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가난했다
그래서 평등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너는 더 가난했다
모두가 가난했다고 생각했기에 너의 가난은 더 특별했다
초가집도 있던 동네였다
그래도 고래등 같은 집은 없었다
그러하기에 빈부의 차이는 기본에서 파악됐다
너는 부모가 없었다
너는 지적장애가 있었다
너의 옷깃은 늘 더러웠고 귓등까지 때가 껴있었다
너는 보호 받지 못했기에 더 가난해 보였다
같이 뛰놀고 장난치는 데에서 가난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너의 가난은 도시락에 있었다
4학년 여름, 너의 도시락에는 보리밥과 양파, 고추장뿐이었다
까까머리 아이가 생양파를 고추장에 찍어 먹는 풍경은 가난했던 우리에게도 생경했다
가난해도 우린 김치는 싸올 수 있었고
못먹고 살아도 보통 제철 나물을 볶은 반찬 정도는 가능했다
그런 김치도 나물도 너희 집에선 귀했다
김치를 담글 엄마도 없었고
나물 뜯으러 들로 나가기엔 네 누나도 어렸다
매운 양파를 우걱우걱 씹는 너의 볼은 붉었고
볼과 같이 씰룩이던 콧잔등엔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하얀 생양파와 시큼할 것 같던 그 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 이후로 양파와 고추장 궁합은 내게 가난의 상징이었다
마흔 전에는 짜장면과 같이 오는 생양파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언젠가 순댓국을 먹으면서 그 일화를 동석한 선배에게 했더니
선배는 생양파에 쌈장을 가득 찍고서 내 얼굴에 들이밀었다
친구의 귀한 식사를 허락하지 않은 동정으로 폄하했으니 이제 생양파를 먹고 죄를 씻으라 명했다
그날의 생양파는 맵지 않았지만 달지도 않았다
볕이 뜨겁던 날에는 너의 까까머리가 더 빛났다
밝은 볕이 교실 창을 넘어 네 머리까지 드리우면
우리는 달려들어 네 머리를 헤집고 머릿니를 잡았다
이를 잡아 손톱으로 짖이길 때 우린 환호했다
그러면 너도 허허 웃으며 머리를 더 드밀었다
우린 가난했지만 얼굴에 가난은 없었다
누구 하나 너의 가난을 손가락질 하지 않았고
누구도 너를 놀이에서 빼지 않았다
우린 친구였다
순수함으로 차이를 뭉개던 소년들의 우정도 호르몬은 못 이겼다
6학년때 남자들은 정글에 들어선 짐승이었다
괜히 싸움하고 괜히 힘을 자랑했다
그런 무리 속에서 너는 샌드백으로 좋은 상대였다
힘의 우위를 따지고자 하는 정글에서 너는 기준이었다
몇 대로 코피를 터트리냐 몇 대로 눕히느냐
너는 희생양이었지만 너는 웃었다
그렇게 무리랑 어울릴 수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정글의 법칙에 따라 내 순서가 왔다
전혀 주먹을 쓴 적이 없던 나를 무리가 링 위로 올렸고 네가 상대로 올려졌다
너를 눕혀야 나도 무리에 낄 수 있었다
너를 때려야 나도 인정 받을 수 있었다
어제까지 같이 우리집에서 밥을 먹었던 너와 나인데
그 링 위에서 나는 너를 쓰러뜨려야 했다
두 주먹을 쥐고 너를 노려봤다
너는 순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우리의 적막을 "때려!" "차!" "뭐해!" 등등의 고함이 깨뜨렸다
응원에 힘을 입은 내 주먹이 네 가슴을 때렸다
너는 여전히 순한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눈이 매스꺼워 주먹에 더 힘을 줬다
"명징아!" 너는 내 이름을 불렀다
그 말이 싫어, 나즈막히 들리는 그 목소리가 싫어 나는 네 가슴을 더 세게 쳤다
서로 주먹이 오가고 서로 엉키다 내가 네 위로 올라탔을 때 게임은 끝났다
무리들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잘했다, 이겼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너는 누워서 하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 눈빛 때문에 그날 밤 자리에 누워 하염없이 울었다
우리는 싸웠지만 이튿날부터 다시 예전처럼 놀았다
망각은 가장 쉬운 화해였다
하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누구를 때려본 적이 없다
누구에게 적개심이 들 때마다 너의 그 하얀 눈이 나를 지켜봤다
누군가가 미울 때면 어김없이 네가 꿈에 나타났다
꿈에서 나는 너와 비슷한 그림자에 펀치를 날렸는데
그때마다 내 펀치는 달팽이보다 느렸고 기껏 뻗은 펀치도 그림자를 한참 비켜갔다
그런 펀치력으로는 누구와 싸워도 질 게 뻔했다
그렇게 나는 영원한 패배자가 되었다
너는 중학교에 가서 일찍이 담배를 물었다
소위 논다고 하는 애들의 담배 심부름을 하면서 그 무리의 색을 입었다
그러지 말라고, 너를 돌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생각해 제발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네 고집은 지능보다 컸다
3학년이 되자 너는 여선생님에게도 대들고 후배들을 불러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국민학교때부터 너와 친했던 나와 친구 몇이 막아보려 했지만
너는 우리 말을 듣고 재미를 멈추기에 너무 커버렸었다
너의 그 달콤한 재미가 발현되는 데에 나도 일조했다
너를 깔아뭉개고 승리감에 도취된 내 표정을 네가 보았을테니까
반면에 나는 폭력의 재미로부터 탈주했다
발정기의 수컷들이 해방구 없는 경기장에서 폭력으로 정력을 해소하던 고등학교에서도
욕 한 번 하지 않았다
욕이 입에 감돌면 네가 생각났다
그렇게 너는 나의 수컷냄새를 지워버렸다
고등학교는 성적과 진로에 따라 수많은 도시로 찢어져 간다
너는 성적이 안 되니 우리 지역에 있던 농고를 갈 거라 모두가 예상했다
하지만 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았다
우리는 네가 가난하다는 것을 잠시 잊었었다
너는 삼촌이 있다는, 우리 고향에서 세 시간 버스 타고 가야 하는 경남의 바닷가 동네로 갔다
그곳으로 떠나는 버스에 탈 때 나는 네게 우리집 전화번호를 적어줬다
나는 고등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기에 한 달에 한 번 집에 왔는데
그때마다 너의 전화를 받았다
- 삼촌 카센터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 사촌형이 있는데 24살이고 성격이 나쁘다
- 내가 일을 잘 못하니까 사촌형이 많이 때린다
- 친구들은 잘 지내냐?
- 내가 언제 고향에 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 다음 달에 언제 전화해야 네가 받냐?
네가 전하는 말들은 2~3년 간 비슷했다
나는 그런 네 말을 그날의 내 펀치를 받던 너의 가슴처럼 묵묵히 받아냈다
너의 연락은 내가 서울로 대학을 가면서 연결되지 않았다
고향집에서 네 연락을 받았지만
서울의 달콤한 봄에 빠져있던 나는 네게 연락할 여유를 가지지는 못했다
나와 함께 네 연락을 받았던 친구 A도 그때쯤 너와 연락이 끊겼다
다모임, 아이러브스쿨에도 너는 없었기에 우리는 너를 잊어버렸다
시골에 계시던 네 할아버지, 할머니도 돌아가시자 너와의 연결고리는 완전히 없어졌다
평화주의자라는 허울로 폭력을 피해왔던 자세로
나는 너를 더 잊을 수 있었다
스물여섯 살 때, 샌님으로 살아가던 나는 무료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해 권투 체육관에 다녔다
원투원투 주먹을 날리는 걸 몇 달 하다보니 밖으로 뻗던 주먹이 내재화됐다
어느날, 여느 때처럼 골목을 걷는데
좌우로 심하게 움직이며 걷던 덩치와 어깨를 부딪혔다
그의 입에서 "씨발"이 새어나왔다
멈추고 돌아본 후 눈자위에 힘을 주고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는 가던 길을 그대로 갔지만
나는 상상으로
그를 붙잡아 "씨발 좆도 아닌 게!"라고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리곤 원투를 얼굴에 꽂고 좌우 훅으로 배를 갈겨
그 덩치가 낫에 베인 풀처럼 내게 무릎 꿇는 상상을 하며 웃었다
잠시 후 갑자기 나는 내가 무서워졌다
내가 거부해온 폭력을 나는 가장 우선적으로 상대에 맞서는 수단으로 꺼내든 것이다
며칠 후 체육관을 그만뒀다
이후에도 나는 폭력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물리적 폭력을 넘어 정신적, 언어적 폭력도 조심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나는 이종격투기를 즐겨 보고 내 기준에 위배되는 사람을 만나면 악플을 거침없이 날려왔다
그럼에도 나는 물리적인 폭력은 한번도 쓰지 않았기에 내 스스로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 자위해왔다
그 믿음과 자부심이 내 딸로 깨졌다
세상 사랑스럽고 착하다고 생각한 내 딸이 학폭을 저질렀다
두 달 전, 딸의 담임쌤에게 전화를 받았다
딸이 무리 셋과 함께 같은 반 아이를 괴롭혔단다
한 아이를 놀리고 머리를 당기고 나쁜 말로 험담했다고 했다
딸을 십 년 키우면서 가장 크게 실망했기에 딸 키우면서 가장 크게 혼냈다
몇 날 며칠을 딸도 울고 나도 애엄마도 울었다
그때 수십년 묻어 둔 네가 생각났다
내가 이유 없이 주먹을 날렸던,
이유를 모르고 내게 주먹을 받아야 했던 네가 떠올랐다
딸이 괴롭힌 피해자도 내가 괴롭혔던 너처럼 장애가 있었다
나는 천하에 착하고 순하다고 생각한 우리 딸이
누구에게나 보호 받아야 할 장애우를 괴롭혔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비록 어리지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비록 애비가 전철을 밟았었지만 딸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혼란스러웠다
피해학생의 부모님께 최선을 다해서 사과하고
내 딸도 피해학생에게 사과편지도 쓰고 직접 사과도 했다
피해학생과 그 부모님, 선생님께도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다행히 그 친구와 부모님의 용서를 받아 문제는 더 커지지 않았다
딸을 편한 눈으로 대할 수가 없어 우리집에는 한동안 냉기가 가득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 때문일까
2주 정도 지나자 우리집은 예전의 온기를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두 달이 지났다
선생님께 다시 전화를 받았다
딸이 또 친구들과 그 아이를 괴롭혔다고 한다
바로 학교로 찾아가 쌤에게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뒷자리에 앉은 그 아이의 가방을 지나가는 길에 발로 차고
화장실에서 손을 씻다 손에 묻은 물을 그 아이에게 털었다고 한다
아이 옷에도 괴롭힘의 흔적을 남겼다고도 한다
우연도 아니고, 실수도 아니다
명백히 딸과 친구들은 자의적으로 폭력을 행한 것이었다
너무 많은 마음들이 엉켜 당시의 내 기분을 어땠다고 전하기가 어렵다
분명한 것은 나는 우리 부부의 무력감에 가장 크게 절망했다
우리는 두 달 동안 딸을 바꾸지 못했다
선생님께 딸이 선처 받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아이의 부모님께서 원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말하고 집에 왔다
딸에게 한 시간 동안 수많은 말을 뱉어냈다
큰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내 말 하나하나는 모두 돌처럼 굳어 딸의 발등을 찍었다
-너를 더 믿을 수 없어
-너를 이전처럼 안아주지 않을 거야
-네 안에 정말 나쁜마음이 자라고 있었어
화살 같은 말을 만들어 딸의 가슴에 대고 쏘았다
딸에게 상처주기 위해 화살의 날을 갈고 가는데 그 화살이 나를 향하는 것 같았다
내 삶에서 딸을 점점 더 밀어내는 말들을 내뱉자 겉잡을 수 없이 감정이 동요했다
참다 못해 내가 울먹이는 목소리를 내버렸다
딸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목을 열고 울어버렸다
딸이 엉엉 울어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약해지고 싶지 않았다
이틀 후 그 아이 집에서 연락이 왔다
전보다 강한 대처를 하고 싶었으나 아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아이가 이 문제로 인해 네 명의 친구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걸 원치 않는다고 했다
그 아이는 그런 아이였다
누구보다 평화를 사랑하고 사랑을 베푸는 아이였다
그런 아이를 우리 딸이 괴롭힌 것이었다
아버님은 세 가지 요구조건을 학교와 우리집에 전했고 우린 모두 동의했다
우리 가정은 이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한의 노력을 해야 한다
지난 밤, 네가 꿈에 나타났다
너는 늙지 않았고 중학교 때 그 얼굴이었다
까까머리를 하고 옷깃이 까만 파카를 입고 있었다
너는 더듬거리며 뭔가를 말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몰라 답답한데 나는 무얼 말하냐고 묻지 못했다
내가 말 할 기회가 단 한 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뭇하다 "잘 지냈냐?"고 물었다
너는 하얀 눈을 하고 노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손을 들어 인사하고 뒤돌아 갔다
최근 어떤 일이 있어 국민학교 동창들을 찾고 있다
지금까지 연락해온 친구는 열 명이 안 돼 나머지 서른 명 정도를 찾아야 한다
나는 너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친구들에게 너를 묻지 않았다
그런데 너를 찾아야겠다
중학교 동창까지 연결해서라도 너를 찾아야겠다
네가 건강하게 잘 지냈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네가 나를.......
용서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