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이 1. 시큰둥한 시작

by 하만다

제주 한 달 살이하는 것이 부럽다는 친구의 말에 나는 어쩐지 시큰둥한 마음이 들었다.

퇴사를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휴직이라는 타협을 하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든 터였다.

기약 없는 미래로 불안한 것보다 끝이 있는 휴식을 보내는 게 더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주위의 조언 내지는 부러움이 섞인 타박을 머리로는 십분 동의했지만 마음은 시큰둥함을 넘어 불안하기까지 했다.

기대가 되기보단 얻고자 하는 바를 얻고 올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그래 봤자 국내 여행인데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들었으니까 말이다.


사실을 퇴사든 휴직이든 쉬게 되면 유럽여행을 가고 싶었으나 가족들의 걱정과 만류에 유럽행을 포기하고 나니 그렇다면 제주도라도 가야지 싶었다. 가는 김에 허풍 조금 섞어 남들이 죽기 전에 꼭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하는 한 달 살기를 해보겠다고, 그렇게 결정한 한 달 살이었다.


여행으로 방문했던 제주도는 언제나 기대 이상으로 좋았지만, 나에게 특별히 어느 지역이 좋았다거나 꼭 다시 가고 싶다거나 한 곳은 없었다. 그저 완벽한 휴식을 제공하는 휴가지 같은 곳이었다.

제주도에서의 여행은 무얼 보고 무얼 했는지, 어딜 갔는지보다는 누구와 함께 했는지가 더욱 기억에 남았었다. 이제 나 홀로 제주를 간다니, 게다가 한 달이나 말이다.

나 홀로 떠나는 여행이 걱정되거나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제는 '누구와 함께'에서 '누구'가 내가 될 뿐이었고, 어쩌면 무얼 볼 지,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머물지가 더욱 중요해지는 여행이 될 것 같았다.


커져만 가는 불안감에 나는 황급히 펜을 들고 끄적이기 시작했다.

먼저 제주도 지도를 그려 보았다. 어디에 뭐가 있는지, 대략적인 지리를 알고 싶었다.

똥 손으로 그려본 제주도 지도

제주시와 애월에는 여러 번 머문 적이 있었다. 지난여름에는 안덕면에 위치한 사계해안을 다녀오기도 했다.

지도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제주도 동쪽이 좋겠다 싶었다. 자주 가보지 못한 곳들이 있었고, 지금까지 다녀온 곳들이 세련미 넘치는 곳들이었다면 동쪽은 어쩐지 제주도의 투박한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멋대로 기대가 되었다. 게다가 언제든 가도 좋은 성산 일출봉도 동쪽에 있고 말이다.

함덕부터 표선까지 숙소를 둘러보다 한 달 살이의 정착지는 세화로 정했다. 마을이 꽤 크게 형성되어 있어서 뚜벅이인 나에게는 한 달을 머물러도 크게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한 달 살이 정착지가 된 세화의 바다


다음으로는 하고 싶은 걸 적었다.


하고 싶은 소박한 체크 리스트

제주도까지 가서 해야 하나 싶은 일들이 적혀 나갔지만 나로서는 서울에서는 도저히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 않아 제주도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리 대단하지도 않은 일들을 하나하나씩 적다 보니 이제 조금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제주 한 달 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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