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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짱구아빠 Mar 27. 2022

알라쉐뤼~ 욧봘레스뷩리, 뤼꽐라우..

번역 : ???

짱구는 한글도 채 깨치기 전에 미국에 있는 현지 어린이집을 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짱구 또래 애들이 얼마나 영어로 말하겠어?’라고 기대했다가, 어린이집 사전모임에서 수준급 영어를 구사하는 다른 아이들을 보고 와이프와 나는 크게 좌절했다. 짱구가 과연 어린이집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역시나, 어린이집에서 매일 보내주는 daily report를 보아하니, 짱구는 늘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선생님이 책을 읽어주거나 같이 게임을 할 때도 뒤에 우두커니 서서 애꿎은 입술만 만지고 있었다. 한 번은 다 같이 춤을 추다가 엎드리는 놀이를 하는 거 같았는데, 짱구가 선생님 말은 못 알아듣고 주위 친구들 눈치만 보다가 한 박자 늦게 엎드리는 걸 보고 마음이 좀 쓰라렸다.


그러던 짱구가 언젠가부터 A, B, C를 따라 하더니 쏼라쏼라 말하기 시작했고, 한 5분간은 쉬지 않고 청산유수처럼 말을 계속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말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아무 말 대잔치였다. 롸쟈우아루쿠라쉐빈... 어떻게 보면 4 성조의 북경 중국어 같기도 한데, 중간중간에 ‘엄마’ 라거나 ‘차’라는 한글이 들어가는 걸 보면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아마도 어린이집에서 영어로 말하는 선생님과 친구들을 따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얼마나 답답하고 따라 하고 싶었으면, 어린이집에서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있다가 집에 오면 저렇게 계속 떠들어 댈까.

5분째 네이티브처럼 얘기하고 있는 짱구




그 마음을 알 것만 같았던 게, 나 역시 여기 오자마자 다녔던 어학원에서 똑같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있었다. 나는 어학원 두어 달 다니면 네이티브처럼 말하는 '마법'이 펼쳐질 줄 알았다. 어학연수라는 게 그런 건 줄만 알았다. 오늘로 미국에 온 지 8개월이 지난 지금, 아직까지 너 이름 뭐니, 내 이름 뭐야, 애기 몇 살이니, 너 애기 이쁘다 정도 대화만 할 줄 안다.


20대 초반 학생들 사이에서 30대 후반의 애 아빠라는 명찰은 벗어던져도 좋았으렸만, 나 스스로 만든 틀에 갇힌 채 좀처럼 깨지 못했다. 틀리지 않으려고 혼자 완벽한 문장을 만드느라 말할 타이밍을 놓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쩌다 수업시간에 한마디 한 날에는 자신감 뿜뿜하고,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날에는 우울 약 한 사발 먹는 일희일비의 나날들이었다.


 번은 넷플릭스 오징어게임이  세계를 휩쓸고 있던 즈음, 선생님이 나에게 "Did you have fun watching the Squid game?"라고  질문을 했다. 한국인의 반응도 궁금했겠지. 그런데 나는 거기다가 "I'm not funny"이라고 대답했다. 오징어게임 재밌게 봤냐고 물어보는 사람에게, 나는 웃긴 사람이 아니라고 대답해버렸다(It wasn't fun for me라고 했어야 했다..). 그날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우울했다.


반면 같이 수업 듣는 친구들은 얼마나 뻔뻔한지, 선생님 앞에서 한쪽 다리는 탁 꼬고 말이야, 틀려도 틀린 대로 얘기하고, 선생님 말도 끊고 본인 얘기하고. 이게 수업인지 잡담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계속 말을 하는 게 확실히 도움이 되는 걸까. 어학원 첫날, 도무지 발음을 알 수 없는 남미 출신의 학생이 있길래 속으로 '너 공부 많이 해야겠다'라고 무시했는데, 두어 달 뒤 그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태도에 감히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일까, 틀려도 되니까 자신감 있게 하라고 늘 말하지만 정작 나 자신은 그렇게 못했기에, 짱구의 중국말 같은 영어 비슷한 말이 괜히 반가웠다. 말이 되지 않는 영어도 결국 말이 될 테니까 일단 뱉어보라고, 짱구의 말에 연신 리액션을 해주며 들어본다.


짱구와 어린이집으로 오가는 차 안에서, 아직까지 영어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나는 영어 라디오나 동영상을 보면서 혼자 중얼거린다. 영어를 매우 잘하는 와이프 앞에서는 부끄러워서일까 자존심이 조금 상해서일까 연습하는 티도 못 내지만, 짱구 앞에서는 괜스레 안 되는 영어도 써보게 된다. 그러다 백미러를 딱 보는데 짱구가 나를 씩 웃으며 쳐다보고있다. '애비야 너도 힘들지? 고생 많다'라는 눈빛인데, 이런 상황이 머쓱하여 짱구에게 큰 소리로 말해본다.


"짱구야, 아빠 영어 연습하고 있지? 근데 잘 안되네. 무슨 말인지도 잘 안 들리고. 너도 어린이집에서 힘들고 답답하지? 그래도 괜찮아. 못 알아들어도 되고 틀려도 돼. 그러니까 너 하고 싶은 대로 말하면 돼. 우리 화이팅하자!"


말은 못 해도 다 알아듣는 녀석, 같이 웃으며 화이팅을 해준다. 짱구야, 걱정하지 말자. 아마도 구글에서 지금보다 더욱 기똥찬 번역기를 만들어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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