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의 폭력성은 국민학교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는 금쪽이가 아니더라도 선생들의 매질을 피할 수 없었다
한 학년에 한 반, 40여명을 겨우 채운 시골 학교에선
선생이 왕이었고
그 지위의 위상은 학생을 넘어 학부모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되던 시기였다
5학년 때 담임은 40대 남자였는데 여자애들도 가차없이 뺨을 후렸다
우리 모두는 어른이 되는 것보다 빨리 학교를 졸업하는 걸 더 원했다
우리 담임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매질을 했기 때문이다
6학년 개학날, 문을 열고 들어온 선생님은 새로운 얼굴이었다
파마를 하고 화장을 한 그 얼굴이 우리 시골과 폭력의 학교와는 너무 달랐기에 우린 그 분을 감히 우리 담임선생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박진숙'(가명) 가늘고 길게 늘여쓰는 글씨로 칠판에 적었다
그렇게 성의 있게 쓴 글씨마저 생경했기에 우린 개학날에 어울리지 않게 침묵했다
선생님이 행한 첫 혁신은 짝꿍이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동성끼리 짝꿍을 했었는데
선생님은 여자들을 한 자리씩 앉히더니 남자들에게 앉고 싶은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막 사춘기에 접어든 우리들은 기함했다
남학생이든 여학생이든 불같이 반발했다
선생님은 웃으시면서 "앞으로 우린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꾸준히 이해할 필요가 있으니 짝꿍부터 이성과 해봐야한다"고 우릴 설득하셨다
그 논리에 설득된 건 아니었지만 선생님이 완고했기에 우린 벌레가 팔에 기어오르는 기분을 참아내면서 짝꿍을 물색해야했다
혁신 다음은 복지였다
도시락에 생양파와 고추장을 싸올 정도로 가난한 아이들이 많았던 시절이었는데
선생님은 연필깎기 2대를 교실에 비치해 누구나 쓸 수 있게 했고
연필과 일기장을 모두에서 선물했다
단, 조건이 있었다.
1 일기는 매일 쓸 것
2 가급적 한 장을 다 채울 것
이 작은 의무도 우리에게는 어렵게 느껴졌다
글쓰기가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우리의 일상은 누구나, 어느날이나 비슷했다
학교>운동장에서 놀기>집에 가서 논일 하기>저녁 먹기>자기
처음엔 많은 아이들이 한 장을 채우기 어려워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친구랑 무슨 놀이를 했는지, 누가 술래였는지, 논에서 오늘은 무엇을 했는지, 저녁 반찬은 뭐가 나왔는지, 부모님과 무슨 대화를 했는지, 그런 일들도 다 의미가 있으니까 되도록 자세히 써봐."
복지는 자립을 위한 토대였다
한 장 쓰기가 제법 익숙해지자 일기의 농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일기를 1교시에 걷어서 종례시간에 나눠주셨는데 늘 파란색 볼펜으로 피드백을 주셨다
3월 말, 아빠가 산에서 토끼를 잡아와서 집을 지어주고 먹이를 준 일을 일기에 썼다
그날 일기에 선생님은 토끼가 귀여울 것 같다며 다음에 선생님도 보러 가겠다면서 토끼를 대하는 나의 마음을 칭찬해주셨다.
그리고 실제로 가정방문에 오셔서 토끼에게 먹이도 주셨다.
그날 선생님의 댓글이 내 인생을 바꿔놨다
일기는 3학년? 그 전부터 써왔지만 5학년 때까지는 도장을 찍어주는 것으로 검사가 끝이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매일, 누구에게나 댓글을 써주셨다
그날 가장 긴 댓글을 받아서 글자수를 세어봤다
63자였다
선생님의 파란 글씨가 무려 63자였다.
그때부터였다
선생님께 더 많은 파란 글씨를 받기 위해 공들여 일기를 쓰게 됐다
이런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사생대회에 학교대표로 나가게 되었다.
학교에서 2명이 나갔는데 나와 경쟁관계에 있던 여학생 A도 같이 나갔다
대회 출전을 앞두고 우린 하교 후 남아서 매일 글쓰기 연습을 했다
우린 시와 소설을 번갈아 쓰면서 누가 어느 부문에 나갈지 정해야 했다
'여름방학'을 주제로 소설을 쓰게 됐는데 나는
몰래 좋아했던 여학생이 여름방학에 전학을 가서 인사도 하지 못해 아쉬워하는 남학생의 이야기를 썼다
시는 '소나기'를 주제로 했는데 무슨 내용을 썼는지 지금은 기억이 안 난다
나는 시 부문에, A는 소설 부문에 출전했다
기가 막히게도 대회의 소설 주제는 여름방학이었다
시 주제도 여름방학이었다
나는 낙선했고 A는 우수상을 받았다
A는 내가 쓴 소설을 주인공 성별만 바꿔서 냈다
월요일 조회시간에 전교생 앞에서 A는 상을 받고 소감을 발표했다
그날 종례 후 선생님은 나를 불러 '다리 긴 아저씨'라는 제목의 책을 선물하셨다
책 선물은 난생 처음이었다
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A를 나쁘게 생각하지 마. 네 글이 좋아서 그랬을 거야. 그만큼 네가 잘 쓴 거니까 너는 계속 글을 쓰렴. 나도 네 글이 좋아."
"네 글이 좋아."
"네 글이 좋아."
"네 글이 좋아."
전학간 여자에게 고백 받은 소설 속 주인공처럼 심장이 쿵쾅거렸다
집으로 달려간 나는 엄마에게 선생님께 책 선물을 받았다며 자랑했다
"나만 받은 거야! 선생님이 내 소설이 좋다고 주신 거야!!"
선생님의 변화와 혁신은 학교에서 가장 음침하고 무거운 곳에까지 닿았다
5월부터 우린 군수배 핸드볼대회를 준비했다
반 전체가 43명이었는데 남녀팀 모두 출전을 했으니 절반 이상이 선수였다
어쩔 수 없이 오후 수업은 제끼고 모두 훈련을 했다
혈기왕성했던 체육쌤은 남녀 가리지 않고 스파르타식으로 훈련시켰다
대회를 일주일 앞두고 면 단위 학교를 불러 친선대회를 가졌다
우린 리 단위 학교였기에 상대는 우리보다 실력이 좋았다
그래도 여자팀은 이겼지만 남자팀은 졌다
경기 후 우린 밀대자루로 매질을 당했다
후보까지 12명이 일렬로 엎드리고 체육쌤이 매타작을 했다
한 차례 훈계를 하고 다시 매를 들었다
그때 우리 담임쌤이 나타나 체육을 제지했다
체육은 '내 소관이니 상관하지 말라'고 물리쳤지만
담임쌤은 '내 아이들이니 매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맞섰다
체육은 눈이 튀어나오게 담임쌤을 노려보다가
우리에게 멈추라고 할 때까지 운동장을 계속 돌으라고 했다
한 바퀴 돌아 두 쌤들 가까이 왔을 때 체육쌤의 얼굴이 붉었다
두 바뀌째엔 담임쌤의 목소리가 커졌다
세 바뀌째엔 체육샘이 밀대를 던지고 학교로 들어갔고 담임쌤의 눈은 붉었다
담임쌤은 우리를 멈추게 하고 수돗가로 가 씻으라고 했다
교무실로 향하는 담임쌤을 눈으로 좇으면서 나는 생각했다
'선생님도 씻으세요. 그 눈으로 교무실 들어가시면 안 될 거 같아요'
핸드볼대회는 축구대회와 함께 우리 군에서 가장 큰 행사였기에 선수들 부모님까지 모두 읍내로 향했다
우린 총 4경기에서 이기면 우승이었다
준결승에서 전년도 우승팀을 만났다
내 포지션의 상대는 키가 174CM였다
내가 손을 뻗어도 그놈의 키를 넘기 어려웠다
그가 떠올라 숏을 날릴 땐 폭격기 같았다
우린 맥없이 전반 내내 이끌려 다녔다
하프타임 때 나는 체육쌤에게 크게 혼났다
네가 막아야 할 놈이 10점 넘게 넣었다며 더 악착같이 붙으라고 하셨다
혼나는 나를 엄마가 멀리서 지켜보고 계셨다
후반에 나는 심판 몰래 그놈 옷을 당기고 공의 위치와 상관 없이 그놈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발을 묶었다
키가 크지 않지만 슛이 좋았던 우리팀 에이스가 골맛을 보면서 우린 대등하게 스코어를 만들어갔다
후반을 3분 남겨놓고 그놈이 내 앞에서 뛰어올라 슛을 날리려했다
나도 맞서 떠올라 블로킹을 시도했다
내 손은 공을 막지 못하고 그놈의 손목을 껐었다
휘슬이 울렸고 나는 2분 퇴장 명령을 받았다
벤치로 돌아오는데 엄마 얼굴이 보였다
벤치에 앉자마자 나는 울어버렸다
또르르 눈물을 떨구는 것도 아니고 어린 애처럼 엉엉 울었고 어깨까지 들썩였다
눈물을 삼키려다 속에서 올라오는 숨에 딸꾹질하듯 울음을 되새김하는 기이한 울음이었다
창피했지만 진정할 타이밍은 지나가버려 난 더 크게 울 수밖에 없었다
속상할 정도로 눈물이 나서 더 서러웠다
그때 담임쌤이 나를 안아주셨다
안고서 위로해 주시면서 아직 1분 남았어, 네가 할 일이 남았으니 이제 그치고 잘해보자고 다독였다
그제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고 필드에서 열심히 뛰는 팀이 보였다
우리팀은 아슬하게 그 경기를 이기고 결승에서는 져서 2등을 했다
작은 군이지만 출전 학교가 15개가 넘었기에 우리의 성적은 학교 역사에 남을 대기록이었다
그런데 여자팀은 1등을 해서 남자팀의 성적은 묻혔다
그래도 나는 그 경기를 아직도 잊지 못하고 그 경기를 떠올리면 그 때의 3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학기가 시작되고 수학경시대회를 준비하게 됐다
선생님과 나는 1교시 전 30분 먼저 만나 수업했는데
1:1 과외수업처럼 진행했다
그때 선생님의 말들에서는 불고기 냄새가 났다
그게 무슨 냄새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양치 후 향은 아니었고 고기냄새라 생각됐다
어른이 돼서 소불고기를 먹어보고 익숙한 향이라 생각됐는데 그게 선생님의 냄새가 떠올랐다
선생님께서 아침마다 소불고기를 드셨을리 만무하지만 이후 소불고기를 먹을 때마다 반가웠다
선생님에게는 소문이 하나 있었다
결혼한 지 3년째였는데 결혼스토리에 대한 괴소문이었다
이전 학교에서 한 남자쌤이 선생님을 오래 짝사랑했고 권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결혼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쌤은 우리 학교로 오고 남편은 면 단위 학교로 갔다고 했다
수학경시대회에 나가서 면에서 온 친구에게 남편쌤에 대해 물었더니 아주 성격이 고약하고 무서운 선생이라고 해 소문을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날 종례 후 무슨 일로 쌤과 둘이 남게 됐다
용건이 끝나고 갑자기 용기가 나 쌤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000선생님(남편)을 사랑해서 결혼하신 거예요?"
선생님은 나의 무례에 의아해 했고, 엉뚱한 질문에 황당해 하시면서 결국 웃었다
"그게 무슨 질문이야? 사랑하니까 결혼하는 거지."
-"아니... 어른들은 왜 결혼하나 궁금해서요."
"ㅎㅎ 너도 나중에 알게 될 거야. 000선생님이 무섭기로 여기까지 소문난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아주 착한 아빠야."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어쩌면 내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졸업식에서 선생님은 노란 저고리와 빨간 치마 한복을 입으셨다
5학년생이 송가를 하면서 이별을 고했다
졸업생 답가는 A가 했다
A는 첫 구절부터 눈물을 흘리더니 식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어 버렸다
선생님도 많이 우셨다. 그때 그 운동장에서 붉은 눈을 본 후로 붉어진 눈을 다시 봤다
선생님은 우리와 한 명씩 안고서 이별하셨다
나도 선생님에게 안겨 한참 인사말씀을 들었다
기묘하게도 그날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눈 앞에 있던 노란 옷고름에 내 콧물이 묻을까 걱정했던 기억밖에 없다
면에 있는 학교로 중학교를 갔기에 이후에도 자주 선생님을 찾아뵀다
고등학교는 다른 도시로 가게 돼 선생님을 뵙기 어려웠다
당시 우리집은 민박과 식당을 겸하고 있어서 선생님이 가끔 찾아오셨다
대학 졸업 전인가 선생님께서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에 내려갔다
선생님은 가족과 함께 오셨다
그때 선생님은 내가 고등학교를 다녔던 도시로 전근하셨다
다시 십여 년 후 내가 내 가정을 꾸릴 때쯤 또 고향집에 방문하셔서 찾아뵀다
그때 선생님 아이들도 장성해서 서울로 대학을 왔다고 했다
이후 선생님과는 연이 닿지 못했다
몇 년은 전화와 카톡으로 인사를 드렸었는데 그마저도 끊겨버렸다
이글을 쓰면서 선생님의 작은 댓글 하나로 나는 인생이 바꼈다고 감사해 하면서도
그 작은 연락 한 번 못 드리고 사는 게 한심하다
마지막 연락 후 10년도 더 지난 듯 한데 선생님은 아직 날 기억하실까?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제자를 알아보실 수 있을까?
나처럼 수많은 아이들의 인생에 당신이 꽃같은 존재였다는 걸 선생님은 아실까?