 내가 선택한 제주이민은, 내가 나 자신에게 선물한 '기약 없는 안식년'일 수도 있겠다고-
혹시 내가 언제 어떤 이유로 다시 서울에 가게 되더라도, 나 스스로 '허송세월' 했다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이 시간을 의미 있게 채워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른다.
"말은 흘러가버리지만 글은 남는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를 좋아했던 내게, 우리 어머니가 해주었던 말이다.
그때 당시에는 글을 쓸 때에 신중을 기하라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다른 의미도 있는 것 같다. 남는 글은 어디 가지 않는다. 기록이고 증명이다. 내가 나를 잊어버려도, 나를 배신하지 않을 것은 써 놓은 글뿐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이 글을 남긴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내 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