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은 지들끼리 바쁘다
공무원과 관련된 기사를 클릭하고 들어가 댓글을 보면, 동사무소나 시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들이 탱자탱자 논다며, 다 잘라버려야 한다는 말이 많습니다. 물론 있습니다. 자기 일 안 하고 하급 공무원에게 일 몰아주고, 본인은 탱자탱자 노는 사람들 분명히 있습니다. 20%가 나머지 80%를 설명한다는 파레토의 법칙이 이를 말해줍니다. 민간기업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듯이 수십만 명이 넘는 공무원 중에 그런 나쁜 사람은 어디에나 존재합니다. 다만, 거의 대부분인 80% 이상의 공무원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입니다.
왜 일반 국민들은 이런 공무원에 대해 부정적으로만 생각할까요?
공무원들이 힘들게 하는 대부분의 일이 일반 국민들에게 거의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공무원은 헌법상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지금 공무원의 일 중 대부분은 '국민'에 대한 봉사와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공무원은 지들끼리 바쁘다.”
동기에게 듣고 너무나도 공감이 가서 계속 기억하고 있는 말입니다. 도대체 왜 바쁠까요.
공무원의 일반적인 일은 '자료'를 만드는 것입니다. 자료를 만들다 보면, 효율적으로 일을 하기 위해 '양식'이라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이 '양식'은 효율적이기도 하면서 매우 비효율적입니다. 이 '양식'은 좀비 같습니다. 한번 만들어진 '양식'은 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존에 작성해 왔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양식'은 그저 변화하고 발전할 뿐입니다.
'양식'이 모이면 '업무'가 됩니다. '업무'는 더 강력합니다. '업무'는 '조직'을 만듭니다. '업무'는 '조직'을 존재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 '조직'은 한번 만들어지면 자신을 지키기 위해 '업무'를 절대로 죽이지 않습니다. '업무'가 사라지면 '조직'도 사라지니까요. '조직'은 자신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끝도 없는 '업무'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면서 조직의 구성원인 공무원은 '업무'에 파묻히게 됩니다.
업무가 만들어지는 이유가 국민을 위한 봉사라면 매우 바람직합니다. 그런데 조직을 위한 업무는 그 '조직의 유지'라는 목적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업무는 업무를 위한 업무를 만들어냅니다. 암세포 같습니다.
암세포 같은 업무를 가장 많이 만들어내는 곳은 총괄 조직입니다.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하부조직에 끊임없이 자료를 요구합니다. 과거에는 필요했을지언정 이제는 불필요한 업무도 그냥 계속 이어집니다.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말이죠.
“OO 정책”, “OO 대책”, “OO 평가”, “OO 모델”, “OO 사업” 등등 이름도 다양합니다. 최대한 규모가 커 보이게, 별 상관없는 업무도 어떻게든 본인들의 정책으로 포장을 해서, 하부조직의 업무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합니다.
새로울 것 없이, 기존에 하고 있던 다양한 업무를 그저 묶고 종합하고 포장해서 새로운 것인 마냥 내놓습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다양한 양식이 만들어지고 쓸데없는 자료가 만들어집니다. 이러한 업무는 죽지도 않습니다. 계속 관리되어야 하고, 평가되어야 하고, 내년도 대책도 만들어야 됩니다. 만약 이 업무가 사라지게 되면, 그 조직의 존립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끝없이 업무는 유지됩니다.
요점은 업무가 끊임없이 생김에도 불구하고 기존에 국민들에 영향을 미치는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조직의 유지를 위한 업무만 늘어가는 겁니다.
총괄조직 외에, 일반적인 중간조직, 하부조직도 암세포 같은 업무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는 주체가 되기도 합니다. 바로 '협업'이라는 명목으로 말이죠. '협업'이라는 가치는 행정조직에서 거의 신성화되었습니다. 이 '협업'은 정말로 필요한 것이라면 매우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협업'은 그저 '협업 실적'을 채우기 위한 명목상의 협업에 불과합니다. 같이 하면 오히려 비효율적인 상황에서도 그저 협업이라는 모양새를 갖추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협업을 합니다.
이 '협업'은 하부조직이 아닌 동급 조직에게도 자료를 요구합니다. 자신들을 업무를 늘리고,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죠. 그렇게 또 업무가 늘어갑니다. 그리고 이러한 업무는 국민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필요 없는 걸 알면서도 하는 겁니다.
국회, 도의회, 시의회 등등 대의기관을 만나면 그 업무는 배가 됩니다. 위와 같이 만들어지는 업무에 대한 자료를 요구하고, 새로운 양식을 만들고 거기에 맞춰서 또 새로운 자료를 만듭니다. 같은 내용을 수십 번 반복해서 요구합니다. 국회 등 대의기관도 '조직'이기에 자신들의 존재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 보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자료요구와 양식을 만들어 냅니다.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대의기관은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큰 조직이기 때문에, 정말 다양하고 생각지도 못할 것 같은 '창의적인' 자료를 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양식이 만들어지고 그 양식은 매년 점점 무서운 모습으로 진화합니다. 2023년에는 단순히 사업예산 중 인건비가 얼마인지를 물어봤다면, 2024년에는 개인에게 지급되는 월급이 각각 얼마인지 물어보고, 2025년에는 그 월급을 받는 개인의 남녀비율, 지역비율, 나이비율을 물어볼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급격하게 공무원을 줄여야 한다거나 조직을 없애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정말 하고 싶은 말은 쓸데없는 일을 줄이고 국가와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무의미한 자료요구에 파묻혀 정신없이 일하던 때에, 국장님 때문에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출장에 끌려가면서 쓴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국장님: “ㅇㅇ주무관도 사무실에서 일만 하지 말고 출장 가서 현장을 좀 봐야 해. 그래서 끌고 가는 거야”
'그럼 소는 누가 키우냐'는 말이 나오려던 걸 참고 대답했습니다.
나: "저도 그러고 싶은데요 국장님.. 일이 너무 많아요 당장 오늘 내야 할 것도 몇 개 못 내고 왔습니다..."
국장님: "그런 일이 중요한 게 아니야. ㅇㅇ주무관도 그거 별 의미 없는 거 알잖아?"
나: "너무 잘 아는데... 그럼 그 일은 누가하나요 ㅠㅠ"
국장님: "..."
잠시 침묵하시더니 말을 이어갔습니다.
국장님: "출장 갔다가 저녁에 복귀해서 해야지... 나 때는 말이야..."
조용히 국장님의 라떼 이야기를 들으며 출장지로 향했습니다.
현장을 가서 정말 실질적인 일을 구상하고 추진하기에는, 너무 많은 일들이 쌓여 갑니다. 쓸데없는 자료 때문입니다. 억지로 현장을 가서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하더라도, 깊은 고민을 하지 못합니다. 저런 쓰잘데기 없는 업무 때문에요. 출장을 간다고 하더라도, 또 이에 수반하는 '현장소통 실적 양식', '조치 실적 양식', '협업 실적 양식'에 그럴듯한 말을 지어내 예쁘게 자료에 적어서 낼뿐입니다. 결국 관성적으로 일 처리하게 되고, 밤에 집에 녹초가 되어 돌아옵니다.
공무원은 힘들고, 남은 건 의미 없는 자료들 뿐입니다.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적 구조조정보다는 '일'의 구조조정이 필요합니다. 그저 조직의 유지를 위한, 관성에 의한, 무의미한 일을 과감하게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 나라와 국민을 위한, 동시에 공무원에게 자기 효능감을 줄 수 있는 일들을 발견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물론 수십 만 명에 달하는 공무원의 업무를 한꺼번에 다루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조금씩이라도 의식하고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암적인 공무원의 일은 공무원 조직 전체를 손 쓸 수 없는 상태까지 몰아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