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들어 에너지가 그 어느 때보다 바닥났다. 몸도 지치지만 마음이 지친 게 몸 상태에 영향을 많이 줬다. 병원 다니면서 몇 주동안 이틀에 한번 꼴로 주사 맞고 매 끼니 약을 먹는 것도 치료에 필요하지만 힘을 주는 일은 아니었다. 병원은 예약하고 가도 언제나 대기 시간이 길었고 약은 알약이지만 혀끝을 잠깐만 스쳐도 쓰디썼다. 주말에도 병원에 가야 했는데 사무실 근처라 출퇴근길을 주말에도 반복하는 마음이 쉽지 않았다.
작년 가을, 겨울도 그랬던 것 같은데 최근 들어 주말에 몸져눕는 날이 늘었다. 주말에 그럴 여유도 없는 사람이 많으니 내 팔자는 좋은 건지도 모른다. 근데 이제는 그렇게 충전하거나 회복하지 않으면 주중을 살아갈 힘을 얻기가 어렵다. 올초만 해도, 아니 난 원래 밖에 다니는 걸 좋아하고 움직이면서 에너지를 얻는 편이었다. 밖을 다니는 행위 자체가 내게 정보를 주는 활동이고 그런 정보는 대체로 생존 정보가 많다. 생활 정보가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내겐 그게 생존 정보다.
근데 요즘은 그마저도 지쳐서 할 힘이 안 나고,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하기 싫고 고민하기도 싫어졌다. 지쳐서 그런가 보다. 잠을 자면 생각을 멈출 수 있어 나았다. 근래에 유쾌하지 않거나, 충격적인 상황이 연속이라 일과를 마무리해도 마음이 불편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아도 새로운 하루에 기대가 들지 않았다.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겐 그렇지 않았다. 새로운 하루와 한주가 당연히 긴장되고 두렵지만 도전적인 일을 마무리한다는 과업에 기대는 있었다.
그랬던 나인데 이젠 그마저도 희미하게 꺼져간다니. 내게 위기의식이 들었다. 새로운 경험과 탐험에 의욕이 없어지고 쉬는 날에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마냥 드러눕고 싶어 하다니. 그게 별 자극이나 동기부여도 되지 않고 성장이나 배울 것도 없는 일임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그런 일상을 소망하고, 주말을 기다리는 이유에도 그렇게 뻗어 늘어지게 휴식하는 게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건 그동안 내가 원한 삶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책은 절대 놓지 않는 거다. 직접 경험 폭이 좁아졌다면 간접 경험 폭이라도 넓히거나 최소 유지해야 한다. 돌아보면 주말에 그나마 사람답게 사는 행위는 3시간 좀 넘게 독서를 하는 거. 난 하루에 한 챕터씩 책을 보는 게 목표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서 주중에 계획대로 못 읽은 분량을 주말에 몰아 읽는다. 직접 구입한 단행본은 이렇게 읽고, 구독 서비스로 보는 책은 그보다 적게 본다. 병렬 독서하다 보니 이렇게 몰아 읽으려면 시간은 좀 걸린다.
아무튼 최근 한 달 여를 그렇게 지냈는데 이번 주말에는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단 생각이 들었다. 일단 식단부터 바꿨다. 주말에 식탐이 터져서 치킨에 닭강정에 엽기떡볶이를 먹었다. 다 내 뱃속에 들어갔지만 튀김류에 분식류를 먹다 보니 역류성 식도염이 더 심해졌다. 몸이 채소나 오트밀을 원하는 듯해서 교회를 다녀오는 길에 동네 무인 샌드위치 가게서 샐러드를 사 와서 오버나이트 오트밀과 먹었다. 먹다 남은 치킨도. 신기한 게 그렇게 먹는 동안 속이 따끔거리지 않았다.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부엌을 정리하고 손톱을 깎고 택배 상자를 뜯어 배송 상품을 정돈하고 화분을 살피는데 그 소소한 집안일이 오늘은 좋았다. 평소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거나 잘 챙기지 못한 일이라서 그런지. 물론 집안일을 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간다. 어떨 때는 너무 아까울 정도로. 그래더 오늘 기분 좋은 소식이 있다면 스파티필름에 흰 꽃이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 올초에 산 화분인데 이건 꽃을 피우는 종이 었나 보다. 무척 기쁘고 반가웠다. 기대치 않은 소식이라.
햇빛이 강한 곳에 있어선지 잎 끄트머리가 타들어가고 어떤 잎은 누렇게 떠서 위치도 옮기고 더 큰 화분으로 분갈이할까 싶던 차였다. 오늘 꽃이 자라는 걸 보고 꽃이 지기 전까지는 그대로 둬야겠다 싶었다. 혹시라도 성장에 방해될까 봐. 1월에도 분갈이한 일이 있는데 그래도 그때 한 게 나쁘지는 않았나 보다. 꽃도 피는 걸 보니. 새삼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실감 났다. 죽다 살아난 예전 스파티필름도 요즘 무럭무럭 자라고 있고 잎도 새로 나고 제법 무성해졌다.
이렇게 저렇게 집을 정돈하고 공원을 산책하고자 밖을 나섰다. 사실 주말에 계속 누워 지낼 수만 없다고 생각한 데 날씨 영향도 컸다. 어제오늘 날씨가 참 좋았다. 오늘은 기온도 제법 올랐다. 20도가 넘었던데 요 며칠 추워서 겨울 코트 입고 다니는 데 익숙했던 터라 오전 예배 갈 때도 겨울 외투 입고 나왔는데 어딘가 이상했다. 일단 따뜻했고 겉옷조차 걸치지 않은 사람도 많았다. 밖에서 잔업하려고 노트북 PC를 들고 나왔는데 집에 일찍 돌아온 데 옷차림 영향도 있었다.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고 밖에 나왔다. 최근에 산 가죽 재킷과 줄무늬 티셔츠. 해도 길어져서 오후 5시가 다 돼가는데도 한낮 같았다. 근처 공원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돗자리 펴고 노는 사람들도 있고, 운동도 하고, 어느새 꽃도 제법 피기 시작해서 사진 찍는 사람도 많았다. 목련은 아직 만발하지 않았지만 꽃봉오리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오늘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맑고 푸르고 깨끗해서 하늘을 배경 삼아 목련 사진을 찍기 좋았다. 하늘이 캔버스 같았다.
오늘 내 산책 목적은 나 홀로 나무를 보는 거였다. 공원 명소로 유명한데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위치를 찾아봤는데 예전에 산책하면서 지나간 곳인데 언덕이 넓어서 그런지, 날이 어두워서 그런지 그 나무에 시선이 가지 않았다. 역시 나무를 배경으로 사진 찍는 사람이 많았다. 아직 잔디가 푸르지 않아서 나무 사진을 찍어도 배경이 예쁘다는 느낌은 덜 들었다. 구글 포토의 매직 지우개 기능으로 배경에 찍힌 사람들을 지웠는데 그림자는 그대로 남아서 무서웠다.
봄볕을 맞으며 공원을 산책하는 기분은 좋았다. 날씨가 그야말로 축복이었고 움트는 봄꽃도 아름다웠고 눈이 즐거웠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해도 그때는 일교차가 크고 날이 쌀쌀해서 그런지 봄을 느끼지 못했다. 가끔 점심때 산책하지만 내 산책 코스에는 꽃이 아직 피지 않았다. 근데 동네 공원을 둘러보니 내가 의식하지 못한 새 봄이 성큼 다가왔다. 절기상 봄 한가운데 있어도 봄을 실감하지 못했는데 나도 모르게. 삭막한 나날을 보냈구나 싶기도 하고.
토성 산책로도 오랜만에 올랐다. 밤에는 뱀을 조심해야 하는데 날 밝을 때 오니 좋았다. 이렇게 멋진 공원이 코앞에 있는데 동네 인프라를 잘 누리지 못한단 생각도 든다. 상업시설이나 대중교통 제외하면. 거주지이긴 하나 내 집은 아니라서 우리 동네란 생각은 부족하다. 주소지가 여기로 돼있어도 거리감은 있다. 편리하고 좋은 동네란 생각은 들지만 내 것이 아니라서 거리감을 느끼고 거리 유지 필요성을 기억하려 한다.
어쨌든 두 시간 남짓되는 산책은 무척 힘이 됐고 몸은 피곤해졌지만 에너지를 얻었다. 햇볕을 길게 쬐고 평소와 다른 풍경을 마주하고 아름다운 걸 보고 즐기고 음악도 오랜만에 길게 들었다. 이제야 봄이 온 게 실감 난다. 잔업한다고 실내에 틀어박히기보다 이게 잔업에 힘을 쓸 에너지를 공급해 줘 근본적으로 바람직한 행위였다는 생각도 든다. 무기력증에 벗어나 생의 의지를 북돋는.
쉽지 않은 나날의 연속일 수 있지만 오늘 긍정적인 경험과 벅찬 감정, 좋은 기분 기억하며 새로운 한 주를 건강하게 잘 살아낼 재료로 잘 쓰면 좋겠다. 이번 주부터 고난주간이라 그 어느 때보다 절제하고 성찰하며 살아가야 한다. 자기 연민을 좀 덜어내고 겸손하게 사는 것도 금식 일종일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을 잘 정비하고 정돈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