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질된 욜로의 모습
신조어 욜로족의 YOLO는 '네 인생은 오직 한번뿐이다 ( You live Only Once)'라는 뜻을 포함합니다. 이 단어가 유행을 하면서 각자 여러 가지 의미로 받아들였고, 그에 따라 욜로족의 풍경도 무척 다양해졌습니다. 그 때문인지 이따금씩 본질을 잃어버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삶의 질을 높이는데 아낌없이 투자하겠다는 가치관이나 소비행태를 문제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결코 미래를 위해 현재의 자신을 희생하지 않겠다.' 라거나 '인생에 희망 따윈 없으니 지금 당장 내가 즐겁기만 하면 된다.'라는 신념으로 해로운 일도 서슴지 않는 모습은 씁쓸하기만 합니다. 지나치게 변질된 욜로는 거의 자포자기 느낌에 가깝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용어가 유행하게 된 데에는 사회적 요인이 분명 존재합니다. 어렵게 공부해서 대학에 가면 바늘구멍 같은 취업이 기다리고 있고, 직장을 구하고 안정되게 살아보려 하면 집값은 너무 비싸기만 합니다. 살림살이는 이렇게 녹록지 않은데 인터넷에는 화려한 사람들의 일상과 웃음이 쏟아집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정을 찾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과 불확실한 미래에 어쩔 줄 몰라하던 청년에게 어쩌면 YOLO족은 썩 괜찮은 탈출구 일지 모릅니다. 허탈감이나 허무를 대신할 삶의 방식이 되고 있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모든 걸 손 놓고 즐기기만 하는 이가 끝없이 무언가를 성취하면서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는 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건 왜일까요. 모양만 다를 뿐 자신을 아끼지 못한다는 점에서 닮아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둘 모두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아 보여요.
에리히 프롬의 조언
좀처럼 마음의 위안을 찾기가 힘든 요즘 같은 시대에 욜로족으로 라도 살아가는 게 어디냐고 말할 수도 있겠습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라면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활동하라'라고 조언할 것 같습니다.
자발적 활동이 어떻게 자유에 대한 질문에 해답이 될까? 어떤 것으로부터의 해방인 소극적 자유만 있다면 인간은 고립된 존재가 되고 만다. 불신에 가득 차서, 연약하고 항상 위태로운 자아를 가진 채 세상과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된다.
- 에리히 프롬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 중에서 -
인생을 즐기고 있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돌보지 않는다면 자아는 계속 위태로운 상태를 유지할 것입니다. 현실을 보지 않는다고 해서 현실의 자극이 완전히 차단된 건 아닐 테니까요. 당장의 '오늘 밤'을 즐기는 데에는 별 문제가 없지만 신나는 원나잇이 아닌 4계절을 굴러가야 하는 우리가 삶을 돌볼 줄 모르는 자신을 믿고 겨울을 날 수 있을까요. 자신을 믿지 못하는 상태로 인생을 잘 살아내기는 어려운 법이니까요.
다시 생각해보는 열심히 사는 삶
에리히 프롬의 글을 읽으면서 '열심히 사는 삶'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은 '열심히 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게으르고 느릿느릿한 기질의 저로서는 그게 압박처럼 느껴져서 상당히 불편하게 다가왔습니다. 속으로 반항했고요.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이런저런 상황으로인해 열심히 살지 않을 수 없을 때가 오더군요. 스물한 살, 집안의 경제적인 위기로 학교를 휴학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이후로 지금까지 열심히 살지 않은 해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내 자아의 이미지는 여전히 '느리고 게으른' 모습이지만, 지금까지도 늘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내고 있었습니다. 의무나 책임은 시간에 따라 달라지면서도, 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원을 가고, 또 대학원을 휴학하고 취업을 하고, 직장생활을 하고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가정을 꾸리는 모든 과정에서 부지런히 두 발을 굴리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여전히 질문이 남아있었습니다.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 거지?'. 비록 나는 어쩌다 보니 부지런히 살고 있었지만 타인에게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았거든요.
믿을만한 자신이 되기 위해
그러다 깨달았습니다. '믿을만한 나'를 위해서였다는 것을요. 저에게 필요했던 건 자기 확신이었던 겁니다. 내가 나를 믿을 수 없으면 외부로부터 위기가 주어졌을 때 쉽게 무너진다는 걸 알았습니다. 겁이 많고 자존감이 낮았던 저로서는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나의 행동 말고는 믿을 게 없었습니다. 끊임없이 선택하고 고민하고 나아가야 하는 삶에서, 게으르고 나태한 저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 수는 없었습니다.
모든 자발적 활동에서 개인은 세계를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자아는 온전해지고 더 강해지며 더 탄탄해진다.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힘은 물질의 소유에도, 감정이나 사고 같은 정신적 자질의 소유에도 있지 않다. (중략) 우리의 자발적 활동이 낳은 속성들만이 우리의 자아에 힘을 주고, 자아가 온전할 수 있도록 기틀을 닦아준다.
-에리히 프롬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중에서 -
적극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은 능동적으로 모든 경험을 맞이한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자발적으로 누리고 충실하게 살아낸다는 것입니다. 어떤 괴로움은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경험은 고통을 수반하니까요.
적극적으로 일상을 살아낸 시간들이 모여서 나 자신을 믿을만한 사람으로 만들어가고 있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금수저도 아니고 백도 없는 저에게 기댈 존재는 나 자신 뿐이었으니까요.
열심히 살면 결국엔 뭔가가 달라집니다. 성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자기만족으로 나타날 수도, 시험에 합격하거나 마라톤을 완주할 수도 있습니다. 멈춰서 두 손을 놓고 있을 때에는 주어지지 않는 것들이죠. 그런 모든 행위들이 모여서 나를 믿는 근거가 됩니다.
부족한 자존감이 기댈 수 있는 '작은 행위'
가끔은 길에서 벗어나버린 건 아닐까 하고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자신감도 떨어집니다. 그 순간에 떠오르는 것이 그간의 내 행위에 있었습니다. 대단한 성취를 하거나 목표를 이룬 자신이 아니라, '결근 없이 부지런히 출근한 나' , '매일매일 글을 쓴 나', '졸음을 이기며 새벽마다 출근 전에 공부한 나' , '어려운 순간에도 무너지지 않고 다시 몸을 일으켰던 나', '아르바이트를 세탕 뛰며 열심히 학교를 다녔던 나', '회사를 다니면서 논문을 써내려고 오랜 시간 고군분투한 나'의 모습들이 떠오르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일상의 반복된 부지런한 행위들이 나를 떠받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음 걸음을 디딜 힘이 되어주기도 하고요.
나를 믿지 못하면 무너집니다. 자기 확신이 없으면 어둠에서 헤어 나올 길이 없고, 위기에서 일어날 힘이 부족합니다. 내가 단단하게 서지 못하면 타인에게 자꾸 기대려고 해요. 하지만 타인은 나를 지탱하지 못하지요. 그는 그 자신을 지탱하는 삶을 살고 있을 테니까요.
그렇기에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적극적인 활동이 꼭 대단한 것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믿어줄 만한 최소한의 삶의 규칙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애정 하는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는 정희라는 여자가 나옵니다. 사랑하던 남자가 절에 들어간 뒤로 20년 넘게 그를 못 잊고 하루하루 버티면서 외롭게 살아가는 인물이에요. 밝고 씩씩해 보이기만 하던 그녀가 술에 취해 몸을 가눌 수 없던 어떤 날 밤, 지친 모습으로 빨았던 팬티를 널며 이렇게 말해요. '그날 입은 걸 빨면 나는 아직 괜찮은 겁니다. 제정신인 겁니다. 나는 오늘 일과를 다했습니다. 망가지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정희에게는 '그날 입은 속옷을 씻는' 행위가 자신을 버티는 최소한의 규칙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망가지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죠. 사랑을 잃었다고 모든 것을 포기한 듯이 손 놓고 살면, 그러한 자신을 보며 또다시 무너졌을지도 모릅니다. 이미 여러 번 무너진 사람이 만들어 낸 자신만의 규칙일지도 모르고요.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으로서 매일매일 자신만의 규칙을 지켜가고 있었던 거죠.
제가 생각하는 '열심히 산다'의 의미는 대단한 걸 이루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나'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빠르게 뛰어가지는 못하지만 한결같이 걸어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 보면 결국 조금씩 나아지긴 합니다. 허무나 회의감으로 삶의 균열이 일어날 때, 그 시기를 버틸 힘이 생깁니다. 적어도 나 자신이 한심하지 않고, 믿을만한 존재가 되어 있으니까요.
그렇기에 이제는 감히 사람들에게 부지런히 살아보자고. 조금만 힘을 내 보자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어쩌다가 이렇게 부지런하게 살게 되었지?
우스갯 소리로 말하곤 합니다. 분명 누구보다 게으르고, 잠도 많고, 때로는 될 대로 되라며 모든 일을 미루던 제가 부지런히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문득 웃음이 납니다. 그렇지만 알고 있습니다. 지금의 부지런한 일상이 언젠가 너덜너덜해졌을 때의 내 마음을 지켜줄 거란 것을요. 나 자신을 믿을 수 있는 한 앞으로도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으리란 것을요.
YOLO(욜로)! 맞습니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에요. 그래서,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도 내 삶도 소중합니다. 소중한 나를 돌보며 앞으로도 기꺼이 열심히 살겠습니다.
위 글이 담긴 브런치북 [How are you?내마음] 이 <내 마음을 돌보는 시간> 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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