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째 날
제주도에 도착한 날과 이튿날 내내 제주도에는 눈보라가 몰아쳤다. 그러다 화창하게 갠 오늘 하늘을 보니 울적했던 마음이 한결 낫다.
내가 지내고 있는 이 숙소는 '제주도 한 달 살이라면 감성 숙소지'를 외치며 찾게 된 곳인데, 21평가량 되는, 혼자 묶기에는 조금 넓은 투룸이다. 사진으로 봤을 때 깔끔한 인테리어에 식기류부터 청소기까지 없는 것 빼고는 다 갖춰져 있어 제주에서 한 달 동안 머물 곳으로 낙점되었다.
그런데 이틀 내내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는 데다가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제주도를 마주하니 넓디넓은 이 숙소가 무섭게 느껴졌다. 게다가 나의 소프트 랜딩을 위해 함께 제주도에 와준 남자 친구이자 10월에는 내 배우자가 될 예비 신랑이 다시 생업을 위해 서울로 떠난다고 하니 더욱 울적해지려던 참이었다.
도착했을 때부터 파란 하늘을 쉬이 보여주지 않던 제주도는 우리가 도착한 지 삼일 째 되던 날, 파란 하늘과 잔잔한 바다를 선사했다. 하늘이 개니 마음도 은근슬쩍 풀어져 버렸다.
기대 없이 찾아간 빵집은 너무나 예쁜 곳이었고, 흔한 에그타르트와 앙버터는 '내가 막입이 아니었구나'를, 색깔이 너무 아름다운 당근 주스는 '이래서 구좌 당근이 유명하구나'를 느끼게 해 주었다.
박물관이라면 질색하는 남자 친구를 끌고 간 해녀박물관은 생각보다 재미있었고 남자 친구도 꽤 즐거워하는 눈치였다. 첫날 맞이한 검은 색깔의 세화 바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따스한 햇빛이었지만 바람만은 차 완전히 곁을 내준 것은 아니라는 말을 하는 듯하여 동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산책길이 편안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어제와 다른 오늘을 보여준 세화를, 그 평안함을 즐겼다.
세화 민속오일장을 끼고돌고 돌다 점심을 먹기 위해 스페인 음식점 <제주 셀로나>에 갔다. 코로나가 중국에서 한국으로 퍼지기 직전인 2020년 1월, 우리는 스페인에서 함께 여행을 했었다. 여행하기 약 2개월 전, 하루가 멀다 하고 야근을 하던 첫 직장을 퇴사하고 순례길을 걷겠다며 남자 친구는 프랑스로 떠났었다. 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서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약 800km 거리를 걷는 대장정을 마치는 시점에 맞춰 나는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떠났다. 남자 친구도 보고 스페인 여행도 할 심산이었다. 약 3주 간의 기간 동안 쌓은 우리 둘만 아는 추억을 이야기하며 식사를 했다. 함께 곱씹는 그 추억이 참으로 소중하게 느껴졌다.
오후 4시 10분, 101번 버스가 오기까지 고작 떨어져 있는 도시가 제주도와 서울이라는 걸 잊어버리고 우리는 잠시 동안의 헤어짐을 슬퍼했다. 아니, 적어도 나는 그랬다. 원래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하지 않던가. 버스를 보내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아직 친해지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던 넓고 낯선 숙소와 어떻게 정들 수 있을지 고민이 된다. 시끌벅적 티비를 켜 두고 밥을 먹고 하루를 정리하다 잠에 들려고 하니 창 밖의 바람 소리가 거세다. 낮에는 친절했던 세화가 차가워진 목소리로 말하는 듯하다.
“프로토타입은 이제 끝이야. 실전 시작이다.”
진짜 제주 한 달 살이가 시작되는 느낌이다. 혼자서 오롯이 해내는 한 달 살이.
어쩐지 지금은 기대보단 두려움이 앞서지만, 걱정할 것 없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위로가 되는 말일지 서글픈 말일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은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