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슈비츠의 아침을 맞는 리추얼

by 알케미걸




독일로 비행을 가서 싱가폴 동료와 카페에 들렀습니다. 주문을 마치자 동료가 며칠 전 다녀온 결혼식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신랑 집에서 결혼식 피로연을 한다기에 조촐한 분위기를 상상했다 얼마나 놀랐는지! 집이 성이더라니까. Castle! 남자가 귀족이라고 했지만 진짜 성에 살고 있을줄이야. 배트맨처럼 집사까지 있고. 동화같이 사는 사람들을 직접 보니까 기분이 묘하던걸. 세상에는 주인공이 따로 있고 나는 들러리라는 걸 확인한 느낌? 아 정말 왜 사나 싶더라고….”

동료는 숲이 내다보이는 게스트 화장실이 자기 집보다 넓고 창문도 침대보다 더 크다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불과 얼마 전, 평생 아지트가 될 작은 집을 샀다며 사진을 보여주던 벅찬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습니다.

귀족의 성에는 있고 자기에겐 없는 것들을 동료가 줄줄이 꿰는 동안, 우리가 앉은 곳을 빙 둘러보았습니다.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 바나나 케이크와 카푸치노가 놓인 테이블,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흐르는 라인강, 유람선에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이 보였습니다.




카푸치노 - 라인강 - 유람선. 카푸치노 – 라인강 - 유람선. 저는 시선을 뗄 수 없었습니다. 귀족의 성에 동료가 매달려 있는 동안 영영 가버릴 삶의 장면들 하나하나에게 저라도 인사를 건네고 싶었습니다. 세상을 두루 구경할 수 있는 비행직의 장점은 눈에 보이는 것과 비교를 하면 할수록 단점으로 변했습니다. 해외여행의 기회를 만끽하는 대신 일등석으로 여행하는 승객을 부러워하고 럭셔리 라이프스타일을 선망하며 박탈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한동안 저도 쇼핑에 몰두해 장거리 비행에서 빈손으로 돌아오기가 힘들던 기억이 납니다.


인터넷과 SNS가 일상에 파고든 이후 우리는 나와 타인 간의 격차를 필요 이상으로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셀럽의 가방 속 아이템과 내 가방 속 잡동사니의 가격대를 견주게 되었고, 핫피플이 골프카를 타고 이동하는 초호화 저택과 빨래 건조대를 치우고 이동하는 내 원룸의 차이도 목격했습니다.

신기루나 다름없는 셀럽의 드레스룸을 들여다보느라 내 화분에 허브가 목말라 죽어가고, 더 늦기 전에 눈을 보며 대화를 나눌 기회들을 놓치고, 미뤄온 일에 질끈 감고 뛰어들 순간은 흘러가버립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과 뜨겁게 교류하지 못한 일들을 죽기 전에 떠올리며 후회합니다. ‘하루라도 더 젊을 때 셀럽들의 사생활을 속속들이 파헤칠걸….’ ‘먹방 하나라도 더 챙겨보면 좋았을 텐데. 으으 이젠 틀려버렸군. 이렇게 가다니, 한이 맺혀 구천을 떠돌지도 몰라!’ 스마트폰을 분신처럼 쥐고 산 사람도 이런 후회를 마지막으로 눈을 감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양극화로 벌어지는 격차 속에 남이 가진 것과 나에게 없는 것에 시선을 고정시키면 희망을 그려보기 힘들어집니다. 경쟁을 위한 채찍 삼아 성공한 위인과 비교해서 얻는 동기부여는 비교를 지속할수록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타인의 눈부심과 나의 굴곡진 현실을 번갈아 견주다보면 따라잡을 수 없다는 절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쓰러진 곳에서 올려다본 남의 성공보다, 나를 믿고 곁을 지켜주는 사람, 혹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진심어린 한마디가 더 큰 의미로 와닿을 수 있습니다.




무슨 책을 펼쳐도 동기부여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할 일을 미루며 ‘왜 지금 해야 되지? 싫은데?’ 버티기 위해 버티고, 앞서 간 멘토들의 쓴소리도 귓등으로 흘려버릴 때. 아우슈비츠의 아침을 떠올리곤 합니다.

‘수용소에서 눈을 뜨면 그날 벌어질 일은 둘 중 하나. 가스실 아니면 최악의 하루. 죽음 아니면 죽음이나 다름없는 고통이 기다릴 뿐인데 그들은 왜 일어났을까. 무슨 생각으로 아침을 맞았을까.’

<죽음의 수용소>를 쓴 빅터 프랭클은 의미치료를 세상에 알리려는 열망과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처럼 마음에 타오르는 불씨를 지닌 유대인이 대다수는 아닐 것입니다. <죽음의 수용소>에는 치료를 거부하고 배설물 위에 누운 채 삶의 끈을 놓은 유대인이 등장합니다. 주위에서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영혼은 죽음에 더 가까운 지경에 달한 것입니다.




저는 삶의 의미가 계시처럼 다가오는 줄 알았습니다. ‘아, 이래서 살아야 되는 거구나. 삶은 소중한 거였어!’ 감동과 파격의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자 찾아다녔습니다. 사람에게 기대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제가 살아야 될 선명한 이유를 알게 되길 바랐지만 머릿속엔 커지는 물음표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습니다.

어려서부터 겪은 학대 경험은 잊어버릴 기억이라고 여긴 탓에 의미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의미는 감탄과 경이로움으로 똘똘 뭉친 보배라 고통이나 서러움의 반대편을 뒤적여야 발견한다고 어림짐작한 것입니다. 생존을 위한 치유의 길에 들어선 뒤에야 가장 서럽고 비참한 순간에도 삶의 의미는 존재한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 하루는 어디를 잘못 맞았는지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갈비뼈가 잠금모드로 설정된듯 1mm도 움직이지 않아 겁이 났습니다. ‘어떻게 숨을 쉬지?’ 진땀에 축축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일단 마음을 침착하게 먹는 거였지요. 가슴 근육이 마비된듯 굳으니까 입을 벌려도 공기를 들이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붕어처럼 입을 뻐끔 벌리는 데 수많은 부위들이 협조해야 되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순간, 번쩍 떠올랐습니다. ‘코가 뚫려 있다! 숨 구멍이 있다고!’ 감격이 솟구쳤습니다. 잠금모드가 풀릴 때까지 아기 붕어가 생존할 만큼의 공기를 코로 들이쉬며 ‘괜찮다, 괜찮다….’ 눈을 감았습니다.


세월이 지나서 보니 바닥에 쓰러진 아이로만 보였을 저는 스스로를 구하고 있었습니다. 정신이 어질해지자 숨쉴 방법을 떠올려서 도와주는 구조요원이 돼준 거지요. 그 순간 제겐 그 일이 최고의 의미였습니다. 고작 ‘숨 쉬는 거 하나 밖에 못 하는 순간’이 아니라, ‘숨 쉬는 일이 가장 최선인 순간’이었던 것이지요.


그날 이후, 빨리 잊는 게 상책이라고 자신을 닦달해온 기억들을 모조리 불러 모았습니다. 맞기만했다고 자신을 수치로 여겨 자책한 순간들. 제 몸은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어린 저를 지켜냈습니다. 팔이 매을 막아서 얼굴을 지키고, 두 손은 머리를 감싸서 보호하느라 대신 매질을 당했습니다. 날아오는 두 개의 가위날을 히어로처럼 막아준 손등 덕분에 눈과 귀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등은 늘 주저 없이 몸을 돌려 가슴팍 대신 피멍을 자처했습니다.

바보처럼 속수무책 당했다고 자신을 손가락질해온 시간들은 자신을 위해 모든 일을 해낸 골든아워였습니다. ‘후지고 비참하니까 싹둑싹둑 통편집해버리라고!’ 함부로 말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어둡고 고된 순간들은 무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공한 인생에게만 찬란한 의미가 훈장처럼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빅터 프랭클의 삶이 수용소에서 의미를 잃었다가 전쟁 후 집필과 강연으로 맹활약할 때 의미를 되찾은 건 아니니까요.

삶의 의미는 생명과 같습니다. 생명은 그 자체로 온전하고 소중합니다. 내 생명의 가치가 오늘은 귀했다 내일은 변변찮을 수가 없습니다. 주가처럼 요동치지 않습니다. 남이 판단하는 기준이나 편견으로 재단할 수도 없습니다.

살아 있는 것만으로 생명이 소중하듯 살아 있기에 의미있는 것이 우리가 지구에서 보내는 시간입니다. 모든 순간 속에 생명과 의미가 들숨날숨처럼 함께 합니다. 삶 자체가 리추얼의 시공간인 것입니다. 뉴노멀 시대를 헤쳐가는 우리를 위한 리추얼은 리셋이 필요합니다. 리추얼은 특정한 때와 장소에서 여유로운 사람이 행하는 특별한 이벤트가 아닌, 우리 인생 자체입니다.


인간처럼 생명을 지닌 자연도 가장 화려할 때만 의미를 갖는 건 아닙니다. 살아서 우리와 공존하는 것만으로 매순간 자연이 가진 의미는 충분합니다. 벚나무는 꽃이 한창인 봄에만, 사과나무는 사과를 수확할 때만, 단풍나무는 가을에만 존재 의미를 띤다면 험한 겨울 속 자연은 자리만 차지하는 무용지물로 전락하고 말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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