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 뜨는 태양
바하리야의 별 헤는 밤을 지새우고
사막 한가운데, 매트를 깔고, 우리는 그 넓은 땅을 이부자리 삼아 온통 빼곡한 별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그대로 잠들었다. 그리고 눈을 떠보니, 동그란 해님이 새벽을 밝히고 있었다.
간단히 아침을 차려 먹고,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했다. 이 황량한/ 지형지물이 없는 사막에서 아침의 의식을 치르는 일은 몹시 곤란하기도,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열댓 명의 사람들이 아침 <화장실>을 해결하기 위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는데, 누군가 저 멀리 신호를 주며 걸어가니, 모두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리 퍼져 슬금슬금 걸어가는 형국이다. 아마 하늘에서 보는 샷이 있었다면, 방사형의 퍼포먼스라도 하듯, 제각기 베이스캠프에서 서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하며 걸어갔다. 뒤를 흠칫 흘겨보며, 혹시 같은 방향으로 오는 자가 없나 조심스럽게 확인하며, 사람의 인기척이 보이지 않는 순간, 근처의 아주 소소하게 남아있는 작은 풀들에 기대어 쪼그려 앉아, 생리 의식을 치렀다. 모두가 다른 방향으로 가려니, 꽤 한참을 걸어야 했고, 다시 오는 길도, 혹시나 볼 일을 보시는 누군가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조심조심, 그러나 나름의 인기척을 내며 돌아왔다. 온몸은 이미 모래밭이고, 세수나 양치는 사치였다. 생수도 귀하고, 물티슈도 귀해서 아주 조금, 눈곱을 떼는 정도로 세안을 마치고, 스카프로 꾀죄죄한 몰골을 가리는 걸로, 아침 단장을 마쳤다.
그렇게 여기에서는 '존재한다는 것,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다. 누군가에게 잘 보일 일도, 그럴 필요도 없는, 아무 기준도/ 우리를 지켜보고 점검해야 하는 거울과 같은 어떤 물질도 별 의미가 없다. 그렇게 자유스러워질 수 있는 공간이 또 있을까. 땅위에 온몸을 뉘어보고, 온 힘을 다해 뛰어보고, 맨발로, 모래 하나하나가 주는 깔깔한 감각을 느껴보는 것만으로도 온몸의 세포가 각을 세워 살아있는 것만 같다. 보이는 것은 별 것 없지만 오히려 바퀴 자국 같은 사소한 자국으로 길과 방향을 짐작하는 미묘한 면과 면의 만남. 그리고 선과 선의 연결에 시선이 가 닿는다. 조형이 아닌, 대상에 꽂히는 알 수 없는 쾌감,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그야말로 숭고의 장소다.
다시 길을 떠나, 사막의 정점, 샌듄으로 향했다.
먼저 흔히 말하는 모래 언덕(sand dune)을 처음 접했을 때의 경이로움에 대해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크고 작은 모래알이 끝없이 쌓이는 땅. 흙모래가 흩날리며 온 대지를 뒤덮어 그것 하나뿐인 공간이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물질인 듯, 어느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도 땅 위에는 돌무더기 혹은 모래언덕의 음영만이 시야를 덮는다. 그 어떤 생명도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고, 언젠가는 이대로 함께 바람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다. 사멸에 대한 운명. 그 과정과 결과가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함께 온 다른 여행자들도 사막의 능선에 올라서자, 이 순간만큼은 모두가 걸음을 멈췄다. 마치 진공상태의 어느 우주공간에 들어선 듯, 말도 잃었다. 바라보는 시선을 어느 방향으로 돌려도 보이는 것은 모래 능선뿐이다. 물질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밟고 있는 모래, 그리고 그 위를 채우는 공기가 전부인 세상이다. 모래와 공기밖에 없는 공간. 바라보고 있는 자신들은 이 비현실적 장면 속에서 더 이상 존재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사소한 것이 된다. 모래알처럼 부질없는. 그러나 그 작은 최소, 최후의 물질들이 세상의 전부. 인간의 시각으로 감지 가능한 지평선 너머까지 모조리 모래뿐이다. 그리고 하늘엔 태양. 오로지 그 빛과 어둠의 변주로 모래 무덤이 선을 만들고, 선이 리듬을 만들며 덩어리를 이룬다. 사소하고 부질없던 모래알들은 거대한 땅으로 다시 태어나 몸집을 드러낸다. 엄청난 땅덩어리에 압도되어 한참을 정신을 놓았다. 능선에 올라선 뒤로 계속되는 능선을 따라 시선을 옮겨 다니다, 휘몰아치는 모래바람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보이는 것에 압도되어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미 모래알로 온몸이 뒤덮여 버석거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머리카락부터 발가락 사이까지 체표면에 존재하던 모든 수분을 빼앗기고 있었다. 모래알이 마치 필사적으로 마지막 삶을 찾는 생명체들처럼 엉겨 붙었다. 여기 서있는 그 모든 생물체들처럼 사멸의 수순을 밟는 것인가, 싶은 섬뜩함이 다가왔다. 그곳에 그렇게 서서 여전히 뜨거운 모래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가장 최근에 이러한 주제를 너무나 잘 표현한 빌 비올라의 비디오 작품이 불현듯 생각났다. 그는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이용하거나, 또는 실제 시간의 흐름과 다른 속도의 영상을 통해 시간이라는 비가시적인 개념을 보는 것을 통해 느낄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느리거나 빠르거나, 그러나 누구에게나 흘러가는 그 시간의 다른 속성은 언젠간 다시 누구에게나 같은 것으로 돌아온다는 것도 분명히 말한다. 반복되는 시퀀스를 통해 마치 우리가 가진 모든 양의 시간이 같고 공평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하는 강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남이 시작되고, 다시 멀어지는 그의 이미지는 내가 만난 그 사막에서의 감정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망가졌는지도 모른 채, 마구 셔터를 눌러대며 사막의 능선에서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사막에선, 신발의 기능도 부질없을 뿐이다. 그저 맨몸으로 버티는 것이 가장 효율적. 그렇게 가만히 있으면 온 세포에 모래 알갱이가 한 개씩 붙어버린 것처럼 점점 피부에 모래가 쌓인다. 아마 조금만 더 그렇게 있었다면, 내 키만큼의 모래산이 되어 그대로 형체도 없이 묻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었다.
30분쯤 지나 가이드가 보드를 준비해 스피드를 맛보게 해 주었다. 내려가는 길은 쉽지만 다시 올라오는 일이 너무나 힘들어 조금 시도하다가 그저 모래산에 주저앉았다. 속도보다는 이 고요함, 적막한 우주의 어느 한 모습을 그대로 기억해두고 싶었다. 이 샌듄의 기운은 꽤 오랫동안 강렬히 남아있게 되었다.
뜨거운 태양과, 수억 개의 모래알들이 온몸에 박히는 이 원초적인 경험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일이 아님을,
아마 그때 그 샌듄을 내려오던 시간, 바로 직감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